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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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 박석의 산지와 운송과정 해석 (Interpretation of Provenance and Transportation Process for Bakseok of Geunjeongjeon Hall in Gyeongbokgung Palace, Korea)

  • 최명주;이찬희;조영훈
    • 암석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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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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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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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경복궁 근정전 박석은 눈부심과 미끄럼 방지 및 배수 등을 고려한 판상의 바닥 포장석재다. 이 영역의 박석은 이방성을 갖는 중립질 흑운모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미약한 미르메카이트 조직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고문헌을 토대로 박석의 채석지점을 탐색하여 양자의 동질성을 분석하였으며, 박석의 운송과정을 해석하였다. 이 결과, 박석과 석모도 낙가산 일대의 화강암은 암상, 구성광물, 조직 및 지구화학적 특징이 거의 동일하였다. 박석에 대한 석역은 치석 및 운송 용이성, 물자 및 인력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석모도의 화강암 박리돔이라는 물리적 풍화특성을 활용하여 판상의 석재를 조달한 것으로 해석된다.

조선시대 궁원 내 친잠(親蠶)문화의 배경과 공간적 특징 (Backgrounds and Spatial Characteristics of Sericulture in the Rear Garden of Palace in Joseon Dynasty)

  • 허선혜;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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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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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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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 내에서 일어났던 친잠문화의 배경과 공간적 특징에 대한 탐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조선은 유교적 중농주의 국가로서 국초부터 농업 못지않게 양잠업 장려에 열의를 보여 양잠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진행해 왔다. 그러한 노력의 일면으로 조선 왕실은 궁궐 내에서 친잠활동을 하게 되었다. 조선은 초기 태조 연간부터 궁원 곳곳에 뽕나무를 심었으며, 세조는 동궁(東宮) 근처에 잠실(蠶室)을 설치하여 세자를 비롯한 궁중 사람들에게 양잠의 중요성을 수시로 알게 했다. 성종 연간에는 조선 최초로 창경궁 후원에 채상단을 만들어 친잠례를 거행하였고, 이후 채상단은 위치를 달리하며 광해군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 후 영조 연간에는 경복궁에 채상단과 정해친잠비(丁亥親蠶碑)를 건립하였는데, 이는 경복궁 유지에 대한 영조의 애착과 양잠의 권면에 대한 적극적 의지의 산물이었다. 경복궁 유지에서 터가 고르고 뽕나무를 심기 적합한 동편이 선택되어 채상단을 축조했으리라 가늠해 볼 수 있는데, 이 장소는 세종 연간 잠실이 있던 장소이기도 하다.

조선 궁궐 입지 선정의 기준과 지형에 대한 연구 - 경복궁과 창덕궁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Topography and the Criteria of Choosing the Location-Allocation of Palaces - Focusing on Gyeongbokgung Palace and Changdeokgung Palace -)

  • 김규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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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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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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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조선의 궁궐은 크게 법궁(法宮)과 이궁(離宮)으로 분류된다. 이와는 별개로 정궁(正宮)의 개념이 있다. 법궁은 정궁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만, 이궁이 정궁으로 활용되는 것은 정치적인 상황에 따른다. 한양 최초의 궁궐은 경복궁이며 법궁으로 지어졌다. 경복궁의 자연 지형은 왕권을 상징하는 백악산을 배경으로 하였으며 사신사가 뚜렷하다. 궁궐의 입지도 왕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도록 궁궐 밖에서 잘 보이는 장소를 선정하였으며, 백악산의 능선을 따라 하나의 축선을 기준으로 일직선상에 삼문삼조를 배치하여 왕권의 정통성과 위계질서와 통일성을 추구하였다. 이궁(離宮)은 왕의 요구나 왕실의 수요 또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건축되었으며, 왕실의 일상생활 공간으로서 복수의 축선에 의해서 독립적이고 다양한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법궁은 양(陽)의 지형을, 이궁은 음(陰)의 지형을 선택하였으므로 전각을 배치하는 준거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궁궐의 조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왕기(王氣)였다. 궁궐 건설의 중요 요소는 풍수기맥과 금천이다. 풍수기맥은 왕기를 수용하는 통로였고, 금천은 왕기가 궁궐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게 하는 방법론이었다. 전형적인 풍수 지형을 선택한 법궁(法宮)인 경복궁의 경우 풍수 요소를 적재적소에 적용하고 있어서 풍수 원리를 충실하게 반영하였다. 반면에 이궁(離宮)은 비정형적이고 온전하지 않은 풍수 지형에 지어졌다. 풍수는 조선시대 지배계층의 자연관이며 지리관이었다. 이들의 지리관을 살펴봄으로써 전통문화 계승과 복원에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경복궁 청기와에 사용된 납유의 화학조성과 납동위원소 특성연구 (Study on the Chemical Composition and Lead Isotope Ratios of Lead Glaze Used on Blue Tiles from Gyeoungbokgung Palace)

  • 김소진;김영도
    • 자원환경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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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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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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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경복궁 전각 청기와에 사용된 납유의 발색 원리와 용융제로 사용된 납의 산지를 확인하기 위해 성분 분석과 납동위원소비 분석을 실시했다. 청기와 31점을 녹색, 청색, 황색으로 구분하여 표면에 시유된 납유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Pb, Si, Cu가 주성분으로, Fe, Ca, Mg, Al 등이 미량으로 검출되었다. 청색 납유에서는 Cu의 함량이 높았으며 황색 또는 갈색의 납유에서는 Cu는 검출되지 않았고 Fe의 함량이 높게 나타났다. 따라서 납유의 제작에 용융제로 납을, 발색제로 산화동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경복궁 청기와에 사용된 납유의 납동위원소비는 한반도 납동위원소비 분포도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포함하는 zone 3 영역에 도시되었으며, 납유의 용융제는 이들 지역에서 산출되는 방연석 등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과 통일신라시대 녹유의 납동위원소비는 대부분 한반도를 벗어나 위치하여 납의 산지가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녹유 전돌의 납동위원소비를 통해 주변국과의 교류를 추정할 수 있었으며 동일 사찰에서 출토된 녹유 전돌의 납동위원소비가 서로 달라 다른 시기 또는 다른 공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경복궁 중건 시 창의궁 함일재의 흥복전 이건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Relocation of Heungbok-jeon formerly known as the Hamil-jae of Changui-gung Palace in the Reconstruction of Gyeongbok-gung Palace)

  • 홍석주;김버들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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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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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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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This study explains details on Heungbokjeon during the reconstruction of Gyeongbokgung Palace in the 19th century for the first time in 273 years. Hence, the construction of a palace with more than 7,000 Kan(間) made possible in a short stretch of time. Given the fact that its existing architecture was recycled. The antecedent of Heungbokjeon(興福殿) was the Hamiljae(咸一齋) of Changuiggung(彰義宮) which served as the residence of King Yeongjo before he was enthroned. On the other hand, the Changuigung was the outset of Inpyeongwi-gung(寅平尉宮), which was built for the princesses. During the reign of King Hyojong the princess who got married must depart from the Inpyeongwi-gung. This study corroborated the undertaking of modification of its architecture frombeing asymmetrical house to symmetrical most primarily the inner part of the palace through the innovation of Changui-gung and the restoration of Hamijae to Heungbokjeon. Hence, it was confirmed that the Heungbokjeon was the only inner part of the palace that was not burned down by the 2 consecutive fires during the reign of King Gojong, to be more specific these fire happend on his 10th and 13th year of rule. Consequently, the research process of Gyeongbokgung Heungbokjeon can escalate the possibility of considering not only the reconstruction of Gyeongbokgung in the 19th century, as well as the construction of the capital city in the 17th century.

고종 연간에 조성된 궁궐 후원 다용도 공지(空地)의 활용양상 (A Study on the Status of Multi-functional Vacant Ground at the Palace Rear Garden during the Era of King Kojong)

  • 정우진;권오만;심우경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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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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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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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 후원에 위치한 다용도 공지의 조영역사를 구명하고, 이와 내적 맥락을 같이 하는 고종 연간의 다용도 공지를 고찰한 것으로서, 중건 경복궁 및 경운궁 임어기에 후원 공지를 조성한 배경과 그 이용에 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궁궐 내의 다용도 공지는 조선의 정치무대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적 공간이자, 국가운영의 기반시설이 되었다. 조선이 성립된 후로 창덕궁에서 왕실의 행사를 거행하는 공지로는 광연루(廣延樓)와 해온정 사이의 공터, 열무정(閱武亭) 일대, 서총대와 춘당대(春塘臺)가 조사되었으며, 여기서 활쏘기, 과거시험, 군사훈련과 다양한 연회가 이루어졌다. 고종 즉위 후에는 중건 경복궁에 경무대(京武臺)가 조성되었고, 경운궁에 환어한 고종 34년 뒤에는 경희궁이 영외 후원처럼 사용되었다. 두 공간의 특징으로, 신무문(神武門) 밖 후원의 경무대는 창덕궁의 공간구성이 이입된 특성이 있으며, 경희궁의 경우 원활한 공간 연계를 위해 운교(雲橋)가 설치되었다. 특히 고종 시대 후원 다용도 공지는 과거시험이나 시사(試射)와 같은 이전에도 있었던 국가적 행사장의 의미를 넘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조선 침탈이 가속화 되는 시점에서 일국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 국왕의 위엄과 권위를 보여주는 장소로 기능하였다. 또한 다용도 공지가 대규모 인원을 동원한 관병식(觀兵式) 등의 군사조련장으로 주로 활용된 사실은 시대성을 반영한 결과로 간주된다.

우리나라 전기사업의 발전 개략사

  • 우형주
    • 전기의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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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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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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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 우리나라에서 전기에 대해 체계적으로 다룬 최초의 기록은 아마도 최한기의 1866년 저술 [명남루 문집 권 1]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전기 점등은 1887년 1월 26일에 경복궁내 건청궁에 전등 세 쌍을 가설한 것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번 대한전기학회 창립 50주년을 맞으면서 그동안 전기사업에 관련한 발전과정을 간략적으로 그 흐름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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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 50년의 개관

  • 이상효
    • 전기의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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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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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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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 1997년은 전기학회 창립 50주년이며, 동시에 이 나라에서 전기가 사용된지 110년이 되는 해이다. 1987년 1월 26일에는 건청궁(현재의 경복궁)에 전등불이 켜짐으로써 한반도에 전기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대한전기학회는 1947년 7월 9일에 창설되었다. 이 기사는 [전기학회 50년사]의 [제 2장 대한전기학회 50년 역사의 개관]의 집필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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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과학인물 - 세종 이도(1397~1450년)

  • 박성래
    • 과학과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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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1호통권3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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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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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조선조 4대 임금 세종은 32년 재임하는 동안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큰 업적을 남겼다. 본명이 이도인 세종은 한글을 만들어 보급했고 특히 천문학에 놀라운 공을 세웠다. 칠정산을 완성해 일식, 월식 등 천체운동을 미리 알아냈다. 세종은 경복궁 경회루 둘레에 온갖 규모의 천문기구 즉 혼천의와 간의, 규표와 동표, 자격류, 해시계, 측우기, 수표 등을 세워 서양보다도 앞선 과학기술의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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