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도학적 근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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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재지사림 강호시조의 양상과 전개 (The aspect and unfolding of 'Jejisarim's Kangho Shijo' in the 16th century)

  • 한창훈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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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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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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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고려 후기 이후 조선조를 거치는 동안, 사대부라는 특정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 강호시조는, 문학사에서 중요한 미적 범주의 하나로 주목되었다. 본 논문은 이중에서 특히, 16세기 재지 사림의 대표자인 이현보 이황, 권호문, 장경세의 강호시조에 나타나는 특징의 양상과 전개를 개괄적으로 살폈다. 이현보, 이황의 강호시조를 해명하는 데 가장 적절한 개념틀은 도학적 유교 근본주의의 속성이다. 도학적 근본주의는 현실 정치에의 참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로부터의 좌절과 퇴각을 수용하고 스스로를 이념적으로 재충전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났다. '부패한 정치 현실과 완전한 도덕적 이상', '인심과 도심', '속세와 강호‘ 등의 이분법적 세계관이 그 바탕을 이룬다. 이에 비해 권호문과 장경세의 강호시조는 상대적으로 정치 현실에 대한강한 친연성과 관심을 보인다. 그 때문인지 작품에 나타나는 강호 자연의 형상화는 사실적이고 경험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그들은 시적 형상화의 측면에서도 관념적 성격을 벗어나, 다분히 현실적인 측면에서 강호자연에의 친연성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에 강호시조의 새로운 국면은 정철에서 좀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신흠과 윤선도에 이르러 더욱 큰 차별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들의 강호시조는 사림의 정치적 승리 이후 도학적 근본주의 이념의 도전적 변별 가치가 약화된 국면에서, 사림 출신 세력의 정치적 이합에 따라 형성된 분파들 사이의 쟁투로부터 일시적으로 실세하거나 그런 세태를 혐오하는 데서 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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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華西) 이항노(李恒老)의 정전제(井田制) 주장과 그 함의(含意) (Review of context & meaning of Jeongjeonje by Yi Hang-no)

  • 박성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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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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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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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종래에 이항로의 통상불가론(通商不可論)이 서양의 경제적 도전에 직면하여 자국 산업 보호라는 경제적 자존을 그 역사적 임무로 하여 제기된 근대 민족주의적 성격의 것이라는 평가가 있어왔고, 한편에서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조선사회정체성에 맞서는 진보적인 경제사상이라는 평가도 있어왔다. 그렇지만 필자는 본고에서 이러한 시각들이 조선유학사상사의 체계를 이해하지 못한 피상적인 결론의 도출이라고 파악하고, 이항로의 경제인식에서 핵심어라 할 수 있는 정전제(井田制)에 관련한 논의들을 다루면서, 그것이 철저하게 유학사상에 근거하여 당시 사회를 경장(更張)하기 위한 사회개혁책으로서 제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서양 제국과의 통상불가론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점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항로의 정전제 주장은 전반적인 국가제도와 그것의 운영원리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전면적인 제도개혁을 지향하는 변법적(變法的) 경세학(經世學)의 성격을 띤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전제를 통한 균등한 부의 분배는 병농일치의 관점에서 볼 때 강한 군사력을 형성하는 배경이 됨과 동시에 사람이 도덕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이항로의 경제인식은 자본주의 맹아론적 성격을 띤 것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도덕적 관점에서 제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이항로에게 있어서 공전제(公田制)와 절검(節儉)의 태도를 축으로 하는 정전제의 시행문제는 곧 인심(人心)에 상대되는 도심(道心)의 함양을 위한 기본적 전제로서 인식되어진 것이다. 정전제라는 도구를 통해서 도심을 확립하려는 도학적(道學的) 관점이 이항로 경제인식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서양의 통상 요구는 이익을 도모하는 욕망을 부채질하여 도심에 상대되는 인심의 발호를 촉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항로가 전수설(戰守說)을 주장하면서까지 꼭 서양 세력의 접근을 막아야 했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