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당송시기(唐宋时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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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唐宋)시기 '법(去)'와 '왕'(往)의 비교 고찰(考察)

  • 정주영
    • 중국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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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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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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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In modern Chinese, 'Qu去' is mainly used as a verb in the meaning of 'go', and 'Wang往' is used as a preposition to indicate the direction of movement in the meaning of 'toward'. Historically, both 'Qu去' and 'Wang往' have been mainly used as moving verbs. We also pay attention to their common feature that they were used as noun, adjective and preposition, and the other feature that 'Qu去' and 'Lai来', 'Wang往' and 'Lai来' were used as typical antonyms each other. Based on the research results of the existing scholars, this study examined the part of speech, the meaning and usage in connection with the appearance of 'Qu去' and 'Wang往' in Tang-Song Dynasty. Chapter II examined usage of 'Qu去' and 'Wang往' prior to Tang-Song Dynasty, and Chapter III looked into the use of 'Qu去' and 'Wang往' in Tang-Song Dynasty by analyzing actual example sentences.

당송(唐宋) 시기 도통(道統) 내용의 전환 - 당말(唐末)에서 북송(北宋)시기 도의 전승 내용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 (The transformation of the content of Dao-tong during the Tang and Song Dynasties)

  • 임명희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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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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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3-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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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논문은 당송 시기 도통 내용의 전환 과정에 관한 소고이다. 본 문은 당송 시기 도통 내용의 변천 과정을 다음의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한유는 인의(仁義)를 도통의 내용으로 삼았다. 둘째, 손복 등 북송 초 유학자들은 보다 광범위한 의미상의 유가적 도를 도통의 내용으로 규정했다. 셋째, 계숭 및 북송 도학가들은 집중(執中)이 도통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송 도학가에 의해 유학의 도통론은 심성론 중심의 철학 논의로 그 성격이 변모되었다.

중국 고대 심미관에 의한 여성 이미지 연구(I) - 당송시기(唐宋时期)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Image of Women by Chinese Ancient Aesthetic View(I) - Focused on Tang-Song Dynasty -)

  • 강동화
    • 한국의상디자인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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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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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7-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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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This paper aims to analyze the different external images of women expressed in ancient artwork through the socio-cultural background and the aesthetic view during the Tang and Song dynasties of China. The research method contains a literature review involving the collection of historical literature, thesis, and artwork data. The image of women according to the aesthetic view of the two periods is summarized as follows. In terms of face shape, the Tang pursued a round face while the Song pursued a more slender shape. As for hair ornamentation, the Tang wore various shapes of hair buns like "Paojiaji", and decorated them with coronets. The Song wore various types of braided hair called "Tongxinji", but the coronets were smaller and more sophisticated. For makeup, the Tang wore colorful and heavy makeup and the Song makeup was lighter and more elegant. In attire, the Tang followed revealed shape, used splendid colors and thin, transparent material. The Song exhibited a more simple design and was conservative and neat, using luxurious silk fabric with low chroma. In body shape, the Tang pursued the "beauty of obesity" with a voluptuous body shape; the Song pursued the "beauty of gaunt" with a slim body shape. As the result of the analysis according to the aesthetic views of the Tang and Song dynasties, women of Tang were depicted as rich, and women of Song were rather neat. The research on the aesthetic views that changed according to the development of social civilization and the status of women will play an active role in the transmission and development of traditional Chinese culture. At this point, the paper may contribute to the creation of images of women as well as changes in the art of future generations.

원말명초(元末明初) 문학 동향 및 송렴(宋濂) 문학관의 변화 (The change of Song lian's viewpoint of Literature and The Literary trend in the Late Yuan and the Early Ming dynasty)

  • 박경남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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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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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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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고는 원말명초(元末明初) 문학의 전개과정을 검토하면서 명대(明代) 초기 관각문학의 기틀을 다졌던 송렴(宋濂) 문학의 위치를 점검해 보았다. 그는 명대 문학사에서 도학자적 문학관을 견지했던 것으로 단순 요약되고 있지만, 그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본고는 문학론과 관련된 송렴의 글을 연대기적으로 분석함을 통해 그가 청 장년기까지도 진한고문(秦漢古文) 등의 고문사(古文辭)에 빠져 오랫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송렴은 삼십 세에 스승 황진(黃?)과의 만남을 계기로 육경에 침잠하며 도학적 문예관을 가지게 되었지만 고문사의 유혹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오십 이후 주원장(朱元璋)을 도와 명 건국의 주역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의 경세적 문학관을 실천적으로 확립하였고, 이후 자신의 도학적-경세적 문학관을 이론적으로 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또한 청 장년기 그 자신의 문학 수련의 주요한 대상이자 명초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전범이기도 하였던, "사기" 등의 진한고문을 부정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요약하면, 원말명초의 격동의 시기에 송렴은 개인적, 시대적으로 문학관의 변화를 겪으며, 그 생애 말년에 육경 및 송대의 도학자와 한유(韓愈) 구양수(歐陽脩) 등의 당송고문을 성인(聖人)의 문(文)으로 통하는 치세의 문학으로 재정립함으로써 명대 문학의 이념적 좌표와 새로운 문학적 전범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 신앙 연구

  • 리웬구어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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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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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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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뇌법은 도교의 중요한 법술로서 당송(唐宋)이래 매우 흥했는데, 북송의 임영소 등이 신소파(神霄派)를 개창한 이후에 도교 법문을 대표하는 영역이 되었다. 그로부터 각종의 뇌법이 천하에 성행하였고, 도교에는 새로운 뇌신들이 거듭 나타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뇌법신앙의 구진천존(九宸天尊)인데, 이 아홉 천존들은 도교의 최고신인 삼청성조(三清聖祖)의 통치 하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옥추보경』은 북송 때 탄생하였는데 이 경전이 세상에 널리 발간되어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에 대한 신앙이 형성된 것은 남송 시기 백옥섬(白玉蟾) 이후이다. 『옥추보경』은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의 법문(法門)을 선양하기 위한 방책으로 천존의 성호를 부를 것을 권장한다. 법문을 염송하는 것은 매우 쉽고도 간단하여 누구나 할 수 있었으므로 사회적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특히 『봉신연의』와 『서유기』와 같은 문예소설에 뇌성보화천존이 등장함으로 해서, 민중들은 뇌성보화천존을 더욱 널리 숭배하게 되었다. 현재도 중국의 민간에서 이 신격에 대한 신앙은 매우 보편적이다.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은 옥청진왕(玉清真王)의 화신(化身)이다. 뇌성보화천존은 시방에 그 형체를 나타내고, 중생들을 고뇌로부터 구제하고 이끈다. 36천을 주재할 권능이 있으며, 자비로운 모습으로 모든 겁에 응한다. 또 뇌성보화천존의 주변에는 뇌공(雷公), 우사(雨師), 풍백(風伯)을 비롯한 십대원사(十大元帥)와 등백온원사(鄧伯溫元帥), 신한신원사(辛漢臣元帥) 등의 신장들이 보인다. 이러한 신장들은 양송(兩宋) 시대에 출현하였으며 대다수가 뇌부의 제신들이다. 뇌성보화천존 신앙을 구현하기 위한 재초 의식에는 천지 제신(諸神)이 강림하기를 청하는 뇌정사과(雷霆謝過)와 죄를 뉘우치고 복을 비는 참의(懺儀) 또는 참회문식(懺悔文式) 등이 있다. 이런 법식들은 매우 전문적인 것이고, 일반인들에게는 법문을 염송하는 간편한 방법인 십자천경법(十字天經法)이 널리 퍼졌다. 즉 늘 경건한 마음으로 천존의 성호를 오랫동안 염송하게 되면 공덕원만(功德圓滿)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옥추보경』은 민중의 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광범위하게 알려져 그 주해나 주석본만도 이십여 종에 이르렀고 송원 이래의 핵심적인 도교 문헌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옥추보경』은 일본과 한국 등지에도 급속히 전파되었다. 한국에는 고려시대에 신소뇌법(神霄雷法)이 전해졌는데, 특히 고려 예종 13년(1118년) 7월에 중국 도교 의학이 고려에 전승되었을 때의 도교 의학이 『옥추보경』을 위주로 한 치료법이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조선의 허준이 주편한 『동의보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의 민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옥추보경』을 송독하였고 거기에 수록된 부록(符籙)을 운용하였으며 이로써 병을 몰아내고 잡귀를 물리쳐 생명을 지키기를 바랐다. 현대 한국에서는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에 대한 신앙이 크게 성행하고 있으니, 그 종단이 바로 대순진리회이다. 대순진리회는 증산 성사께서 인세에 강림하시기 전에 구천대원조화주신이며, 화천 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의 위에 임하였다고 신앙한다. 즉 증산이 천존상제의 화신이라 믿는 것이다. 이것과는 좀 다르지만, 인간이 신의 화신이 되는 신성한 변화를 뇌법에서는 '변신(變神)'이라고 부른다. 변신은 내련(內煉)을 행할 때나 시법(施法)시에 도인들이 필히 진입해야 할 특이한 정신 상태로서, 자아의 존재를 망각하고 신진(神真)으로 변화하여 인신합일(人神合一)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신은 대순진리회의 수도 목적인 도통과도 한편으로는 유사한 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대순진리회가 목적하는 지상신선실현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이 도를 깨닫는 노력을 통해 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과 천성을 회복하여 이에 상응하는 신과 합일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뇌법의 변신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할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과제로 남겨둔다.

동관왕묘(東關王廟)의 조각상 연구 (A Study on the Sculptures from Donggwanwangmyo [East Shrine of King Guan Yu])

  • 장경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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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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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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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동관왕묘(東關王廟)는 중국 촉(蜀)나라의 장수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이다. 이러한 사당이 우리나라에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1598년 정유재란 때부터이다. 당시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은 관우의 힘으로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길 염원하면서 그들의 주둔지마다 관왕묘를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중국 명나라 황제와 조선의 국왕은 외세를 물리치려는 의지로 관왕묘를 세우고자 하였다. 1599년 8월 조선 정부는 '동관왕묘조성청' 이라는 관청을 임시로 설치하고 인력과 물력을 총동원하였다. 명나라 기술자의 감독 아래 연 2,400명의 조선 장인과 역군(役軍)들이 중국 제저우(解州) 관제묘(關帝廟)를 본으로 삼아 영건하여 3년 뒤인 1602년 봄에 동관왕묘를 완공하였다. 한 중 기술자가 협력하여 세웠기 때문에 관왕묘의 정전 건축과 내부 구조 및 조각상에는 양국의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관왕묘 내부에는 7기의 조각상이 서 있다. 관우상 1기는 금동상이며, 나머지 6기는 소조상 위에 채색한 것이다. 이들 조각상들은 1602년에 만들어졌고, 관우와 그를 배위하는 관평(關平) 주창(周倉) 조루(趙累) 왕보(王甫)는 삼국시대에 실존했던 인물들의 초상조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복식은 관우를 추숭하던 당송대에 확립된 도상을 따르고 있었으며, 세부적으로는 명대적 요소와 조선적 배치가 절충되어 있었다. 이로 미루어 송대 이후 확산된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 판화의 도상이나 명나라 만력황제가 1593년 조영한 제저우 관제묘의 명대 관우 도상이 동관왕묘를 제작할 때 직접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재 동관왕묘와 비교되는 중국 제저우 관제묘의 경우 건축과 조각상이 모두 청대 18~19세기에 중건된 것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동관왕묘의 조각상은 17세기 초 한 중 관왕묘 중에서 제작시기가 가장 이른 예로서 당시의 원형을 지니고 있다는 점, 한 중 기술자의 합작으로 규모가 매우 크다는 점, 금동으로 만든 관우상은 유일하다는 점, 문무 배위상을 각 1쌍씩 마주 배열하여 조선왕릉의 석인 배치와 친연성이 있다는 점 등 여러 면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