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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괴 기법을 이용한 태종 헌릉 신도비의 표면 훼손도 진단 (Surface Deterioration Diagnosis of Taejong Heonreung Sindobi Monument using Nondestructive Method)

  • 이명성;박성미;전유근;이선명;이재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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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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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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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는 조선시대 제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의 생애와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1424년(세종 4년)에 세운 것이다. 신도비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병화(兵禍)로 인해 훼손되었으나 보수하지 못하여 1695년(숙종 21년)에 구비 옆에 신비를 조성하여 제작시기를 달리하는 2개의 신도비가 위치하고 있다. 구비는 담회색의 중립질 흑운모화강암(귀부)과 유백색의 결정질석회암(비신, 이수)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비의 귀부는 괴상 탈락이 심각하여 원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며 비신에는 균열이 수직상으로 발달하고 표면에 박리박락으로 인해 일부 비문의 확인이 어려운 상태이다. 비파괴 기법을 이용한 전체적인 훼손율을 살펴볼 때, 정면이 88.0%, 후면이 37.9%로 정면에서 높은 훼손율을 나타냈으며, 특히 비신의 경우 물리적 훼손과 표면변색이 복합적으로 발생한 상태로 비신의 정면 하부에 훼손이 심각하다. 구비의 우측에 재건된 신비는 구비와 동일한 암석 구성을 확인하였으며 두 비석을 대상으로 초음파속도를 이용하여 풍화도지수를 산출한 결과, 구비의 귀부는 0.10, 비신은 0.74로 산출되었다. 이는 임재왜란 시 화재로 인한 열 충격 및 타격으로 의한 물리적 충격으로 급격히 열화된 상태에서 오랜 시간 보호각 없이 방치되어 자연풍화가 가속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Polyoxyethylene Octylphenyl Ether를 포함한 계면활성제 혼합물의 토양 잔류성 및 상토의 초기습윤화와 수분이동에 미치는 영향 (Soil Residual Activity of Surfactant Mixtures Containing Polyoxyethylene Octylphenyl Ether and Their Effect on Initial Wetting and Water Movement in Container Media)

  • 최종명;민경래;최종승
    • 원예과학기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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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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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2-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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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본 연구는 토양습윤제를 개발하기 위해 비이온계 계면활성제인 polyoxyethylene octylphenyl ether[$C_8H_{17}O(C_2H_4O)_{10}H$, POE]를 주 계면활성제로, polyoxyethylene+polypropyleneoxide tridecylether(1:1, w/w, CM-1), polyoxyethylene+polypropyleneoxide tridecylether+propyleneglycol monomethylether(1:1:2, w/w/w, CM-2) 및 glycerin+ditridecyl phthalate(1:1, w/w, CM-3)등 3종류의 부 계면활성제, 그리고 질석과 비석을 증량제로 조합하여 상토 내 농도변화, 초기습윤화에 미치는 영향 및 상토의 물리적 특성에 미치는 영향 등을 조사하였다. 비석이나 질석이 증량제로 이용되고 POE와 CM-1, 2 또는 3을 조합한 경우 초기용출량이 많았으며 6회 이후 급격히 감소하여 불안정한 용출곡선을 보였다. POE+CM-1, 2 또는 3이 상토의 초기습윤화에 미치는 영향에서 AquaGro가 혼합된 처리가 다른 모든 처리보다 초기 18시간 동안의 수분 보유량이 많았으나 처리간 차이가 뚜렷하지 않았으며, 84시간 이후에는 POE+CM-2 처리에서 가장 많은 수분을 보유하였고 무처리구를 제외한 모든 토양습윤제 혼합처리구간의 차이는 뚜렷하지 않았다. 증발에 의한 상토의 수분상실에서 비석이 증량제로 이용된 경우 POE+CM-3이 혼합된 상토의 증발속도가 가장 빨랐고 POE+CM-2, AquaGro, 무처리구, 그리고 POE+CM-1의 순으로 느려지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질석이 증량제로 이용된 경우 POE+CM-1의 증발속도가 다른 처리들 보다 월등히 빨라 수분상실량이 많았으며, POE+CM-3, AquaGro, 무처리구 그리고 POE+CM-2의 순으로 느려지는 경향이었다. 단위시간당 상토안으로 침투되는 수분량에서 비석이 증량제로 이용된 경우 POE+CM-1, POE+CM-3, AquaGro, POE+CM-2 및 무처리구의 순으로 단위시간당 침투되는 수분량이 적어지는 경향이었다. 질석이 증량제로 이용된 경우 POE+CM-3, AquaGro, POE+CM-1, POE+CM-2 및 무처리구의 순으로 단위시간당 침투되는 수분량이 적어지는 경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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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보천가(步天歌)와 천문류초(天文類抄)의 성립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Establishment of Pochonka and Chonmun yucho in the Early Choson Dynasty)

  • 안상현
    • Journal of Astronomy and Space Sc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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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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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2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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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조선 초기의 보천가(步天歌)와 천문류초(天文類抄)에 대해 연구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근거로부터 이 보천가(步天歌)의 가결(歌訣)이 A.D. 1161년에 중국에서 출간된 통지(通志)에 실려 있는 보천가(步天歌)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았다. 두 보천가(步天歌)의 별자리들은 서술 순서가 같고, 태미원(太微垣)의 가결(歌訣)의 첫 구철이 일곱 글자가 아니라 다섯 글자로 되어 있으며, 특히 별자리들에 대한 은하수의 위치를 기술한 천하기몰(天河起沒)은 통지(通志)의 저자인 정초(鄭樵)가 특별히 작성하여 보충한 것인데 그것이 조선 보천가(步天歌)에 들어 있다는 점이 그 근거들이다. 통지(通志)는 A.D. 1364년에 고려에 들어왔으므로, 조선 초기의 보천가(步天歌)는 그 후에야 성립 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보천가(步天歌)는, 중국의 보천가(步天歌)들과 비교할 때, 그 가결(歌訣)에 별자리들의 색깔이 유난히 강조되어 있다. 이것은 석신(石申), 감덕(甘德), 무함(巫咸)으로부터 기원한 별자리를 색깔로 구분하려는 의도이다. 조선 초기에 출간된 보천가(步天歌)와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성도(星圖)들은 별자리들의 이름, 별개수, 모양 등이 일치한다. 이 사설은 조선 보천가(步天歌)의 성도(星圖)가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모본(母本)이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자체에서 기원했음을 뜻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모본(母本)은 A.D. 1392년에 발견되어 A.D. 1396년에 비석에 새겨졌기 때문에, 보천가(步天歌)의 성립시기의 상한은 1392년이 된다. 천문류초(天文類抄)는 보천가(步天歌)에 중국의 점성술 문헌의 내용을 덧붙인 책이다. 이 책의 성립 시기는 그 저자인 이순지(李純之)의 생애 등을 근거로 A.D. 1440-1450년으로 추론되었다. 더군다나, 보천가(步天歌)는 A.D. 1430년에 관상감의 천문학자를 뽑는 취재(取才) 시험의 과목으로 선정되었다. 이러한 사설들로부터, 이 연구에서는 조선의 보천가(步天歌)가, 송(宋)의 선진 체제를 받아들임으로써 조선 왕조의 문화적 정치적 기초를 다지기 위해, A.D. 1392년에서 A.D. 1430 사이에 출간되었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제(第)3기층(紀層)에 부존(賦存)하는 점토광물(粘土鑛物)에 대(對)한 광물학적(鑛物學的) 및 성인적(成因的) 연구(硏究) (Mineralogy and Genesis of Bentonites from the Tertiary Formations in Geumgwangdong Area, Korea)

  • 김수진;노진환;유재영
    • 자원환경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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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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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9-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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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
  • 금광동지역(金光洞地域)의 제(第) 3 기(紀) 하부(下部) 마이오세司(世)의 장기층군중에서 산출되는 벤토나이트의 광물학적(鑛物學的) 및 성인적(成因的) 특성(特性)에 관(關)하여 연구(硏究)되었다. 벤토나이트는 장기암을 제외(除外)한 모든 장기층군의 구성(構成)멤버층(層)에서 산출된다. 그러나 중요(重要)한 벤토나이트 찬상(鑽床)은 주(主)로 눌대리응회암층(臺里凝灰岩層), 하부합탄층(下部合炭層) 및 현무암질응회암(玄武岩質凝灰岩)에 부존(賦存)되어 있다. 벤토나이트는 주(主)로 스멕타이트(주(主)로 몬모릴로나이트)와 그리고 소량(少量)의 석영(石英), 크리스토발라이트, 단백석(蛋白石), 장석(長石) 등(等)으로 구성(構成)되어 있고 곳에 따라 클리놀틸로라이트, 할로이사이트, 석제(石齊)가 수반(隨伴)된다. 벤토나이트에 대(對)하여 현미경관찰(顯微鏡觀察), X선교절분석(X線翹折分析), 열분석(熱分析), 외선분광분석(外線分光分析), 주사전자 현미경관찰(顯微鏡觀察), 층간화합반응(層間化合反應), 및 화학분석(化學分析) 등(等)의 방법(方法)으로 연구(硏究)되었다. 스멕타이트는 보통 특징적(特徵的)인 꾸부러진 연변부(緣邊部)를 갖는 불규칙(不規則)한 스폰지 모양으로 산출되지만 경우(境遇)에 따라서는 완만하게 만곡(彎曲)되거나 또는 평탄(平坦)한 얇은 엽상(葉狀)으로 산출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스멕타이트는 격자층문전(格子層聞電)가 0.25~0.42로서 전형적(典型的)인 몬모릴로나이트임을 지시(指示)해준다. 그러나 간혹 바이델라이트에 해당(該當)하는 격자열전하(格子閱電荷)를 보여 주는 시료(試料)도 있다. 결정화학적(結晶化學的) 자료(資料)로 볼 때 8면체구조층(面體構造層)에서는 $Fe^{3+}$$Al^{3+}$을 치환(置換)하고 있으며 4면체구조층(面體構造層)에서는 $Si^{4+}$가 다른 이온에 의(依)하여 별(別)로 치환(置換)되어 있지 않다. 층상격자문(層狀格子問)에는 주(主)로 $Ca^{2+}$가 존재(存在)한다. 따라서 이 지역(地域)의 스멕타이트는 dioctahedral 칼슘몬모릴로나이트이다. 벤토나이트의 산출상태와 조직(組織)은 스멕타이트, 크리스토발라이트 단백석(蛋白石) 및 비석(沸石)이 응회질(凝灰質) 물질(物質)로부터 속성작용(續成作用)에 의(依)하여 생성(生成)되었음을 지시(指示)하여 준다. 스멕타이트의 원암(原岩)은 조면암질(組面岩質) 또는 현무암질(玄武岩質) 응회암(凝灰岩)이며 조면암질보뢰회암(粗面岩質普雷灰岩)으로 으로부터 유래(由來)된 스멕타이트는 현무암질(玄武岩質) 응회암(凝灰岩)으로 유래(由來)된 것 보다 $Al_2O_3$를 높게 그리고 $Fe_2O_3$를 낮게 함유(含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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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향정(披香亭) 일원의 입지 및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Location and Spatial Composition of Pihyang-jeong Zone)

  • 이현우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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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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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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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전라북도 내 5대 정자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며 '호남제일정'이라 일컫는 정읍시 태인면에 위치한 피향정 일원의 입지 및 공간구성에 관해 고찰한 바, 집약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피향정의 조영은 신라 헌강왕대 최치원이 이곳을 소요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구전이 전할 뿐 창건기록은 전무하다. 다만 1618년 이지굉이 초라한 건물을 확장하였고, 1664년 박숭고 1715년 유근의 중수기록이 전한다. 2. 피향정의 입지는 태인면 북쪽의 성황산(189m)과 동쪽의 항가산(106m) 및 남쪽의 태산(33m)을 비롯하여, 북서쪽의 평야로 이루어진 북고남저(北高南低) 지형으로, 전형적인 배산임수 형국임을 파악하였다. 3. 피향정 일원의 공간구성은 하연지(下蓮池)를 향해 피향정이 남남서(SSW)향으로 세워졌으며, 피향정 누상으로의 진입은 동서(좌우)의 석계(石階)로 접근토록 계획되었다. 4. 피향정 일원의 건축물은 '객관의 누정인 피향정 연지의 함벽루 관리인 시설' 등이다. 피향정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장방형 건물이며, 함벽루는 1918년 목조 2층 단청누각으로 초창 후 1971년 장방형 목조와즙 단층 5칸 팔작지붕집으로 개조하였다. 이후 2010년 육각정으로 신축되어 원형과는 전혀 다른 외관임을 파악하였다. 5. 피향정 일원의 점경물은 피향정 경내의 총 21기의 비석군과 피향정을 둘러싼 160m 전통한식 막돌담장을 확인하였고, 맞배지붕 일각문으로 3문 형식을 띤 3개의 출입문과 피향정일곽 외부의 동편에서는 하마석이 확인되었다. 6. 피향정 일원의 수경관은 관아인근의 자연못의 물을 끌어들이고 그 주변에 누정을 건립한 대표적 예이다. 7. 피향정 일원의 식생은 일곽경계에서는 느티나무, 남측 소공원에서는 느티나무 배롱나무 반송 소나무 영산홍 자산홍 잔디 등이, 하연지 상의 함벽루에서는 느릅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등이 양호한 생육상태로 확인되었다.

중국 역대 북경팔경(北京八景)의 경관인식 변화에 대한 고찰 (A Study on the Changes of Landscape Perception for 'Bejing-Palgyeong(北京八景)' in China)

  • 권지영;김성균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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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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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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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북경팔경과 관련된 시문과 서화를 비롯하여 고지도·고문헌 등을 분석하여 북경팔경의 시대별 변천과정과 경관인식 변화, 북경팔경의 물리적 경관요소 및 구조분석과 국가경영과의 관계, 마지막으로 북경팔경의 장소화과정을 고찰하였다. 북경팔경의 경점은 도성 밖과 안으로 각각 네 곳씩 분포하고 있으며, 도성 밖은 모두 황제의 휴식처이자 북경의 산수경관의 중심인 서산 지역에 집중되었고, 도성 안의 경점은 궁궐의 황제원림에 두 곳, 성곽 주변의 마을 두 곳에 분포하고 있다. 즉 북경팔경은 초기 조성될 때부터 황실, 황제, 황궁과 밀접하게 관련된 장소로 선정하였으며, 금 이후 원·명·청대를 거치면서 황제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국가경영에 활용함으로써 점점 도성팔경으로서 성격이 짙어졌다. 도성 내 두 곳은 신선과 황제를 동격화하여 칭송하였으며, 도성 밖 두 곳은 도성주변의 마을 경관의 모습을 담고 있으면서 통치를 받는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묘사하고 있다. 결국 팔경의 대부분 조망지역은 황궁과 황제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북경팔경의 물리적 경관을 요소별로 살펴보면, 수도방비·인재선발·농사에 대한 내용을 담은 국가경영과 황제 칭송, 북경 민가의 모습을 담고 있다. 건륭제는 중국의 팔경(경관) 문화를 소상팔경(북송)→서호팔경(남송원말)→연경팔경(금대)→북경팔경(명대)→건륭제의 연산팔경(청대)으로 역사적 맥락을 계승하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석과 원림 조성을 통해 북경팔경의 장소화하는 과정을 확인하였다.

개항기 인천 근대정원의 조영특성에 관한 기초연구 - 리키다케 별장을 중심으로 - (A Basic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Modern Garden in Incheon During the Opening Period - Focused on Rikidake's Villa -)

  • 진혜영;신현실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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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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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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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근대정원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인천 제물포의 조계지 형성 및 변화과정을 분석하고 이곳에 조성된 근대정원의 조영 내용을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인천 조계지의 형성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과거 제물포는 황량한 어촌이었으나 1881년 개항 이후 일본 조계지와 청국전관조계 및 각국공동조계가 형성되었다. 이후 일본은 남쪽 갯벌지대를 매립하여 조계지를 확장했고, 조선지계(현신흥동 일대)로 진출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전관조계를 중심으로 일본의 근대도시경관을 이식하였으며, 조계지의 중심가 주변지역에 근대정원들이 분포하고 있다. 둘째, 리키다케 별장을 대상으로 정원의 조성과정을 살펴본 결과, 일본인 리키다케가 인천의 대지주였던 우리탕의 과수원 부지를 매입하여 정원을 조성하였다. 리키다케의 거주 당시에는 정원공간만 약 3,000평으로 매우 큰 규모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인천시에서 인수하여 율목어린이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은 개항 당시 부촌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율목동 일대 가장 높은 곳에 정원이 위치하여 인천항 일대의 조망이 용이했다. 또한 리키다케의 정미소와 직선거리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점 또한 입지선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셋째, 오늘날 리키다케 별장의 정원은 석축을 쌓은 사다리꼴 형태의 부지에 복층의 일본식 가옥이 위치하고, 남측에 약 990㎡ 규모의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현재 남쪽에서의 진입과 북쪽 율목 어린이공원에서의 진입이 가능하나 과거에는 인천항과 조계지, 그리고 리키다케 정미소를 조망할 수 있는 방향이 가옥의 주 향이었을 것으로 보아 정원을 앞에 두고 가옥이 위치했을 것이다. 정원은 원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석등과 비석, 정원석, 수목 등을 배치한 다정양식에 해당하며, 주변에 주목, 스트로브잣나무, 단풍나무 등의 수목식재와 둥글게 전정한 철쭉과 영산홍이 주를 이루고 있다. 가옥 주변에는 관목 중심의 식재를 통해 가옥 내부에서의 조망을 확보하였다.

조선후기 백동의 재료 구성과 변화 (Material composition and change of baekdong alloy in the late Joseon period)

  • 공상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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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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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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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백동(白銅)은 구리에 다른 금속을 섞어 녹여 만든 합금으로, 현재 구리와 니켈의 합금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의 연구 대상과 시기에 따라 백동은 구리에 일정 비율 이상의 주석을 더한 금속으로 정의되기도 하고, 구리에 주석과 아연과 납을 합금한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백동은 그 정의에 차이가 있어 용어의 해석과 표기에 혼란이 있어 왔다. 본 연구는 문헌 기록을 토대로 시론적으로나마 백동의 구성 재료를 정리하고 그 흐름을 살피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먼저 백동 합금의 바탕 재료가 되는 구리의 이용과 구리 합금의 종류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문헌의 백동 기록을 통해 그 사용과 인식을 정리해 보았다. 삼국시대 문헌에서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백동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기까지 꾸준히 보이는데 관직의 상징물부터 교역품, 생활기물, 화폐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쓰였다. 문헌 기록을 살펴보면 백동의 합금 재료는 현재 합금의 재료로 정의되고 있는 구리와 니켈뿐이 아닌데,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구리를 합금의 바탕 금속으로 이용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구리 외의 합금 재료로는 주석, 비석 및 비상, 아연, 납 등이 등장하며, 그 과정에서 합금을 의미하는 백동과, 백색의 금속을 의미하는 백동이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 정의되고 있는 백동의 합금 재료인 니켈은 비교적 발견 시기가 정확한 금속으로 현대 공업과 산업 분야의 소재로 폭넓게 쓰이고 있다. 니켈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시기는 조선 말기에서 근대기로 추정되고 있으나 그 이용과 사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근대기 신문기사와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니켈의 수용과 그 이용을 함께 살피고, 장인들의 증험을 토대로 니켈을 이용한 백동 합금이 공예품에 사용된 시기를 추정해 보았다. 재료는 기술의 발전과 퇴보에 직접적인 요인이 되며, 기술의 발달은 문명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토대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시론적으로나마 합금의 재료를 중심으로 백동을 살펴보고자 하였으며 니켈이라는 재료의 이용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조선시대 능비(陵碑)의 건립과 어필비(御筆碑)의 등장 (Formative Stages of Establishing Royal Tombs Steles and Kings' Calligraphic Tombstones in Joseon Dynasty)

  • 황정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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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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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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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은 조선 초 중기, 조선후기, 대한제국기 세 시기로 나누어 조선왕릉에 건립된 신도비와 표석의 시기별 건립추이와 양식적 특징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왕실 능비(신도비와 표석)는 일반 사대부가와 달리 건립한 시기와 주체, 후계왕의 의도에 따라 시기별 차이를 보이며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15~17세기는 왕릉 신도비의 건립과 재건이 이루어진 시기, 18세기는 신도비가 표석으로 대치되어 다수 건립되었고 국왕의 어필을 직접 돌에 새긴 어필비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이며 대한제국기는 황제국으로 격상됨에 따라 조선 개국자인 태조와 왕후, 선조들에 대한 추숭(追崇)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표석 중건이 이루어진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본다면, 결국 우리나라 능비의 역사는 조선후기를 기점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왕릉 신도비의 형식은 삼국시대의 부정형한 석비의 초보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귀부이수'형의 당비(唐碑) 형식을 수용한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말 탑비의 퇴화된 양식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15세기 건립 당시부터 선왕에 대한 숭모 예를 표현하고자 하는 국왕과 왕의 치적이 국사(國史)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도비를 별도로 세울 필요가 없다는 신료들의 입장이 대치되면서 건원릉 제릉 헌릉 구 영릉 4곳에만 건립된 채 왕릉에는 한동안 석비가 건립되지 않았다. 신도비 건립이 중단된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왕릉에 아무런 표(表)를 해 둘 수 없다는 의견이 제기됨에 따라 형식이 간소한 표석이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82년 작 영릉(寧陵)의 표석은 최초로 왕릉에 건립된 표석이자 장대한 규모,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왕릉의 능표는 영조 재위 기간인 1740년대부터 대규모로 건립되었다. 열성(列聖)에 대한 추숭과 어필간행 등을 통해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전통성을 공표하고자 했던 영조는 제릉의 신도비를 재건하는 한편, 의릉(懿陵)을 비롯하여 총 20곳에 달하는 곳에 표석을 세우는 역사(役事)를 추진했고, 처음 친필 글씨를 돌에 새긴 어필비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어필비 제작 현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소실된 어필을 보존하려 한 숙종의 신념을 계승한 영조에 의해 제도적으로 추진되면서 어필을 새긴 능비가 등장한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시대사적으로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표석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한번 다량 제작된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고종은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태조의 조선 건국에 두고 태조와 그 4대 선조에 대한 추숭과 기념물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고 전면과 후면 모두 자신의 글씨로 채움으로써 역대 어느 왕보다 통치자로서 권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상 언급한 왕릉의 신도비와 표석의 건립 추이는 동시대 원 묘에 건립된 신도비, 표석과 비교 고찰을 통해 시대별 특징과 왕실 조각품으로서 성격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