• Title/Summary/Keyword: 성과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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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사종(圓覺寺鐘)에서 보신각종(普信閣鍾)으로 -조선시대 탈불교화의 일례- (Transforming the Wongaksa Bell[Buddhist Bell] to the Bosingak Bell[Court Bell]: An Example of the Debuddhismization during the Joseon Dynasty)

  • 남동신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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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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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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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보신각종은 호불군주 세조가 즉위 10년을 맞이하여 한양 도성 한복판에 원각사를 건립하면서 그곳에 봉안하고자 1468년에 조성한 범종(梵鐘)이었다. 현재 보신각종은 타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손상되었는데, 그것은 원각사종에서 보신각종으로의 역사적 변천을 잘 보여준다. 필자는 본고에서 보신각종에 가해진 인위적 훼손에 주목하여, 누가, 언제, 왜 훼손하였으며,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먼저 제1장에서는 관련되는 선행 연구성과를 검토하여 필자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점 및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특히 가장 주된 논점인 보신각종과 원각사종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학설사를 검토하여, '보신각종=원각사종'의 관점에서 필자가 논의를 전개함을 밝혔다. 이어서 제2장에서는 세조가 원각사종을 조성하게 된 배경을 검토하였다. 구체적으로 조선 초에 왕명으로 조성한 종들을 조종(朝鍾)과 범종(梵鐘)으로 나눈 다음, 조종 4구-태조의 종루종, 태종의 돈화문종, 세종의 광화문종, 세조의 사정전종-와, 범종 3구-세조의 용문사종, 흥천사종(또는 정릉사종) 및 원각사종-를 만든 시기순으로 정리하였다. 요컨대, 세조는 만년에 원각사종을 조성하면서, 거기에 한 마음으로 임금과 부처가 소리로써 백성을 교화하겠다는 의미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제3장에서는 보신각종에 보이는 인위적 훼손의 흔적을 면밀하게 고찰하였다. 먼저 보신 각종의 현상을 관찰한 다음, 이를 보신각종을 전후하여 조성한 흥천사종(1462) 및 봉선사종(1469)과 비교하여, 범종의 구성 요소 가운데 무엇이 얼마나 훼손되었는가를 추적하였다. 훼손된 구성 요소는 다시 불교적 요소-견대(肩帶)의 복련(伏蓮), 보살입상 4구, 최항(崔恒)이 지은 종명(鐘銘)-와, 비(非)불교적 요소-주종 관계자 가운데 도제조(都提調) 명단-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원각사종에서 불교 문자와 상징이 지워졌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를 '불교지우기'라 명명하고 그 이념적 요인으로 동시대 유자(儒者)들의 맹렬한 벽불론(闢佛論)을 주목하였으며, 후자는 정치적 요인으로 연산군의 갑자사화를 지목하였다. 그리고 보신각종의 인위적 훼손에는 이념적 요인과 정치적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였다는 점에서, 그 시기를 갑자사화(1504년)부터 연산군 퇴위까지로 추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제4장에서는 범종으로서의 원각사종이 조종으로서의 보신각종으로 바뀌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변신의 의미를 종소리의 상징성에 초점을 맞추어 음미하였다. 1468년 최종적으로 완성된 원각사종은 1504년까지 36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예불(禮佛)을 위한 범종으로서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1504년 원각사가 폐사되면서 그 역할도 끝났다. 1536년에는 원각사지에서 남대문으로 옮겨졌으며, 1594년 11월 다시 타종할 때까지 전후 90년 동안 침묵 속에 방치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의 병화로 종루종이 파괴되면서 원각사종은 조종으로 재탄생하였으며, 명동 고개를 거쳐 1619년 종루로 이전되었다.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종루종[보신각종]으로서 1908년 일제가 타종을 중단시킬 때까지 300년 가까이 매일 새벽[파루(罷漏)]과 저녁[인정(人定)]마다 규칙적으로 타종되었다. 원각사종[범종]에서 보신각종[조종]으로의 변신은, 종소리가 상징하는 바가 부처의 소리에서 임금의 소리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원각사종이 보신각종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단적으로 드러난 '불교지우기'는, 조선 전시기에 걸쳐 불교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요컨대, 보신각종에서 확인되는 불교지우기야말로 조선시대 한국 사회의 탈불교화를 역설한다 하겠다.

간송미술관 소장 《삼청첩(三淸帖)》의 역사성에 대한 고찰 (A Study on Historicity of 《Three Purities Album (三淸帖)》 in the Kansong Art Museum)

  • 백인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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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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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6-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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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간송미술관 소장 ${\ll}$삼청첩${\gg}$은 조선 중기 문인 화가인 탄은(灘隱) 이정(李霆)이 매화, 난초, 대나무를 그리고, 시를 지어 함께 장첩한 시화첩(詩畵帖)이다. 조선 묵죽화의 전범(典範)을 세운 화가로 평가받는 이정의 시화(詩畵)를 한 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ll}$삼청첩${\gg}$의 미술사적 가치는 매우 높다. 그러나 ${\ll}$삼청첩${\gg}$의 가치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ll}$삼청첩${\gg}$의 이력(履歷)이라 할 수 있는 제작배경, 성첩(成帖)과정, 전래시말 등에는 제작 당시의 시대상은 물론, 통시대적인 다양한 역사상들이 투영되어 있다. ${\ll}$삼청첩${\gg}$은 이정이 임진왜란시 왜적에게 칼을 맞는 수난을 겪은 후, 필생의 역작을 남기려는 의도 하에 만들어졌다. 이후 최립(崔?), 차천로(車天輅), 한호(韓濩) 등 시서(詩書) 각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성가를 구가하던 문인들이 동참하여 성첩되었다. 그리고 유근(柳根), 이안눌(李安訥), 유몽인(柳夢寅) 등이 찬문과 제시를 지어 상찬하였다. 그야말로 '일대교유지사(一代交遊之士)'가 동참하여 만들어낸 '일세지보(一世之寶)'였던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ll}$삼청첩${\gg}$은 이정 개인의 작품을 넘어 조선 중기 문예의 지향과 역량이 한 자리에 모인 종합예술품이며, 조선 중기 문화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ll}$삼청첩${\gg}$은 이정이 세상을 뜬 후, 선조의 부마인 홍주원(洪柱元)에게 넘어갔고, 병자호란 시 소실(燒失)될 위기를 겪는다. 현재까지도 그때의 화흔(火痕)이 역력하게 남아 있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호란이 끝나고 홍주원은 동서(同壻)인 윤신지(尹新之)의 도움으로 훼손된 일부 제발문(題跋文)들을 복원하였고, 이후 풍산 홍씨(豊山洪氏) 집안에서 7대를 이어가며 가보(家寶)로 전해진다. 홍중기(洪重?)의 요청에 의해 쓰여진 송시열(宋時烈)의 발문과 홍상한(洪象漢)의 요청에 의해 쓰여진 어유봉(魚有鳳)의 발문 등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정 생존시 문인들이 이정과 ${\ll}$삼청첩${\gg}$의 지닌 작품성에 대해 상찬한 것과는 달리 후대 문인들의 글은 ${\ll}$삼청첩${\gg}$의 전래과정과 그와 관련된 인물들에 초점을 두고 있어 대조적이다. 후대의 문인들은 ${\ll}$삼청첩${\gg}$ 자체의 작품성보다는 그에 얽힌 일화와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흥미를 느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ll}$삼청첩${\gg}$을 다시 복원한 홍주원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는 ${\ll}$삼청첩${\gg}$의 소장자로 글을 부탁한 홍주원의 후손들인 홍중기, 홍상한 등의 정치적, 사회적 입지를 강화시켜 주고자 하는 의도가 없지 않을 것이다. 홍주원의 후손들에게는 ${\ll}$삼청첩${\gg}$이 가문의 조상을 추숭(追崇)하는 기재인 동시에, 정치적 정통성과 가격(家格)을 담보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미술품의 미적 가치 못지않게 그 안에 내재된 역사성을 중시했던 동아시아 특유의 예술 인식의 근인(根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ll}$삼청첩${\gg}$은 조선 말기 외세 침탈의 와중에서 일본인 츠보이 코우소(坪井航三)에게 넘어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다행히도 일제시기 심혈을 기울여 우리 문화재를 수호했던 전형필(全鎣弼)이 이를 되찾아왔고, 현재 간송미술관에 수장되어 전해오고 있다. ${\ll}$삼청첩${\gg}$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 침탈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국난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우리 문화재의 수난과 보존의 역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를 통해 하나의 미술품이 유전과정에서 또 다른 역사성을 지속적으로 축적하며 그 의미와 가치를 강화시켜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중층적인 시의성(時宜性)과 지속적인 역사성(歷史性)을 지닌 ${\ll}$삼청첩${\gg}$은 미술품이 미적 가치와 더불어 사료적 가치를 얼마나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 생각된다. 이를 계기로 향후 미술품의 이력과 그 역사적 의미를 찾는 고찰들이 활성화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