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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견문기(Ⅲ)

  • 이종수
    • 과학과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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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1호통권3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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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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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 명치유신 전 수백년 동안 쇄국정책을 펴온 일본. 그러나 양학에 눈을 뜬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쇄국의 문을 허물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 활용하게 되었다. 일본은 외국인 교사를 각료급 월급으로 우대하면서 일본 땅에 과학의 뿌리를 내리는 작업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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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견문기(Ⅷ)

  • 이종수
    • 과학과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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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6호통권3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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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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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 일본의 높은 과학기술수준은 명치유신(1868년) 이후 배출된 많은 지도자들의 열정과 공헌에 따른 것이다. 9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본원자력산업회의 회장으로 활약한 아리자와 히로미 박사는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과학기술계 지도자였다. 그의 후계자인 무카이보 다카시, 금속물리학자 가야 세이지, 외무부대신을 지낸 나카야마 타로 박사 등 많은 지도자들이 일본의 과학기술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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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기 기록관리제도와 등기실체제(Registry System) (Record management system and Registry System in the Gabo Reform)

  • 이승휘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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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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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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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갑오개혁기 기록관리의 특징 중에 하나는 왕복과, 이후 문서과가 기록의 생산에서부터 유통에 이르기까지 통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업무가 종료된 기록은 기록과로 넘겨져 분류와 정리가 이루어졌다. 기존 연구들에서는 갑오개혁기의 이런 기록관리제도는 일본을 통해서 수입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본고는 명치유신 이후 정착된 일본의 새로운 기록관리제도가 당시 프로이센의 등기실체제를 받아들인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등기실체제는 현용기록을 관리하는 체제이고, 이는 기밀국가기록보존소(아카이브즈)를 통해 시민에게 기록을 공개하는 근대적 기록관리체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명치기 일본은 프로이센의 현행 기록관리체제인 등기실체제만 수용하였고, 아카이브즈의 설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갑오개혁기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갑오개혁기 일련의 법규 속의 기록관리관련 규정을 '근대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갑오개혁기의 기록관련 법규는, 기록에 대한 시민의 권리, 즉 기록의 공개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근대적 기록법규'는 아니었다. 그러나 갑오개혁기 기록관리제도가 우리나라의 기록관리제 도사에 큰 의미를 주는 것이 있으니, 기록의 가치와 기구와 명칭이 기록의 라이프사이클과 명실상부하다는 점이다. 현용기록을 관리하는 기구가 문서과였고, 업무가 끝난 기록을 분류 정리하여 편철하는 기구가 기록과였다. "현용기록=문서=문서과, 비현용기록=기록=기록과"의 개념은 이후 계승되지 못하고, 오늘날에도 현용기록이나 비현용기록이나 기록으로 사용하고 있고, 관리기구의 명칭도 마찬가지이다.

韓 . 日 民家의 平面構造 比較硏究 (A Comparative study on the structure of plan in folk houses of Korea and Japan)

  • 장보웅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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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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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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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 한국과 일본은 대한해협과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리 고 고대에 선박으로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가는 문제는 일기만 청명하면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대의 일본은 한반도와의 문화적 교류 와 주민의 이동이 많았고, 그것도 일방적으로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우리의 수준 높은 문화를 직접 그들에게 전수시켰고, 일본으르 건너간 많은 주민들은 일본 의 상류층을 형성하였고 그리고 원주민을 지배하였다. 다시 말하면 일본은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다방면의 많은 문화를 수용하였으뎌, 특히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 너간 주민들은 한반도에서 거주하던 민가를 그대로 일본 열도에 재현하였다. 따라서 한.일 양국의 민가는 평면의 구조 면에서 차이점 보다는 유사점이 많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유 사점은 현시점에서의 관점이고, 과거로 거슬러 을라가면 갈수록 유사점은 공통점으로 전환 될 것이다. 일본은 19세기 말에 명치유신을 통해서 근대화를 시작하면서 그들의 민가도 부 분적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재도 한국의 민가 증에서, 특히 겹집은 그 구조가 일 본 민가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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