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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및 신유학 철학에서의 덕의 문제 (On the Problem of Virtue in Confucian and Neoconfucian Philosophy)

  • 베르너 가브리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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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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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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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이 글은 동아시아 유학 전통의 뿌리를 다룬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중국의 고전 전통과 그에 대한 송대(宋代)의 해석이다. 덕의 개념은 유럽 및 중국의 전통이 만나는 드문 사례들 중 하나처럼 보인다. 라틴어 virtus 와 그리스어 $aret{\acute{e}}$는 중국어 $d{\acute{e}}$ 덕(德)과 매우 유사해 보이는 것이다. 중국 전통에서 덕(德)은 따라서 자연적 힘의 총체로 간주되는 도(道) $da{\grave{o}}$와 늘 연결되어 있다. 유럽 전통과 달리, 중국 전통에서는 덕이 그 자체로 인간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자연적 힘으로서 간주된다. 이 힘은 주변 세계와 인간의 연결, 통합 그리고 조화를 유지해준다. 공자는 사회적 행동(social behaviour)의 가능성, 곧 덕의 가능성에 관한 엄격히 철학적인 논쟁을 촉발시켰다. 공자에게 있어, 상(喪, mourning)는 인간의 원초적인 사회적 특성을 보여주는 현상들 중 하나이다. 하나의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현상으로서의 애도는 자연적 필연성이라는 성질을 갖는다. 이런 기초적인 사회적 감정은 인(仁)($r{\acute{e}}n$, "human-heartedness") 이라 불린다. 인은 그것이 인간의 사회적 지향의 기초이자 결과로서 해석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사회 구성 능력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간주된다. 인은 덕의 전형이다. 곧 인은 단순히 자연 법칙으로부터 연역 가능한 하나 사실이 아니라, 인간이 성취하거나 혹은 완전히 실패할 수도 있는 어떤 것에 관련되어 인간에게 제기되는 하나의 요청이다. 따라서, 인(仁)의 기본적 특성은 관심(concern)이다. 신유학 시기의 덕 해석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덕에 관한 논의는 우주론적 관점으로까지 확장된다. 신유학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우주적 상호관계로 초점을 이동시킨다. 모든 규칙들로부터 자연을 해방시키려 하는 도가와는 반대로, 신유가는 이(理)(lǐ) 개념을 통한 존재론적 기초를 창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신유학의 태도는 어떤 의미에서 -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 서양적 사고와 유사한 측면을 갖고 있다. 이(理) 개념과 함께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논쟁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선다. 불교의 무(無) 개념과 함께 등장한 실재의 해체와 차별이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개념과 함께 새로운 답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중국 전통에서는 매우 새로운 관점이다. 영원하며 파괴되지 않는 관념적 원리가 현상적 실재의 파괴를 막아준다. 마지막으로, 나는 덕 개념과 관련된 유럽적 및 중국적 사유의 비교 가능성에 대한 몇 가지 결론적 언급을 적어보고자 한다. 우선, 모든 고전시대의 유가들에게 있어 구체적이며 성공적인 행동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다. 이러한 행동의 결과는 이 세계에 완벽히 꼭 들어맞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일반적 개념을 구분할 수 있는 진리에 의해 계몽된 대화만이 합당한 행동에 관한 통찰로 이끈다고 믿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이렇게 도출된 규칙은 실천되어야만 할 어떤 것이다. 유가적 방식의 경우는 보다 직접적이다. 행위자는 이후의 행위를 위한 하나의 정확한 패턴을 수립한다. 이는 - 위에서 언급한 대로 - 하나의 구체적 행동은 결코 다른 행동과 완전히 동일할 수 없으므로, 논쟁은 행동이 수행된 상황들 사이의 차이점에 관한 논의로부터만 발생한다. 이 논쟁은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한 행동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교육의 초점은, 개념적 구별이 아니라, 행동 형식에 관련된 세심한 지식의 습득에 놓여진다. 일반화는 물론 이런 노력의 과정에서 성공을 위해 요청되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점 역시 존재한다. 개념화의 성공 여부는 - 규범적 개념과 일치하는 행동의 형성이 아니라 - 개별적 행동의 성공적인 수행에 달려 있다.

신라성덕대왕신종(新羅聖德大王神鍾)의 명문(銘文) 연구(硏究) -'사상성(思想性)' 탐색을 겸하여- (Study on the Words Carved on Seongdeokdaewang-Shinjong (Divine Bell of King Seongdeok) with a New Viewpoint)

  • 최영성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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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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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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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은 신라 중대(中代)의 사상사, 불교사, 정치사, 공예사, 한문학사, 서예사, 금석학사 등 여러 면에서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그러나 신종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에 비추어 명문(銘文)에 대한 연구는 아직 활발하지 않다. 명문에 대한 판독과 번역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체계적인 분석과 연구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기초한다. 부제(副題)를 '사상성의 탐색'으로 한것은 제2차 연구를 염두에 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종래의 판독과 역주(譯註)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였다. 변려문(騈儷文)의 문체적 특성에 대한 연구도 병행하였다. 그 결과 약 20건 정도의 문제점을 발견하였다. 특히 '工匠?模', '日月?暉' 등 중요한 문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것은, 명문 해석의 중요성을 부각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종의 명문은 사상사의 측면에서 연구할 가치가 높다. 명문에는 불교사상, 유교사상, 도가사상은 물론 우리나라 고유사상 등이 서로 걸림이 없이 무르녹아 있다. 전반적으로 철학성이 높은 글이다. '원공(圓空)'을 주제어로 신종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아울러 불교사상의 핵심과 통치철학을 제시한 것이 돋보인다. 한편 성덕왕의 정치이념, 통치원리가 우리 고유의 풍류도(風流道)에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 것은, 풍류도 전승의 맥락을 추적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다. 혜공왕 대에 유교사상에 입각한 개혁파와 민족 고유사상에 기반을 둔 보수파와의 대결을 시사한 대목도 함께 보아야 할 대목이다.

금영작(金永爵)과 한중 척독교류의 새 자료 『중조학사서한록(中朝學士書翰錄)』 (Kim Youngjak(金永爵) and the new material, 『A Collector of Correspondence from Chinese Intellectuals (中朝學士書翰錄)』)

  • 천금매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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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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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7-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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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는 금영작(金永爵)이 중국 문인들로부터 받은 편지를 모아놓은 척독집 "중조학사서한록(中朝學士書翰錄)"을 새로 발굴하고 소개한 글로, 정공수(程恭壽), 옹학함(翁學涵), 장병염(張丙炎), 소언한(少言翰)과 자렴함(子廉銜), 이문원(李文源) 등이 김영작에게 보낸 편지 10통, 조정황(趙廷璜)이 김영작의 아들 김홍집(金弘集)에게 보낸 편지 1통 및 시(詩) 5수가 수록되어 있다. 김영작은 많은 중국 문인들과 직접 또는 간접적인 교유를 진행하였다. 그는 연행을 갔다 온 친구 홍양후(洪良厚)의 소개로 중국 문인 이백형(李伯衡), 수방울(帥方蔚)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30여 년간 간접적인 교유를 진행하였다. 1858년에는 동지사(冬至使)의 부사(副使)로 직접 북경에 가서 현지 중국 문사 섭명례(葉名澧), 장병염(張丙炎), 오곤전(吳昆田), 정공수(程恭壽), 조광(趙光) 등과 만나서 교유하고 귀국 후에도 지속적으로 척독교류를 진행하였다. 김영작은 학계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나 한중 문화교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김영작이 생면부지의 중국 문사 이백형(李伯衡)과 수방울(帥方蔚)에게 먼저 편지를 보내어 교유를 청하였고 상대방 역시 흔쾌히 답장을 보내면서 평생 편지로만 문학적, 개인적 교류를 진행하였으며, 또한 김영작이 조선의 명문가의 사대부로서 연행사(燕行使)의 부사(副使)라는 높은 신분으로 중국 현지의 문사들과 친밀하게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한중 인사들의 마음이 열려있고 신뢰성과 친숙감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홍대용을 비롯한 많은 선배 문인들의 교유의 전통이 있어 기초를 닦아놓았기에 가능했다. 이런 의미에서 19세기 후반 김영작과 중국 문사들의 교유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그 사실을 보여주는 척독집 "중조학사서한록(中朝學士書翰錄)"도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중조학사서한록(中朝學士書翰錄)"만으로는 김영작과 중국 문사들이 주고받은(교류의) 내용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자료적 한계를 갖고 있는 점이다. 앞으로 중국 측에 교유 기록이 남아있는 자료들을 더욱 많이 발굴해낼 것을 기대할 뿐이다.

정조(正祖)의 사대부(士大夫) 인식(認識)과 그 특징(特徵) (King Jeongjo's recognition on Neo-Confucian literati and it's historical meaning)

  • 박성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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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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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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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정조는 척족이 특권세력으로 발호하던 영조대 후반의 탕평정치에서 아버지를 여읜 피해자였다. 노론의 거센 방해공작을 뚫고 왕위에 오른 정조의 목표는 왕권 강화였다. 정조는 탕평정책을 영조 50여년 치세의 대업적으로 칭송하고 척신과 탕평당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신하들에게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국변인(國邊人)'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정조가 즉위 직후부터 설치 운영한 규장각(奎章閣)은 겉으로는 어제(御製)의 봉안 등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정조의 우군을 양성하기 위한 기구였다. 그만큼 정조가 외척들을 누르고 어떻게 사대부들을 포섭하는가 하는 문제는 정권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본고에서는 정조가 사대부들을 어떻게 굴복시키고 포섭하려 했는가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하였다. 그것을 통해서 정조가 시도한 왕권강화책의 논리와 방법을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정조는 경학(經學)의 본질은 성리학이 아니라 실생활과 절실하게 관련된 학문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사대부들의 이념적 근거를 붕괴시키고자 하였다. 정조가 사대부들의 풍기와 세도를 비판하고 그들의 학문인 주자성리학의 의미를 축소했던 것은 사대부들을 왕권에 복속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붕당론이나 성학론을 기본으로 하는 사대부들의 정치 이념과 학문적 근거를 반박함으로써 공론(公論)의 주체로서 국왕의 권위를 강조하려고 하였다. 정조가 영조의 '군사(君師)' 개념을 계승하고 왕호도 '홍재(弘齋)'에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으로 바꾼 것은 그의 사대부 비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했던 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효종조(孝宗朝) 행전사목(行錢事目)과 행전책(行錢策), 성과와 한계 (The Development of Coin Circulation Institutes and their Regional Impact during the Reign of King Hyojong(孝宗))

  • 정수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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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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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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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논문은 효종조에 실시된 행전책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효종 연간 김육을 중심으로 추진했던 행전책을 담고 있는 사목(事目)을 살펴보았다. 1650년(효종 1년) 시장에 추포가 화폐로 유통되는 문제를 제어하기 위한 추포금단(?布禁斷) 조치가 내려졌다. 여기에는 추포가 물가를 교란시키고 있다는 표면적 이유와 더불어 국폐(國幣)에 준하는 면포를 유통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이를 통해 국가는 유통화폐 통제력을 강화하여 동전유통 정책의 추진력을 확보고자 했다. 1651년(효종 2년) 추포에 대한 단속과 동시에 서로(西路)에 대한 행전책(行錢策)을 실시했다. 행전의 명목은 흉년에 진휼을 위한 재원 확보와 국가 재원의 충원이었다. 서로행전(西路行錢)의 성과에 따라 행전권을 확대하기 위해 경중행전(京中行錢)을 위한 사목이 마련되었다. 사목은 시장에서 동전으로 물건을 거래하는 것은 물론 관청에서도 동전을 사용하도록 강제 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통해 국가 주도의 행전책에 대한 시장의 신인도를 높임과 동시에 정책적 강제성을 담보하려 했다. 행전 확대 정책은 동전공급의 문제로 한계에 직면했다. 1652년(효종 3년) 기전행전(畿甸行錢)과 함께 전세에 대한 전납(錢納)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동철(銅鐵) 부족으로 인한 주전제한으로 행전의 의려움이 있었다. 그에 따라 1655년(효종 6년) 행전사목을 수정 한 경정과조(更定科條)가 제정되었다. 이 사목은 동전의 가치를 미(米)와 은(銀)을 기준으로 책정하고 환전(換錢)을 위한 점포를 널리 설치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국가에서 동전 유통을 강제하고 이를 통해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1656년(효종 7년) 시장에서 동전 유통의 한계와 전납을 위한 동전 공급과 확보의 제약이라는 문제점이 중첩되어 '파전(罷錢)'에 이르렀다. 효종조 김육을 중심으로 추진된 행전책은 시장에서 동전이 유통되는 경험을 축적함과 동시에 정책적 시행착오를 확보하는 성과가 있었다. 이러한 점이 1678년 동전이 전국적으로 유통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효종 재위기의 정책 방향이 시장이 아닌 국가의 재정 확보와 보전에 있었다는 점은 전면적인 행전을 제약하는 한계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이 시기 청나라의 갈등에 따라 북벌(北伐)을 대비하기 위한 재정이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상사(思想史)의 맥락에서 본 19세기 심설논쟁(心說論爭) - 사칠논쟁(四七論爭)에서 심설논쟁(心說論爭)까지 - (19th-Century Morality Dispute in Context of History of Thought - From Four-Seven Dispute to Morality Dispute)

  • 최영성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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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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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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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조선성리학사를 보면 수백년 동안 굵직한 주제의 논쟁이 이어졌다. 16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던 사단칠정 논쟁은 '정(情: 감정)'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18세기 초에 등장했던 호락논쟁(湖洛論爭)은 사람과 사물의 '성(性: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에 주안이 있었다. 이 두 논쟁은 이후 조선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쟁점이 확실하게 부각되면서 조선성리학의 특징적 부면이 아울러 잘 드러났다. 18세기 중엽 이래로 서양세력이 밀려오면서 조선성리학은 서양 세력에 맞설 논리를 개발해야 했다. 성리학에서의 주리론(主理論)이 그 대응 논리의 하나로 제기되었다. 특히 '심(心)'에 대한 각종 논의들이 폭넓게 다루어졌다. 심(心)이 성(性)과 정(情)을 통섭한다는 의미의 심통성정(心統性情)의 개념으로부터, 심을 '리(理)'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 심은 기본적으로 '기(氣)'라는 주장이 나와 대립하였다. 또 심과 명덕(明德)은 같은 개념인가 다른 개념인가의 문제, 명덕은 '리'로 보아야 하는가, '기'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들이 제기되어 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이 논문에서는 조선 말기의 심설논쟁을 사단칠정논쟁, 호락논쟁과 함께 '조선성리학의 3대 논쟁'으로 규정하고 그 위상과 실상, 의의를 조명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심설논쟁은 단순히 이론 논쟁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사성(時事性)'의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서양과 일본 세력을 배척하는 운동, 의병운동과 독립운동 등에도 직, 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다. 심설논쟁은 사칠논쟁이나 호락논쟁에 비해 논쟁의 성격이 복잡하고 범위가 넓다. 게다가 자료의 체계적인 정리를 필요로 한다. 삼대 논쟁에 대한 상호 비교문제는 조선성리학의 특성을 밝히는 데 중요한 주제의 하나다.

인(人)과 물(物)의 관계를 다룬 한국 철리 산문 고찰 (An inquiry into philosophy-reason prose that deals with the nature of people and things)

  • 이희숙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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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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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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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이 논문은 18세기 초부터 30여 년 간 계속된 호락논쟁과 주자학의 폐쇄적이고 차별적인 사상적 특징과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조선 초기 주자학이 새로운 사회의 사상적 배경이 된 때로부터 호락논쟁이 본격화되기까지의 시기에 '인과 물의 관계'를 다룬 철리 산문들을 살펴보았다. 이들 철리산문들에는 점진적이고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다. 이들 철리산문에 드러난 '인과 물을 바라보는 관점'으로는, 인간이 만물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존재라는 인간 중심주의 관점과 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인간이 물을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주체인 인간이 물에 자비를 베푸는 존재로 보는 관점이 있다. 다음으로, 모든 존재가 주체이며 만물이 근원적으로 평등하다는 관점과 인간이 물보다 못하며 물이 주체가 되어 인간을 꾸짖거나 깨우치는 내용을 드러내는 관점이 있다. 이들 철리산문을 살펴보면 인과 물을 바라보는 관점과 글쓴이의 학문을 대하는 태도 사이에 어떤 상관 관계가 있었다. 즉 '인간이 만물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존재다.' 라는 관점을 지닌 학자들은 인간을 유일한 존재로 보듯 주자학만이 유일한 학문이라고 여겼다. 반대로 인과 물을 근원적으로 평등하게 바라보는 학자들은 주자학이 아닌 다른 학문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대함을 알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인성과 물성에 관한 논쟁이 18세기에 이르러 극대화된 까닭은 주자학의 폐쇄적이고 차별적인 성격을 타파하기 위한 진통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인성론 혁신과 실학에서 제기한 사회 개혁론이 근대 사상의 자생적 모색에서 서로 호응하는 긴요한 구실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신숙주(申叔舟) 시(詩)에 나타난 인생이상(人生理想)의 전변(轉變) (The Change of Iife's ideal in the Poetry by Shin Suk-Ju)

  • 유호진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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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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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3-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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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이 논문은 15세기 후반 한시의 특성을 조명하고자 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신숙주 시에 나타난 시인의 의식을 고찰한 것이다. 신숙주의 시는 작가의 문학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처신, 소위 '변절'의 문제로 인해 연구자들의 관심권 밖에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신숙주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위해서도 그의 시는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신숙주의 시는 세조의 정변이 일어났던 시기를 중심으로 양분할 수 있다. 그의 전기 시는 시인이 자족적인 세계 속에서 충만한 자긍심과 여유로운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의 경세이상은 실은 불후(不朽)의 공명(功名)을 성취하려는 영웅의식(英雄意識)의 소산이었다. 이 영웅의식(英雄意識)과 평생 그의 의식을 지배했던 순명의식(順命意識)에 의해 그는 세조의 정변에 동조하게 된다. 그러나 후기 시는 공명(功名)을 성취했던 시인의 삶이 그 자신에게 정신적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또렷이 보여준다. 그는 세조의 정변에 동조함으로 인해 배태된 양심의 괴로움을 호소하였고 자신이 성취한 공업(功業), 나아가 인생 자체가 허무함을 토로하고, 세상에서 말하는 시비(是非) 진위(眞僞) 선악(善惡) 등이 주관적이고 허망한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더 나아가 세상 만물 자체도 환영(幻影)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불가의 공(空) 사상(思想)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러한 사유 과정을 거쳐 시인은 허명(虛明)한 마음과 한가로운 삶에 대한 지향을 노래하게 된다. 신숙주의 시에 나타난 영웅의식, 불가적 사유, 허명(虛明)한 마음에 대한 지향 등은 서거정을 비롯하여 15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주요 문인들의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사유들이다. 결국 양심의 괴로움과 인생에 대한 허무감을 넘어서려 했던 시인의 진지한 모색은 15세기 관료문인들의 인생태도와 그들의 문학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당대 주요 문인들이 신숙주 문학의 전통을 이었다는 성현(成俔)의 진술은 의례적인 수사가 아니었던 셈이다.

공간 마스킹을 이용한 적응적 디지털 워터 마크 (An adaptive digital watermark using the spatial masking)

  • 김현태
    • 정보보호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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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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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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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
  • 본 논문에서는 저작권 보호를 위한 워터마크 내장 방법으로 공간 스케일 변수를 사 용한 공간 마 스킹 방법을 제안한다. 일반적으로 워터마크 알고리즘에서영상에 삽입되는 워터마크의 크 기가 클수록 삽입된 워터마크는 여러 가지 변형에 강인하게 되지만 워터마크된 영상의 화질을 보장하기 어렵다. 반 대로 워터마크의 크기가 작게 되면 양질의 영상을 얻을수 있으나 삽입된 워터 마크의 강인 성을 보장할 수 없는 서로 상반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워터마크의 강인성과 영상의 화질 사이 의 타협점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본 논문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간 마스킹을 사용하였다. 즉 대역 확산 기법으로 워터마크된 영상에 공간 마스킹을 하므로써 텍스쳐 영역과 같은 워 터마크가 인 간시각에 민감하지 않지만 압축 손실이 일어나는 복잡한 영역에서는 압축손실과 같은 일반 적인 영상 처 리에 강하도록 공간 마스킹으로 워터마크의 크기를 크게 하였으며 워터마크를 삽입하기 어 려운 즉 노이 즈에 민감하지만 압축 손실과 일반적인 영상 처리에 강한 평탄 영역에서는 워터 마크 삽입 으로 인한 화 질저하를 방지하기 위해 공간 마스킹으로 워터 마크의 크기를 작게 해 워터마크 삽입으로 인한 화질저 하를 방지하였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제안한 워터마킹 기법은 워터마크된 영상이 공간 마 스킹에 의해 워터마크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어 영상의 질과 워터마크의 강인성 모두를 만족할수 있 다. 그리고 본 논문에서 제안한 워터마킹 방법이 손실 압축(JPEG)과 잡음 그리고 축소 및 확대 클리핑 (Clipping) 컬류 션(Collusion)등과 같은 신호처리에 강인함을 실험을 통해 입증하였다. In this paper we propose a new watermarking technique for copyright protection of images. The proposed technique is based on a spatial masking method with a spatial scale parameter. In general it becomes more robust against various attacks but with some degradations on the image quality as the amplitude of the watermark increases. On the other hand it becomes perceptually more invisible but more vulnerable to various attacks as the amplitude of the watermark decreases. Thus it is quite complex to decide the compromise between the robustness of watermark and its visibility. We note that watermarking using the spread spectrum is not robust enought. That is there may be some areas in the image that are tolerable to strong watermark signals. However large smooth areas may not be strong enough. Thus in order to enhance the invisibility of watermarked image for those areas the spatial masking characteristics of the HVS(Human Visual System) should be exploited. That is for texture regions the magnitude of the watermark can be large whereas for those smooth regions the magnitude of the watermark can be small. As a result the proposed watermarking algorithm is intend to satisfy both the robustness of watermark and the quality of the image. The experimental results show that the proposed algorithm is robust to image deformations(such as compression adding noise image scaling clipping and collusion attack).

경복궁 녹산(鹿山)의 성립과 경관적 의의 (A Study on the Formation and Landscape Meaning of Noksan in Gyeongbokgung Palace)

  • 이종근;소현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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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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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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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녹산은 경복궁 내부에 위치한 구릉 형태의 녹지로서 문화재공간으로 주목받지 못한 장소이다. 이에 본 연구는 녹산이 성립된 배경과 변화 양상을 고찰하여 경관적 의의를 도출하고자 실록, 지도류, 사진에 대한 문헌 분석과 현장조사를 실시하였다. 연구 결과 녹산의 정체성은 풍수적 내맥(來脈), 소나무림, 사슴과 관련되며, 경관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복궁전도」 외 다수의 고지도에는 백악으로부터 경복궁 내부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들이 묘사되었는데, 그중에서 녹산은 강녕전과 문소전으로 이어지는 내맥에 위치함으로써 형성된 숲이다. 북궐도상에서 녹산에는 육우정(六隅亭), 남여고(藍與庫), 녹직처소(鹿直處所), 그리고 남북 방향의 어구와 담장이 표현됨으로써 최소한의 시설과 숲으로 구성된 원형경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세종대에 경복궁의 북쪽 궁장이 건설되었으며, 경복궁 창건 시기에 연조 뒤쪽부터 신무문 안쪽을 후원으로 인식했던 반면에 경복궁 중건 시기는 신무문 밖에 새로운 후원 영역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녹산만 내맥의 산줄기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신무문 밖 후원에 대규모 관사가 건립되고 경무대 부지에 총독관저와 도로가 개설되면서 지형이 크게 변화되었다. 여기에 1967년 청와대와 녹산 사이의 청와대로가 신설되면서 녹산은 백악산록과 단절되었다. 셋째, 내청룡에 해당하는 경복궁 북동쪽의 풍수적 형세가 부족하여 소나무를 심어 지맥을 배양하였던 점과 임진왜란 이전 경복궁 배치도에 '소나무밭(松田)'이라고 표현된 사실에서 녹산의 원형이 된 숲의 주요 성상을 파악하였다. 발굴조사로 확인한 상수리나무, 벚나무, 느릅나무, 밤나무가 어우러진 소나무림을 원형 식생경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녹산에는 성토로 인하여 어구가 사라지는 등 지형이 바뀌고 아까시 등 외래수종과 관상용 향나무 등이 식재되었다. 현재는 소나무림의 비중이 줄고 상수리나무림, 낙엽활엽수혼효림, 일부 가죽나무림과 버드나무림으로 구성된 숲을 이루고 있다. 넷째, '녹산(鹿山)'이라는 명칭이 신령, 장수, 영생, 왕권을 상징하는 사슴으로부터 유래된 사실을 '경복궁 녹원에서 기르던 사슴 일곱 마리 중에 한 마리가 굶어죽었다'는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통해서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