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광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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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조각품 최만린 작(作) <이브 58-1>의 제작기법 및 보존처리 연구 (Study of the Production Techniques Used in Choi Man Lin's and Its Conservation Treatment)

  • 신정아;정참희;유선영;권희홍
    • 박물관보존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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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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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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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최만린 작가의 <이브 58-1>은 석고 입상으로 광복 이후 추상미술 조각 조형이념이 반영된 '이브' 시리즈의 초기 작업 시기에 제작되었다. 근·현대 조각품은 다양한 재료로 제작되기 때문에 재료의 선택과 표현기법이 작가의 의도와 시대성을 반영한다. 따라서 초기작품인 <이브 58-1>에 사용된 재료와 제작기법은 작가의 작품활동 연대기에 중요한 기초자료이다. 본 연구에서는 과학적 분석을 통해 제작기법을 확인하고 여러 의사결정권자의 협의를 통해 보존처리 범위를 설정하고자 하였다. 먼저, X-CT 내부구조 확인 후 재질분석을 실시하여 작품의 형상학적 특징과 재료 및 제작기법을 확인하였다. 분석결과 상대적으로 안정한 상태로 판단되어 소장 기관, 작가 조수, 작가 생전 인터뷰 등의 의견을 종합하여 최소한의 보존처리를 실시하였다.

무형문화의 이주, 전승 그리고 음악적 변화 양상: 은율탈춤의 사례 (Migration and Transmission of the Intangible Culture and its musical change : the case of North Korean Mask Dance Drama, Eunyeul)

  • 김선홍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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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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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7-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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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1945년 광복 이후 남한과 북한이 분단된 상황 속에서 남한은 무형문화의 손실을 예방하기 위해 1962년 무형문화재 제도를 제정하면서 무형문화들을 발굴하고 복원하였다. 이 때 민속 문화를 포함한 여러 무형문화들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민속 문화 중 북한에서 연행되었던 탈춤인 은율탈춤의 사례를 통해 무형문화재 제도 속에서 지정된 무형문화의 전승이 이루어진 과정과 반주음악의 변화 양상에 대해 다룬다. 음악적인 전승을 이루는데 보존회 중심의 구성원들이 국가무형문화재라는 틀 안에서 은율탈춤을 예술로 인식함으로써 그들의 이념과 정체성이 표상된다. 이로써, 제도 속에서 음악적인 전승을 이루는데 구성원들의 정체성과 이념은 불가분의의 관계임을 알 수 있으며 국가무형문화재의 구성 속에서 무형문화를 현재까지 지속시킬 수 있었던 과정을 살펴본다.

나전칠 공예품 제작과 수급(需給)에 관한 연구 - 나전칠기장 민종태 제작 활동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Production, Supply and Demand of Najeonchil Craft Works with a Focus on the Artisan, Min Jong-tae)

  • 채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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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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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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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나전칠공예는 구한말 근대화를 시작으로 6.25전쟁 이후 산업 발전에 힘입어 본격적인 현대화의 길을 걷는다. 1900년대 전반에 걸쳐 펼쳐지는 나전칠공예의 흥망성쇠는 여타 공예 종목과 비교하였을 때 매우 다채롭다. 본 연구는 1929년 나전칠기계에 입문하여, 칠십 평생을 나전칠 공예품과 가구 제작에 매진한 민종태의 제작과 수급 활동을 주제로 한다. 민종태는 근대 나전칠기계의 중시조 격인 전성규의 제자로 살아생전 김봉룡, 송주안, 심부길, 김태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나전칠기 장인이자 사업가이다. 특히 그는 한국 현대 나전칠공예의 호황기인 1970~80년대 주요 수급지였던 서울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본 연구에서는 민종태 나전칠공예의 입문과 광복 전후의 초기 활동을 기술하고, 본격적인 나전칠 공예품 제작과 수급 체계를 갖추어나가는 1950-60년대를 다루었다. 또한 1970~80년대 이른바 '장롱문화' 시대를 맞이하여 큰 규모의 가구를 제작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에 향합과 차통 등을 수출했던 그의 수급 활동을 관련 자료들과 함께 살펴 보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4호 나전칠기장 보유자였던 민종태 제작 활동의 공예사적 의의를 찾고자 하였다.

大邱市 都心部의 街路網 變化 (Changes of Street Patterns in Central Part of Taegu City)

  • 최석주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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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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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9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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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 본 연구는 대구시 구성곽내와 그에 인접한 지역을 중심으로한 가로망의 변화과정을 정치적 사회적 배경, 도시계획과 관련하여 고찰하였다. 대구읍성의 가로는 전반적으로 불규칙적인 미로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만 4개 성문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망은 경상감영이 중심부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서 +자형에 가까운 패턴을 보이고 있다. 개항이후 일인들의 주도하에 성곽철거와 성곽내 +자가로의 건설로 근대적 가로망으로 변형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서 대구읍성의 역사적 유물은 훼손되고 일인들에 의한 토지자본의 수탈이 일어났다. 광복이후 구성곽내에서 중앙로와 신설. 확장된 동. 서신로가 새로운 +자가로를 형성하여 기존의 +자가로가 쇠퇴하게 된다. 그후 중앙로를 중심으로 한 시가지의 남북체계가 동서체계로 변환된다. 이에 따라 추진된 동서관통도로의 신설과 확장은 대구의 중심이 남진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현재는 4개의 남북축 가로와 5개의 동서축 가로가 격자형으로 형성되어져 있다. 중심지역의 주거기능은 약화되고 상업기능의 침입이 진행됨에 따라 비도심시설을 정비하는 등 재개발사업의 추진으로 환경이 다소 개선되고 있다. 도시화가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이 성곽내의 경상감영 등 문화적 유산인 것은 복원하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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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브컬처 콘텐츠에서 한국 신화에 대한 연구 (Research on Korea Mythology in Korea Subculture Contents)

  • 윤영석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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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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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53-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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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20세기 한국사회는 일제의 침략에 따라 강제로 병합되었으며, 일제의 식민정책에 따라 한국의 전통문화가 심하게 훼손되었다. 광복 이후 한국사회는 한국전쟁으로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맞이하였고, 근대화와 민주화를 통해 산업경제와 민주주의제도가 발전하였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산업경제와 민주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한국의 전통문화가 더 심하게 해체되었다. 20세기 중후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도래하면서 기존 서구사회 중심에 대한 비판과 비서구권 및 제3세계의 문화적 정체성이 강조되면서 국제사회에서는 획일적인 문화적 가치보다는 다양한 국가와 민족의 문화가 서로 교류하기를 추구했다. 그동안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이 해체되고 있었다면, 이제는 반대로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한국의 역사, 언어, 예술, 건축,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으나, 한국의 신화에 대해서는 깊이 다루지는 않았다. 근대화 이후 한국의 신화는 미신으로 여기거나 미개한 것으로 취급당했기 때문이다. 신화는 어느 특정한 지역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무의식적인 집단 심리를 보여준다. 한국 신화를 연구하는 것은 한국인 문화적 정체성을 새롭게 찾을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한국의 신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신화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매체로 전달해야 할 것이다. 기존 한국 신화를 소재로 제작된 것으로 영화, 연극, 드라마, 소설 등이 대중문화로 소개되었으나, 최근 만화, 애니메이션, 웹툰, 게임,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서브컬처 콘텐츠에서 등장하고 있다. PC, 인터넷, 스마트폰의 보급에 따른 게임 및 웹툰 이용자들이 증가했으며, 서브컬처 콘텐츠 시장규모 증가는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이용자들을 증가시켰다. 서브컬처 콘텐츠가 한국 신화를 소재로 제작되면서 서브컬처 콘텐츠 이용자들은 한국 신화에 대하여 관심과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한국 신화를 소재로 만든 서브컬처 콘텐츠에 등장하는 한국 신화와 그 의미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뉴스 빅데이터를 활용한 산림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 분석 (An Analysis of Social Perception on Forest Using News Big Data)

  • 장윤선;이주은;나소연;이정희;서정원
    • 한국산림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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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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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62-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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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뉴스 기사와 사설의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거시적 관점에서 국내 산림 정책의 변화와 산림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광복 이후인 1946년부터 2017년까지 7시기로 구분하여 중앙지와 경제지에 보도된 총 13,570건의 '산림' 관련 데이터를 수집하였고 키워드 및 구조등위성 분석(CONCOR: CONvergence of iterated CORrelations)을 실시하였다. 분석 결과, 첫째, '산림' 키워드의 기사 및 사설의 연도별 보도 건수 비율은 전반적으로 증가하였다. 둘째, 보도 분야에 있어서 '산림' 관련 뉴스 데이터는 1기(1946~1966년)에는 사회면에 집중되었다가 2기(1967~1972년)부터 5기(1988~1997년)에는 사회면과 경제면으로, 6기(1998~2007년)에는 문화면까지, 7기(2008~2017년) 이후에는 정치면까지 보도 비율이 높아지는 등 산림 관련 이슈가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시기별로 정책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사회적 인식 또한 크게 변화시키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1~2기에 사회적으로는 산림녹화, 보호에 관한 정책보다 생계에 직접적으로 체감되는 문제를 우선적으로 인식하였고 3~6기에 걸쳐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산림정책에 대한 계획적·과학적 조림의 필요성 인식(3기),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4기), 국토 보전에 대한 인식(5기), 환경·생태적 관점에서의 인식(6~7기)으로 확장되는 양상을 보였다. 본 연구는 산림에 관한 정책과 이에 대한 대중의 사회적 인식이 의미화되어 반영된 뉴스 빅데이터 자료를 활용하여 구명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향후 사회적 이슈를 도출하는 수단으로서 사설뿐 아니라 블로그, 유튜브 등 다양한 사회관계망 서비스(SNS;Social Network Service)의 텍스트 빅데이터와 GDP와 같은 시대별 경제지표를 더불어 활용한다면 대중의 담론, 인식 등을 좀 더 깊이있게 분석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생약연구소의 인삼연구와 약도개성 (Ginseng Research in Natural Products Research Institute (NPRI) and the Pharmaceutical Industry Complex in Gaesong)

  • 박주영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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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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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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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경성제국대학의 부속기관인 생약연구소는 현재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천연물 과학연구소의 전신으로, 일제강점기 인삼연구를 중점적으로 수행하였던 종합연구기관이었다. 생약연구소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약리학 제2강좌의 교수 스기하라 노리유키의 주도로 설립되게 되는데, 스기하라는 약리학 제2강좌가 설치되었던 1926년부터 고려인삼 및 한약에 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진행하였다. 약리학 제2강좌에는 의학 및 약물학 전공인 스기하라 외에도 조교수로 약학을 전공한 카쿠 텐민, 강사로 농학 및 임학을 전공한 이시도야 츠토무가 있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1939년 생약연구소 설립 이전까지 약 36명의 연구자가 활동하였다. 이 중에서는 약 14명의 조선인 연구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경성의전, 경성치전, 경성약전 등 전문학교 출신들로 기본적인 의약학 지식을 갖추고 한의학, 본초학 등 독자적인 의약체계를 활용하는 조선의 한약재 연구에 임하였다. 1927년부터 민병기, 김하식 등이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30년 이후 조선인 연구자는 증가하였다. 약리학 제2강좌는 조선의 약용식물 조사 및 한약재에 대한 약리학적 작용, 성분분석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결과를 발표하였으며, 또한 경성의전, 경성치전, 경성마약류중독자치료소, 지방도립의원 등의 기관들과 공동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1935년, 국내 최대의 인삼 산지인 개성에서는 "약도개성"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는 전시용 약품의 연구 및 양산화, 인삼 산업개편을 통한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민간단체, 개성부, 관동군, 경성제국대학 등이 참여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1936년에 경기도립 약용식물연구소, 1938년에 경성제국대학 부속 약초원 및 병참 제약공장이 설치되었으며, 1939년, 약용식물연구소와 약초원이 결합하여 경성제국대학 부속 생약연구소가 설립되었고 스기하라는 생약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생약연구소에서는 인삼에 관한 약리학적 연구에서 더욱 나아가, 선려삼 등 인삼을 이용한 제품개발 및 판매, 그리고 인삼재배 연구가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1941년 제주도시험장을 설립하여, 제주도산 약재를 사용한 구충제 판시를 생산하기도 하였다. 1945년 일제의 항복과 광복으로 스기하라를 포함한 일본인 연구자들은 급히 귀국하였다. 이후 생약연구소는 서울대학교에 인계되어,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출신 오진섭을 소장으로 우린근, 석주명 등의 학자들이 활동하며 한국 과학계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한국 정치지리학과 인문지리학 일반 50년의 회고 (Retrospect and prospect of political geography and general-synoptic part of human geography in Korea)

  • 임덕순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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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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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5-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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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 1945년 8월 광복을 맞았을 당시 국내 정치지리학은 사실상 그 존재를 말할 형편이 못 되었다. 미군정 기간중인 1947년 초에야 비지리학자 표문화가$\ulcorner$조선 지정학 개관 : 조선 의 과거 현재와 장래$\lrcorner$를 출간했을 정도였다. 국내 지리학자로서 최초의 정치지리학 체계서 를 써낸 사람은 최복현이었다. 그의 정치지리학(1959)은 당시 미국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 다. 형기주는 국내서 지리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는 최초의 정치지리학 논문(국토 통일 가 능성)을 쓴 사람이다. 1960년대 종반에 들어서서 국내 정치지리학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김대경, 차윤, 임덕순 등에 의해서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도 연구 활기는 지속되었는데 특히 동년대 초반에 해방후 국내 지리학 수업자에 의한 최초의 정치지리학 체계서(임덕순) 가 나온 점은 특기할 만하다. 1980년대 중반에는 양적으로 보아 정치지리학이 크게 발전한 시기이다. 박사학위 논문도 최초로 나왔고 석사학위 논문도 이후 다수 나왔다. 전기간에 걸 쳐 볼 때 정치지리 연구는 \circled1 수도, \circled2 행정구역, \circled3 지정적 구조 (특히 한반도), \circled4 분단- 통일, \circled5 각급 행정수도, \circled6 성곽, \circled7 선거, \circled8 도시정치 순의 8대 범주에 걸쳐서 크게 이루 어졌다. 한국의 정치지리학은 국내 문제와 관련, \circled1 국토통일, \circled2 3면 임해의 활동, \circled2 영호 남 불통합의 3대 과제에 연구를 더 기울여야 한다. 학문 자체와 관련해서는 \circled1 신 지정학적 연구, \circled2 전략-군사지리 연구 등에 크게 힘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인문지리학 일반 연구는 $\ulcorner$인문지리학$\lrcorner$을 써낸 김경성으로부터 논의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약 20년이 지나고나 서 오홍석의 비포괄적이나마 $\ulcorner$인문지리학 원리$\lrcorner$가 나왔다. 1970년대 중반이후 인문지리의 실증-계량적 분석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런 중에 1980년대 초반에 인문지리 학 방법론상 중요한 2개의 대립적 논문 (김인의 공간지리학 옹호와 최기엽의 장소이해 옹 호)이 나왔다. 그후 방법론상의 논의가 5-6편 나와 오늘에 이르렀다. $\ulcorner$인문지리조사법$\lrcorner$ 교 재가 역시 비포괄적이나마 국내 최초로 출간된 것은 1988년 (조동규)의 일이다. 포괄성이 훌 륭한 인문지리학 체계서의 출간이 절실히 요망된다. 방법론에 있어서는 공간-계량적 입장과 지역-종합-해석적 입장간의 조화와 상호보완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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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이후 한국 공공도서관사 연구 -일제하 공공도서관제도의 영향을 중심으로- (A Study of the History of Korean Public Library after the Korean Liberation Day - An Emphasis on the influence of public Libraries System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m-)

  • 김포옥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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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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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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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
  • The study has tried to analize and appraise how did public library system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m affect the establishment and managemant of Korean public libraries. To achieve the purpose of the above-mentioned study, the contents of $\ulcorner$Japanese library statute$\lrcorner$ under Japanese imperialism and the current $\ulcorner$Korean library law$\lrcorner$ have been mutually compared, at the same time, the vestiage of Japanese imperialism in view of the establishment, personnel administration and reading systems have been concretely investigated, analyzed and compared. The conclusions obtained from the above are as followings. 1. In those days of the Korean Liberation, the situation of Korean public libraries was such as it under the Japanese rule and so, their names were only changed. However, as a part of its independent activities, the national library have once carried out the various programs such as the training of professional librarians, the establishment of the new classification schedule and the chief Librarian and deputy Librarian from the professional librarians in the office regulations, and they were well worth being the good examples for today's Korean library circle. Though the Gover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ad been formally established, the situation of the library circle was very dull owing to the Korean war for a long time. In 1963, $\ulcorner$The Korean library law$\lrcorner$ was promulgated, but the establishment of public libraries did not give satisfactory results because of the institutional fragility. In the 1980's the importance of library was embossed from the viewpoint of life-long education and the number of libraries was increased. However, there were still the remaining vestiges of Japanese library system in the practical library services. 2. After the Korean Liberation, the influnces of public library system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m showed in the office regulation of national library and the Korea library Law were also in the legal mechanism. In particular, the regulations of $\ulcorner$The staff-member of public library$\lrcorner$ and $\ulcorner$Admission fee of public library$\lrcorner$ including the chief librarian have referred to the library system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m since the liberation day to date. 3. At that time of the Korean Liberation, the U.S.Military Government Office had decided that the public library administration should be attached to the administration of local and internal affairs in accordance with the Japanese administative system. As a result, the public libraries had been forced to be indirectly affected by public library system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m for twenty years since the Liberation. 4. Since the Liberation, the personnel adminstration of public library has been so far on the steps of model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m. As the result of the field survey, the position standards of local chief librarians, non-professional character, the extra post system and the preponderant appointment of non-professional offices have analyzed by the influence of Public library system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m. Therefore, the Government authorities-concerned must readjust the standards of qualification and the divided duties corresponding to the position of public library staff members and to stipulate expressly in the revised library law. In addition, the regulation of the admission fee should be also actively detected for the free adminssion of library users. 5. Since the Liberation Day, the reading methods of public library have been so far similar to reading method under the Japaness imperialism. For example, the admission fee levied, the complicated procedures of using books including entrance and exit of a library, no-admission system, the limited lending books, the deposit system of outdoor lending books and the surety liable jointly and severally are originally caused by bureaucracy of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m. Therefore, the public libraries should make an offer space and opportunities which can enjoy freedom to the gull in future. The procedures and standards of library users will be simplified, if possible. As the above-mentioned, the actual conditions of Korean public libraries have been examined and analyzed. As the result of it, there are still the remaining vestiges of public library system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m in the establishment and management of the nation-wide public libraries. Such the remnants are an obstacle to the democratic development of public libraries and so, the authorities-concerned should take the proper-measures as soon as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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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분석을 통한 경호 전문성 제고 (Professionalism raising of the escort which leads an instance analysis)

  • 유형창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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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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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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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에 분석자료로 소개되는 요인암살 및 위해사건은 3가지인 바 미국의 레이건대통령 저격사건, 한국의 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 이스라엘의 라빈수상 암살사건이다. 1981년 레이건대통령이 워싱턴의 힐튼호텔 앞에서 연설을 마치고 백악관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차량에 탑승하기 직전, 범인 힝클리가 33구경 리볼버 권총으로 대통령의 가슴과 공보비서 및 경호원 등을 실탄6발로 저격한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한국에서는 제일동포 2세 문세광이 1974년 서울 장충동 소재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29주년 8. 15광복절 기념식 행사장에서 박정희대통령을 시해하려다 실패하고 육영수여사를 저격하여, 우측두부에 총상을 입혀 사망케 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스라엘 라빈수상은 1995년 이스라엘 텔아비브 시청 앞에서 중동평화정착 계획지지 군중대회를 마치고 차량에 탑승하려는 순간 범인 이갈 아미르가 쏜 총탄에 피격되어 사망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경호분석 측면에서 큰 교훈을 남겼으며, 경호기관에서 교육훈련시 활용되고 있는 소재들이다. 한국에서도 대통령실 경호처는 물론이고, 전국 경호관련학과에서 '경호분석학', '경호실무', '경호방법론' 등의 교과목에 주요한 위해사건 모델로 다루어지고 있다. 경호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경호기법은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더불어 정치 사회 문화와의 제반관계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경호분석적 측면에서 주요 모델로 다루어지고 있는 이 사건들을 소개 수준을 넘어, 경호기법적 측면에서 분석하여 재평가하고자 하는데 연구의 목적을 두었다. 특히 미국 레이건대통령 암살미수사건은 현장의 근접경호원들이 총성 이후 10초 만에 경호 대상자인 레이건 대통령을 사건 현장에서 즉시 대피시키는 신속성을 발휘한 부분에 있어서 1963년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과 비교해 볼 때 경호원들의 행동이 상당히 전문화 되었다는 긍정적 성공사례로 평가되고 있으나 본 연구에서 제기된 행사장 외곽 취재구역 근무요원의 방심, 수시사용 행사장에 대한 안일한 자세, 무선교신 혼란과 무선보안 누설위험, 의무기록철 비치 미비, 위해 인물 프로파일링 미비, 병원 및 응급실 사전 미확보 등의 문제점을 발생시켰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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