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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레쥬 드 프랑스 소장 한국 고서의 현황과 활용방안 (A Study on Status and Utilization of Korean Rare Books in Collège de France)

  • 이혜은;이희재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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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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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5-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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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이 연구는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꼴레쥬 드 프랑스에 소장된 한국고서를 실사(實事)하여 소장본의 규모와 전래경위, 자료적 특징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하여 꼴레쥬 드 프랑스 도서관에 한국고서가 유입된 역사적 배경과 과정을 조사하였으며, 서지목록을 작성하고 이를 대상으로 주제별 판종별 시기별로 분석하였다. 특히 구한말 한국고서의 현황과 프랑스 내 한국고서 소재파악의 중요한 참고문헌인 "한국서지(Bibliographie Cor$\acute{e}$enne)"를 저술한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 1865-1935) 개인 소장본과 꼴레쥬드 프랑스 소장본과의 관계를 규명하였다. 또한 이들 자료에 대한 서지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공동활용의 방안을 모색하여, 본 연구가 앞으로 국외소재 한국 전적문화재의 발굴과 조사에 일조하고자 하였다.

꼴레쥬드 프랑스 한국 고문헌 연구 (Korean Rare Books in Coll$\grave{e}$ge de France)

  • 이혜은;이희재
    • 한국정보관리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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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정보관리학회 2010년도 제17회 학술대회 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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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1-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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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이 연구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꼴레쥬드 프랑스에 소장된 한국 고문헌을 실사(實事)하여 소장본의 규모와 전래경위, 자료적 특징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특히, 구한말 한국 고문헌의 현황과 프랑스 내 한국 고문헌 소재파악의 중요한 참고문헌인 "한국서지(Bibliographie Coreenne)"를 저술한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 1865-1935) 개인 소장본과 꼴레쥬드 프랑스 소장본과의 관계를 규명하였다. 이를 통하여 국외 한국 문화재의 기초조사에 일조를 하고자 하며 향후 활용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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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꾸랑의 『한국 서지(Bibliographie Coreenne)』에 수록된 도교경전 연구 (A Study on Taoism Scripture included in Maurice Courant's Bibliographie Coreenne)

  • 김윤경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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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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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9-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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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모리스꾸랑의 "한국서지" '도교' 관련 해제들에 대한 고찰이다. 모리스꾸랑은 전임공사인 쁠랑시의 조언과, 한학에 능한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3000종이 넘는 도서들을 수집하여 "한국 서지"(1896)를 집필하였다. 모리스꾸랑은 도교관련 경전들을 분류하면서 '경서류', '관성제군 문창제군 부우제군에 대한 숭배의식', '기타'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모리스꾸랑의 "한국서지"에 담긴 도교 부분은 다음의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19세기 말 관제신앙의 유행과 삼성신앙의 확대이다. 그의 도교서지는 대부분 19세기 말 조직화 되었고, 삼성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무상단'에서 출판한 책들을 중점으로 다루었다. 둘째 모리스꾸랑이 자생적인 도교경전을 찾으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글본 "도덕경"을 찾으려 노력했고, 한국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조선난서'인 "문창제군몽수비장경(文昌帝君夢授秘藏經)" 등을 다루었다. 셋째 그의 연구를 통해 당대의 도교의 지형도를 살필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가 살던 시기, 관묘를 중심으로 하는 도교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고, 최초의 도교교단이었던 '무상단'이 조직적으로 활동했으며, "번석자문(飜惜字文)"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적 사회실천 모임이 있었다는 것을 살필 수 있었다. 1890년대 조선은 열강사이에서 나라의 주권을 잃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 왜 대량의 민간도교경전이 간행되고, 사회의 지도층까지도 삼성신앙을 가졌던 것인가? 이러한 지도층의 태도를 선교사들은 '무당들과 주술사들이 이 나라를 그리고 지배자들까지를 지배하고 있으며, 고종이 역술가에게 포위된 채 생활하였다'라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민간도교에 기반 한 '대종교'는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되기도 하였다. 아직까지도 조선후기 난서의 유행과 삼성신앙에 기반 한 민간도교의 확대를 설명하기 위한 연구는 부족한 상황이다. 1890년대 초 조선을 다녀가 "한국서지"를 남긴 모리스꾸랑을 연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