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대종사(大宗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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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가 진인(眞人)을 통하여 밝힌 자연(自然)과 진인관(眞人觀)에 따른 인간관(人間觀) -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의 진인(眞人)을 중심으로 - (Fundamental Epistemology on Nature Examined by Zhuangzi through the Man of Truth)

  • 반승현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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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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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3-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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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논문은 "장자"의 철학적 사상을 인식하고 있는 진인(眞人)에 관한 정체성을 분석하고 해석하여 그 것을 파악 한 후에 이론적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장자철학 사상을 고찰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등장하는 진인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그가 형이상학적 인물이고 그를 나타내는 말들은 현대인이 살펴서 느끼기에 매우 난해한 글로 쓰여 있다. 따라서 진인이 지니고 있는 사색적(思索的) 능력들은 세속적 생활을 하고 있는 인간이 체득하기에는 너무 초월적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쩌면 설화(說話)에 가까운 느낌이 들게 한다. 이러한 진인의 초월적 기능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장자의 무위(無爲)를 이해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무위는 만물에 작용하여 생명체를 생성시키는 도리(道理)의 개념을 정리하는 관점에서 만든 언어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만물의 생명체들이 자연의 공능에 대하여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물리성(物理性)이 내재되어 있는 관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본고는 자연의 초월적 공능을 진인에서 파악하고 그 원리적 작용을 연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면 과연 진인의 안팎은 어떠한 모습을 갖고 있나 궁굼증이 있을 수 있다. 이에 그의 초인적 모습을 "대종사"에서 발췌하여 정리하고, 아울러 그가 천지만물에 대하여 처세하는 방법을 자연적 관점에서 살피고 정리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장자의 글 이외에 유가와 법가의 글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 역시 분석하고 파악하는 절차를 통하여 문제의식을 연구하여 본다. 그러나 조사적(調査的) 개념을 지양(止揚)하고 학문적(學文的) 차원으로 접근하여 동양이 갖고 있는 고유한 정신과 사상을 고찰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니체 철학에서 사랑의 의미에 대하여 (On the Meaning of Love in Nietzsche's Philosophy)

  • 양대종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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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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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7-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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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니체 철학이 갖는 가장 강렬한 함의 중의 하나인 현대성의 위기와 그 극복 가능성이라는 주제를 '사랑'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재구성해보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이성에 대한 육체적 욕망의 발로인 성애(性愛)에서부터 동정심이나 이웃사랑 같은 종교적으로 왜곡된 사랑의 형태를 넘어 가장 먼 것에 대한 사랑과 생명의 적극적인 긍정양식인 운명애에 이르기까지 니체 철학 전반에 걸쳐 산재된 사랑에 대한 진술들을 분석해 본다. 니체에게 사랑은 기본적으로 힘의 확장을 목표로 하는 소유욕으로부터 자라난 충동이다. 그것이 인간을 구성하는 힘에의 의지이므로 사랑의 충동은 생명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 충동을 죄와 결부시킨 기독교를 통해 에로스는 부도덕 해졌다. 니체는 인간의 자연과 실재를 부인하고 거기에 다른 이상을 덧씌우려는 기독교적 사랑을 극복하고 자신을 뛰어넘는 사랑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 철학에서 그것은 가장 먼 것에 대한 사랑이자 운명애로 불린다.

민족종교에 나타난 한국 정신문화의 원류 (The Origin of Korea Mental Culture in Ethnical Religions)

  • 김현우;이경원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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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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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3-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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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19~20세기 초 한국에는 다양한 종교운동이 분출하였다. 서구 기독교가 유입하여 크게 성장하였고, 전통 유교 역시 종교로서 변화를 모색했다. 동시에 새로운 종교들도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것이 동학(천도교), 대종교, 증산교, 원불교의 민족종교이다. 대체로 이들 민족종교는 한국의 전통적 종교성과 연관된 한국 정신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본 연구에서는 민족종교 속에 내재한 한국 정신문화를 추론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한국 전통의 정신문화인 단군신화, 제천의식, 소도 등과 외래문화와 한국 정신의 융합을 추구한 최치원, 원효, 일연, 이황 등의 철학을 경천사상, 실천사상, 조화사상 등으로 정리하고, 이후 민족종교인 동학, 원불교, 증산교에서 이들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추론하고자 한다.

호암천에서 처음 채집된 둑중개 개체군의 특성 (The Population Characteristic of First Record on the Cottus koreanus from Hoam Stream, Korea)

  • 변화근;이병룡
    • 한국환경생태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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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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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6-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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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호암천에 분포하는 둑중개의 형태적 및 개체군의 특징 조사를 2015년 10월과 2016년 4월에 실시를 하였다. 호암천 상류역(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대종천 상류)이 둑중개(Cottus koreanus)의 새로운 서식지로 확인되었으며 또한 삼척오십천 이남의 동해로 유입되는 하천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둑중개가 분포하는 범위는 기림사에서 용연폭포에 이르는 약 1.2 km 구간이었으며 수역은 약 $3,600m^2$ 이었다. 개체군 크기는 총 1,656개체, $100m^2$ 당 46개체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분포역이 매우 제한적이며 좁았다. 호암천에 서식하는 개체군은 한강 개체군에 비해 머리길이(head length), 배지느러미 길이(VFR-L), 가슴지느러미 길이(PFR-L), 입의 폭(MW) 등이 짧았으며 그 외의 형질은 일치하였다. 전장이 만 1년생은 40~59 mm, 만 2년생은 60~79 mm, 만 3년생은 80 mm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포란수는 239~468개이었으며 평균 361개 이었다. 성숙란의 직경은 $2.6mm{\pm}0.21$(2.3~3.1)로 대란형에 속하였다. 전장과 체중의 관계식은 BW = 0.00001TL3.01로 상수 a는 0.00001을, 매개변수 b는 3.01 이었고, 평균 1.26 이었다.

모리스 꾸랑의 『한국 서지(Bibliographie Coreenne)』에 수록된 도교경전 연구 (A Study on Taoism Scripture included in Maurice Courant's Bibliographie Coreenne)

  • 김윤경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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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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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9-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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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모리스꾸랑의 "한국서지" '도교' 관련 해제들에 대한 고찰이다. 모리스꾸랑은 전임공사인 쁠랑시의 조언과, 한학에 능한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3000종이 넘는 도서들을 수집하여 "한국 서지"(1896)를 집필하였다. 모리스꾸랑은 도교관련 경전들을 분류하면서 '경서류', '관성제군 문창제군 부우제군에 대한 숭배의식', '기타'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모리스꾸랑의 "한국서지"에 담긴 도교 부분은 다음의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19세기 말 관제신앙의 유행과 삼성신앙의 확대이다. 그의 도교서지는 대부분 19세기 말 조직화 되었고, 삼성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무상단'에서 출판한 책들을 중점으로 다루었다. 둘째 모리스꾸랑이 자생적인 도교경전을 찾으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글본 "도덕경"을 찾으려 노력했고, 한국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조선난서'인 "문창제군몽수비장경(文昌帝君夢授秘藏經)" 등을 다루었다. 셋째 그의 연구를 통해 당대의 도교의 지형도를 살필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가 살던 시기, 관묘를 중심으로 하는 도교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고, 최초의 도교교단이었던 '무상단'이 조직적으로 활동했으며, "번석자문(飜惜字文)"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적 사회실천 모임이 있었다는 것을 살필 수 있었다. 1890년대 조선은 열강사이에서 나라의 주권을 잃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 왜 대량의 민간도교경전이 간행되고, 사회의 지도층까지도 삼성신앙을 가졌던 것인가? 이러한 지도층의 태도를 선교사들은 '무당들과 주술사들이 이 나라를 그리고 지배자들까지를 지배하고 있으며, 고종이 역술가에게 포위된 채 생활하였다'라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민간도교에 기반 한 '대종교'는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되기도 하였다. 아직까지도 조선후기 난서의 유행과 삼성신앙에 기반 한 민간도교의 확대를 설명하기 위한 연구는 부족한 상황이다. 1890년대 초 조선을 다녀가 "한국서지"를 남긴 모리스꾸랑을 연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