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부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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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어로방식-어살의 전승과 더 좋은 죽방렴 멸치의 생산: 남해안 죽방렴의 구조 변화와 어업방식을 중심으로 (Passing Down Traditional Fishing Methods Using Fish Weirs and the Production of Better Bamboo Weir Anchovies: Focusing on Structural Changes to Bamboo Weirs and Fishing Methods on the Southern Coast)

  • 전경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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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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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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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어살은 전통어로방식의 하나로 우리나라 연안어업을 대표하는 어구였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연근해 어선어업이 발달하면서 어살을 포함한 전통어로방식은 상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어살은 돌살과 죽방렴 형태로 전승되고 있는데, 경상남도 남해군과 사천시에서는 죽방렴을 이용하여 멸치를 어획하고 있다. 죽방렴의 기본 형태는 물고기가 모이는 공간인 '발통'과, 조류에 의해 물고기가 발통 안으로 들어가게 도움을 주는 V자 혹은 U자 형태의 '할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어업방식은 밀물 때 연안으로 들어왔다가 썰물 때 조류를 따라 발통 안에 갇힌 물고기를 그물이나 뜰채로 어획한다. 이 논문에서는 남해와 사천 지역의 죽방렴 구조와 어업방식의 비교분석을 통해 전통어로방식의 전승 과정을 알아보았다. 먼저 현재의 죽방렴 구조가 완성되는 역사적 과정을 분석했다. 과거 방렴과 어살의 공존 속에서 두 어구의 특성을 조합한 죽방렴이라는 어구가 지족해협과 삼천포해협을 중심으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는 물고기가 모이는 공간(발통)이 원형이거나 방형으로 만들어진 두 가지 형태의 죽방렴의 구조와 어업방식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자연환경에 순응하고, 획득 가능한 자원(재료)을 적극 활용하면서 죽방렴 어업이라는 전통 어로기술을 변화시켜 적합한 기술로 발전시킨 어민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는 죽방렴 멸치에 부여된 새로운 가치를 분석하였다. 더 좋은 멸치라는 죽방렴 멸치의 새로운 가치는 다른 멸치어업에 비해 소량 생산되는 죽방렴 멸치어업의 명맥을 유지시켜 주는 하나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이처럼 죽방렴 어업은 전통어로방식을 전승하고 있다는 역사성과 함께 다른 어로를 통해서 생산한 멸치보다 더 좋은 멸치라는 차별성까지 획득하면서 계승되고 있다.

노인의 식생활지침 실천 평가도구 개발 (Development of an evaluation tool for dietary guideline adherence in the elderly)

  • 임영숙;오지수;김혜영
    • Journal of Nutrition and H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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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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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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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한국인을 위한 식생활지침은 건강한 식생활을 위한 가이드로 활용되는데, 식생활지침에 대한 세부 항목이 제시되지 않아서 지침에 대한 실천도를 자세히 평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본 연구는 식생활지침 실천도를 평가할 수 있는 세부 항목들을 선별하여 지침 실천도를 평가하는 평가도구를 만들고자 수행되었다. 노인의 식생활지침 실천 평가도구 개발을 위하여 문헌검토와 전문가 자문을 거쳐 총 35개의 평가 후보 항목을 추출하고, 전국단위 5개 지역의 남녀 노인 800명 (남 400명, 여 4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수행하였다. 식생활지침의 세 가지 영역별로 후보 항목에 대한 탐색적 요인분석으로 평가도구에 사용될 항목을 선별하고, 확인적 요인분석을 수행하여 구성타당도를 검증하였다. 구조방정식 모형의 경로계수를 활용하여 항목별 가중치를 부여하여 식생활지침 실천 점수를 계산하고, 전국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평가도구의 등급 체계를 마련하였다. 본 연구에서 개발된 노인 식생활지침 실천 평가도구는 총 28개 항목으로 식품섭취 영역 13항목, 식생활습관 영역 7항목, 환경을 생각하는 식생활 문화 영역 8항목으로 구성되었다. 식품섭취 영역에는 신선 생채소, 황색채소, 생과일, 콩·견과류, 생선·해산물, 고기·달걀 섭취, 우유·유제품, 잡곡 섭취, 물, 다양한 식품군 섭취, 육류 가시지방 제거, 단 음료, 염장 식품 섭취 항목이 포함되었고, 식생활습관 영역에는 건강체중 유지, 활동량 증가 노력, 운동, 과식정도, 과음빈도, 아침식사 빈도, 식사의 규칙성 항목이 포함되었다. 환경을 생각하는 식생활문화 영역에는 조리 및 음식 먹기 전 손 씻기, 유통기한 (소비기한) 확인, 개인 접시에 덜어 먹기 실천, 냉장고에 보관한 음식 덜어 먹기, 제철음식 섭취, 지역 농산물 이용, 식품 원산지 확인,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가 포함되었다. 전국설문조사 노인 (n = 800)의 식생활지침 실천 평균 점수는 56.9점이었고, 식품섭취 영역 49.8점, 식생활습관 영역 63.2점 그리고 식생활문화 영역은 58.6점이었다. 식생활지침 실천 점수는 기 개발된 노인 영양지수 및 식품정보이해력 점수와도 유의한 상관성을 보여서 식생활지침 실천 평가 도구가 식품섭취와 식행동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식생활 실천 부분도 잘 반영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노인 맞춤형 식생활지침 실천 평가 도구가 노인들의 식품섭취, 식생활습관 및 식생활문화 영역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쉽고 간편한 검색 평가 도구로 활발하게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 안사국(安邪國) (A Study of Dohang-Ri wooden coffin and Anya-Kuk)

  • 이주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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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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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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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성격과 성립시기(成立時期)에 대하여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는 상황이나 모두 나름대로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헌자료의 기록과 고고자료상에서 서로 공통적으로 관련지어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철기문화(鐵器文化)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며, 연(燕)의 철기문화(鐵器文化)를 갖춘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성립은 근본적으로 한반도 북부지역 뿐 만 아니라 중 남부지역에 이르기까지 큰 파장을 미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철기문화(鐵器文化)의 도입단계에는 철기(鐵器)의 실용적이고 희소적인 가치에 의해서 매장유구(埋葬遺構)에는 쉽게 부장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나 기원전 2세기 전반경부터는 일부 한정된 철기(鐵器)만이 매장유구(埋葬遺構)에 부장되는 경향이다. 따라서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성립시기는 철기의 도입과 보편적인 활용으로 보아야하며 목관(木棺)을 사용한 서북한지방(西北韓地方)의 토광묘문화(土壙墓文化)를 포함하여 중남부지역(中南部地域)에 있어서 목관(木棺)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는 적석목관묘(積石木棺墓) 단계, 즉 기원전 3세기전반대의 어느 시점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한편 함안(咸安) 도항리고분군(道項里古墳群)에서 확인된 목관묘(木棺墓)는 목관(木棺)의 형태에 있어서 판재조립식목관(板材組立式木棺)과 통나무목관(木棺)의 2종류가 확인되며, 판재목관(板材木棺)의 사용 비율이 3배 이상 높은 편이다. 출토유물(出土遺物)은 비교적 단순한 조합상(組合相)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영남지역(嶺南地域)을 중심으로 한 목관묘유적(木棺墓遺蹟)에서도 모두 확인되고 있는 특징이므로 전반적으로 변(弁) 진한사회(辰韓社會)의 매장문화는 동일한 흐름 속에서 전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통나무로 제작한 목관(木棺)은 적석목관묘(積石木棺墓)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므로 한국식동검문화(韓國式銅劍文化)와 함께 목관(木棺)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생각되며,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과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에서만 이러한 목관(木棺)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는 것은 변한사회내(弁韓社會內)에서 양지역간(兩地域間)의 유기적인 관계를 살피는데 있어서 주목되어야 한다.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에서 출토되고 있는 철기류((鐵器類)도 거의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의 그것들과 유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도항리(道項里) 67호묘(號墓) 출토 주조철부(鑄造鐵斧)는 다호리 1호분에서 출토된 주조철부(鑄造鐵斧)와 같은 지금(地金)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소형철부(小形鐵斧)의 구성비율이 다른 철기류에 비해서 월등히 높은 것과 기경구(起耕具)로 이용되는 철제따비의 출토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단계에는 목제농기구(木製農器具)의 제작과 사용이 활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에 비해 절대적으로 빈약한 철기유물은 안사국(安邪國)의 내적(內的)인 한계(限界)를 보여주는 것이며 소국(小國) 수장(首長)의 신분적(身分的)인 상징(象徵)으로서 사용하였던 동경(銅鏡)과 의기류(儀器類)의 출토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를 조영한 집단(集團)은 당시 대외문화교류(對外文化交流)의 중심적인 선진지역(先進地域)에 비해서 사회문화적(社會文化的)인 변동(變動)이 덜한 주변 지역적인 성향이 강한 집단(集團)일 것으로 생각된다. 기원후 2세기 후반경 영남지역의 목관묘(木棺墓)는 목곽묘단계(木槨墓段階)로 변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도항리(道項里)와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에서도 목관묘(木棺墓)는 2세기대를 종점(終點)으로 사라진다. 고고자료상으로도 3세기에서 4세기대에 해당되는 적극적인 유구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3세기 전반 이후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일어났던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전쟁과 관련지어 합리적으로 추론하고자 한다. 즉 변한사회내(弁韓社會內)에서 도항리(道項里)와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의 양집단(兩集團)은 낙동강(洛東江)과 남강수계(南江水系)를 장악한 교역(交易)의 중심지(中心地)로서 서로 경제적(經濟的) 정치적(政治的)인 공조체제(共助體制)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록에 보이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대상국은 가나(加羅)와 아라국(砑羅國)이며, 가나(加羅)는 다호리집단(茶戶里集團)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전쟁시기도 기원 3세기 전반대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이 전쟁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3세기 전반대 이후의 사건으로 파악될 수 있으며, 4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양지역(兩地域)에서 뚜렷한 목곽묘(木槨墓)의 축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도 두 집단(集團)이 전쟁(戰爭)의 피해를 직접 받은 당사자였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강희제(康熙帝)의 「승덕 피서산장(避暑山莊) 36경」에 담긴 황가원림의 경관 특성과 함의 (A Study on the Landscape Characteristics and Implications of the Royal Garden through 「The 36 Scenery of Seongdeok Summer Mountain Resort」 by Kangxi Emperor)

  • 노재현;맹자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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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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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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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문헌연구와 고서화 도해 그리고 현장연구를 통해 중국 강희제가 읊은 「승덕 피서산장 삼십육경(承德 避暑山莊 三十六景)」(이하 「강희36경」) 제영시(題詠詩)의 분석과 해석(解釋)을 통해 「강희36경」에 담긴 경관 특성과 함의를 추적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강희36경」은 팔경시의 외연(外緣)을 연장한 것으로, 기존의 「팔경시」나 <팔경도>와 비교해 볼 때 '대상 중심'이 아닌 '시점(시점장) 중심'의 경관 형상화가 두드러진다. 그 결과 전(殿)과 정(亭) 등 9개 유형의 건축물을 시점으로 구조화된 경관 틀짜임을 지향하였다. 특히 호박구에 입지한 여의주는 중국의 저명한 원림과 산수시 및 산수화의 정수(精髓)만을 모은 집금식(集錦式) 배치와 구성을 통해 원중원(園中園)의 성격을 부여하였다. 표제어 분석 결과, 제영시에 등장하는 경관요소는 수체류(水體類) 14개 경(38.9%), 지형지모(地形地貌)와 관련된 산체류(山體類) 13개 경(36.1%)으로 이들 요소의 비중이 월등히 높았으며, 건축·토목류는 3개 경(8.3%), 천공류(天空類)는 2개 경(5.6%)으로 분류되었다. 제영시에서는 기후풍토요소에 대한 경관어휘(景觀語彙)의 언급이 압도적으로 두드러졌는데 특히 표제어에서는 구름(雲)과 바람(風)이 대표적 경관어휘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운(雲)·수(水)·천(泉)·청(清)·파(波)·류(流)·풍(風) 그리고 무서(無暑) 등과 같은 '청량(淸涼)'을 상징하는 시어가 높은 빈도로 출현하고 있음은 우연이 아니며, 이는 열하(熱河)의 지역성 및 피서산장의 장소성과 강하게 밀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계절 배경이 확인된 23개 경중에서 하경(夏景)이 과반수로 비중 있게 묘사되는 점이나 피서산장 일원의 청랭성(淸冷性)으로 집약되는 기후풍토요소가 입체적이고 다의적으로 묘사되고 있음은 경관 주체인 강희제의 원림 향유 시기와 관련 깊은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제영시에 등장하는 다수의 동식물 경관은 휴양은 물론 관상과 수렵의 공간 속성과도 동일한 맥락으로 보인다. 한편 제영시에는 고시(古詩), 전고(典故), 고화(古畫) 등을 통해 명인(名人)과 명저(名著)를 인용한 경이 33개(91.7%) 경에 이를 정도로 상고성(尙古性)의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는 경관 주체인 강희제의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와 자부심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론된다. 「강희36경」에는 가경(佳景)에 의탁(依託)된 심정에 대한 서경적 묘사뿐만 아니라 근정애민(勤政愛民) 정신, 자강불식(自强不息)과 권학(勸學) 정신 그리고 모친에 대한 공경(恭敬)과 효(孝)의 정서가 깊이 내포되고 있다. 궁극적으로 「강희36경」은 피서산장의 실경(實景)은 물론 의경적(意境的) 차원을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황가원림의 품격과 문인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황제로서의 기개(氣槪)를 드러내고자 한 제황적(帝皇的) 집경(集景)이라 할 만하다.

강제동원 구술자료의 관리와 활용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소장 구술자료를 중심으로- (Management and Use of Oral History Archives on Forced Mobilization -Centering on oral history archives collected by the Truth Commission on Forced Mobilization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m Republic of Korea-)

  • 권미현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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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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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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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라 함은 만주사변 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 되어 군인 군속 노무자 위안부 등의 생활을 강요당한 자가 입은 생명 신체 재산 등의 피해를 말한다. 강제동원 피해 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피해당사자, 유족, 시민단체, 학계 등에서 이루어져왔고, 그 결과 2004년 3일 5일 ${\ll}$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등에 관한 특별법${\gg}$ (2007년 5월 17일 일부 개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를 근거로 2004년 11월 10일 국무총리 소속으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이하 강제동원위원회)가 발족하였고, 2005년 2월 1일부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주요 업무는 강제동원 피해신고접수 및 피해신고조사(피해자 및 유족 심사 결정), 진상조사신청접수 및 진상조사, 진상조사 및 피해판정 불능에 관한 사항, 피해판정에 따른 호적정정, 강제동원 관련 국내외 자료수집 분석 및 보고서 작성, 유해발굴 및 수습 봉환, 사료관 및 추도공간 조성사업 등이다. 강제동원위원회는 피해조사 및 진상조사 업무를 위해 다양한 기록을 발굴 수집해 오고 있다. 여타 피해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이미 공개되었거나 새롭게 발굴되는 기록은 강제동원의 다양한 역사상을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그 양이나 질에 면에서 부족하다. 피해의 역사에서 피해당사자의 이야기는 기록의 부재를 메우기도 하고, 기록 이상의 근거적 가치를 갖기도 한다. 강제동원위원회는 피해생존자와의 구술면담을 통해 다수의 구술자료를 생산하였고 조사업무에 활용하며 체계적인 관리방법을 토대로 관리하고 대중적인 활용까지 꾀하고 있다. 강제동원위원회의 구술자료는 생산 당시부터 철저한 기획에 의해 이루어졌고, 생산단계부터 관리와 활용의 편의성을 염두에 두고 디지털매체의 생산을 유도했다. 또한 조사업무 과정에서 생산되는 구술자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수차례 면담자 교육을 실시하고, 면담자로 하여금 구술당시의 상황을 면담일지로 남기도록 했다. 강제동원위원회는 소장 기록을 관리하는 별도의 기록관리시스템을 갖고 있지 않다. 디지털 아카이브는 피해 진상 관리시스템과 전자결재시스템을 통해 생산되어 관리되지 않는 생산 수집 기증 기록을 등록 검색하는 역할을 한다. 구술자료는 디지털 아카이브에 등록이 되어, 실물과 중복 보존되고 있다. 구술자료는 등록과 동시에 분류, 기술행위가 이루어지고 구술자료의 관리 아이디인 등록번호, 분류번호, 비치번호 등을 부여받게 된다. 강제동원위원회는 구술자료의 적극적인 활용을 위하여 구술기록집의 발간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고, 영상물 등의 제작을 계획하고 있다. 강제동원위원회의 구술자료는 정부차원의 조사 업무 과정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한계, 예산부족이나 기록관리시스템 등의 부재 등을 넘어서 한시조직으로서 가능한 적극적인 방법으로 생산 관리 활용되고 있다. 축적된 구술자료는 향후 특별법에 규정되어 있는 대로 사료관 등이 건립된다면 대중 이용자들을 위해 더 체계적으로 관리 활용될 것이다.

1788년 김응환의 봉명사경과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 (Kim Eung-hwan's Official Excursion for Drawing Scenic Spots in 1788 and his Album of Complete Views of Seas and Mountains)

  • 오다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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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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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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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은 금강산과 해금강, 관동팔경을 그린 60점의 실경산수화와 51편의 기문(記文)으로 이루어진 화첩으로 규모와 화풍에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그림의 특징은 화면을 가득 채운 구성과 남종화풍을 따르면서도 거칠고 파격적인 화법, 산석(山石)의 기하학적이고 입체적인 표현 등이다. 1973년의 특별전, '한국미술이천년(韓國美術二千年)'을 처음으로 화첩의 일부만 공개되었던 작품은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그 전모가 공개되었다. 《해악전도첩》이 김응환(金應煥)(1742~1789)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화첩의 마지막 장에 쓰여진 관지(款識)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칠보대>에 찍힌 '복헌'이라는 도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응환을 지시하는 관지와 도장은 모두 후대에 더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본 연구는 화첩을 둘러싼 여러 요소를 고찰하여 제작자를 재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해악전도첩》 제작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18세기 금강산 기행사경도의 전통과 봉명사경을 살펴보았다. 정선(鄭敾)(1676~1759)의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1711)을 비롯하여 심사정(沈師正)(1707~1769), 김윤겸(金允謙)(1711~1775), 최북(崔北)(1712~1786 이후), 강세황(姜世晃)(1713~1791) 등은 조선 후기 최고의 여행지였던 금강산을 유람하고 기행사경도를 제작하였다. 화가들은 이전의 전통을 계승하여 내금강의 명승명소를 주로 그렸고, 자신들이 경험한 장소를 새롭게 시각화하였다. 이러한 기행사경도는 여행을 기념하며 동행자나 후원자를 위해 여러 장면을 담을 수 있는 화첩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개별적인 금강산 기행사 경도의 제작이 증가하는 가운데 1788년에 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도화서 화원인 김응환과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에게 영동9군과 금강산의 명승(名勝)을 그려오도록 명한 일은 공적 업무였다. 정조는 이들의 관계 및 지방관으로서의 경력, 서로 다른 화풍 등을 고려해 봉명사경의 화원으로 선발하였다. 김응환과 김홍도는 영조(英祖)(재위 1724~1776)조부터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하며 선후배이자 동료로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나아가 이들은 영남 지역의 찰방(察訪)으로서 지방관의 업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었다. 두 화원의 화풍은 서로 달라 김홍도는 부드럽고도 섬세하게 필선을 운용한 반면, 김응환은 굳세면서도 울창한 풍치를 잘 표현했다. 두 명의 화원은 각자의 개성으로 봉명사경 기간 동안 100여 폭의 초본을 그렸고, 이를 선별하여 60~70여 폭의 화첩 혹은 두루마리를 완성하였다. 이들의 그림은 18세기 전중반에 내금강과 관동팔경 위주로 제작된 금강산 기행사경도의 전통을 더욱 풍부하게 했고 영동과 외금강의 명승명소를 새롭게 발견하며 소재를 확장시켰다. 현재 《해악전도첩》은 원(元), 형(亨), 이(利), 정(貞) 4책으로 이루어졌는데, 원(元), 형(亨)책은 내금강의 그림 29점이며 이(利)책은 외금강의 장면 17점, 정(貞)책은 해금강과 관동팔경 14점으로 구성되었다. 비단 위에 그려진 각 그림은 기하학적으로 산석을 표현했으며, 연백으로 금강산의 암봉을 흰색 혹은 회청색으로 표현했다. 《해악전도첩》의 구도와 화법은 정선, 강세황, 심사정, 정충엽(鄭忠燁)(1725~1800 이후), 김응환, 김홍도의 화법과 비교할 수 있어 18세기 후반의 시대 양식을 갖는다. 특히 화첩의 일부 그림은 김홍도의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1788)과 구성 및 회화적 모티프가 매우 유사하여 두 화첩간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반면에 <영랑호>, <해산정>, <월송정> 등은 김홍도의 그림과는 구별된다. 이를 통해 화가가 김홍도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첩을 제작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해악전도첩》에는 다른 화첩에는 등장하지 않는 <자운담>, <백운대>, <안문점망비로봉>, <백정봉>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각 장면마다 경물의 특징을 구체적이고 참신하게 묘사하였다. 특히, 화가는 산석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하고 선과 면을 도드라지게 하여 입체감을 강조하였다. 그는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화법을 확립했고 이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면서 화면에 동적인 리듬감을 부여했다. 이처럼 60점의 그림은 거칠고 파격적으로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 안에서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다. 본고는 화법과 봉명사경의 정황을 종합해 《해악전도첩》의 제작자를 김응환으로 추론하였다. 나아가 김하종(金夏鍾)(1793~1878 이후)의 《풍악권(楓嶽卷)》(1865년 이후)과의 친연성은 《해악전도첩》의 화가를 김응환으로 추정한 또 하나의 이유였다. 《해악전도첩》은 김홍도의 《해산첩》과는 달리 후대에 미친 영향력이 미비한데 김하종의 《풍악권》만이 《해악전도첩》의 소재와 화법을 따르고 있다. 김하종은 《풍악권》에서 50년 전, 춘천부사 이광문(李光文)(1778~1838)을 위해 제작한 《해산도첩》(1816)과는 전혀 다른 화법을 구사했다. 그는 김응환의 《해악전도첩》과 유사한 구성과 회화적 요소, 화보식 인물표현을 따르면서 사의적인 분위기를 강조하였다. 개성김씨의 일원이자 김응환의 종손인 김하종은 가문에 전해지는 《해악전도첩》류의 그림을 감상했고 이를 새롭게 번안했다고 추측된다. 화첩에 포함된 51편의 기문은 그림 다음 장에서 그려진 장소를 설명하고 있어 각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기문은 그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앞의 장소로부터의 이동 정보, 이름의 유래, 지형적 특징, 관련 정보 등이 서술되었다. 이와 같은 백과사전식 혹은 지리지와 같은 기문은 19세기 전반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금강산 화첩류에 더해졌다. 《해악전도첩》의 백화암 기문에는 1845년의 암자에 대한 중건 내용이 기록되어, 기문의 연대를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김하종에게 《풍악권》을 주문한 이유원(李裕元)(1814~1888)도 각 그림에 글을 붙였는데 이 글들은 김응환의 화첩에 포함된 기문 51편과 내용 및 서술방식이 흡사하다. 이유원의 기문은 《해악전도첩》의 기문이나 그 초고(원본)와 관련성이 높지만 두 화첩의 기문 필사의 선후관계를 판정하는 데에는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해악전도첩》은 김홍도의 봉명사경 초본 및 김홍도의 영향으로 제작된 19세기의 금강산 화첩과는 구별된다. 이 화첩은 화원 김응환의 회화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넓히고 18세기 후반 실경산수화의 또 다른 층위를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