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그레이엄 (A. C. Graham)이 후기묵가의 저작인 "묵경"에서 보이는 필(必)과 선지(先知)를 각각 '논리적 필연성'과 '선험적 지식'(a priori knowledge)으로 보는 해석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그레이엄은 묵가의 논리학을 '이름과 대상을 짝짓는' '기술의 학'(論)과 '이름과 이름간의 관계를 따지는' '추론의 학'(辯)으로 나누고 특히 후자에 대해 비록 그것이 서구의 형식논리학은 아니지만, 유클리드 기하학과 같은 엄밀한 증명의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은 지식을 그 대상에 따라 명지(名知)와 합지(合知)로 나누어보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기술의 학과 이름의 학은 후기묵가의 저작인 "묵경"안에서 명확히 구분될 수 없고, 게다가 묵가의 선지(先知)와 이 선지(先知)가 가진 필연성은 기본적으로 논리적 필연성이 아니라 규범적 필연성 및 경험적 필연성의 개념이다. 규범적 필연성은 중국의 정명(正名)사상에서 제시된 '규범적 정의이론'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규범적 정의이론이란 기술적 정의이론과는 달리 규범적으로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버지는 자애롭다'의 정의는 형태는 기술적이나 사실은 '아버지는 자애로워야한다'의 규범적인 것이다. 이러한 규범적 정의이론을 통해 경험적 지식은 그것이 지식인한 당연히 필연적으로 오류 불가능임이 주장된다. 한마디로 묵가에서는 경험적 지식이 추론적 지식 혹은 선험적 지식보다 항상 더 우선적이기에 묵가의 선험적 지식은 사실 엄밀하게 선험적인 것이 아니고, 이러한 지식이 갖는 필연성도 규범적 필연성 및 경험적 필연성에 불과하다.
이 글은 『묵경』 속에 내재된 물체 운동에 관한 이론들, 가령 축성(築城) 과정에서 제기된 중력 원리의 초보적 접근, 생산력 증대를 위해 고안된 지레와 도르래, 빗면 원리의 이해와 활용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것이 지닌 과학적 의의를 규명함으로써 묵가의 합리성을 제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 글은 묵자를 위시한 묵가들이 수공업에 종사하는 특수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기술의 발전과 백성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는 견해를 재조명함으로써 묵가 과학 사상의 궁극적 지향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묵가는 백성들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된 사회 구축을 위해서는 과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은 선진학파 중 하나이며, 과학을 통해 재화가 풍족한 사회를 추구한 선각자들이다. 따라서 묵가가 제기한 과학 이론들은 단순한 사물의 현상을 관찰하고 그것에 내재된 규칙성을 이끌어 내는데 주안점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반드시 민리(民利)가 전제되고 또 그것과 긴밀한 연계를 가질 때에만 이론화될 수 있었다. 20세기 초 중국 사상계에서는 묵가가 지닌 과학 사상에 주목하며 그것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였는데, 특히 물체 운동과 관련된 묵가의 견해는 서양의 역학 이론에 버금가는 탁월한 이론으로 이해되었고, 애민 사상에 기초한 묵가 사상의 정신과 의의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묵가가 제창한 물체 운동과 관련된 이론들은 당시에도 변함없이 실생활에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묵가 사상에 대한 백안시 혹은 방치가 중국 과학 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다고 자책하기도 하였다.
생산 수단이 지금과 같이 발달 되지 않았던 고대에는 묵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절검을 통한 경제적 안정을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묵자의 경우처럼 통치자들의 사치와 낭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것이 국가와 사회 그리고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속속들이 밝힌 사상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묵자의 이러한 노력은 번잡하고 사치스러운 예(禮)를 피하고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를 갖추기 위함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재화와 백성의 노동력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재물을 사용하는데 낭비가 없고 백성들의 생활이 수고롭지 않으면 많은 이로움이 일어난다는 묵자의 경제관은 너무나 당연하여 단순하기까지 느껴지지만, 사실은 통치자들에 대한 견제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묵자의 최종 지향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묵가의 경제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론이라고 생각된다. 묵가는 노동 생산과 생산품의 교환 문제, 가격 이론 등이 지닌 중요성에 대해 가장 먼저 인식한 선진 학파이며 사람들의 구매력과 가격 그리고 욕구와의 관계에 대한 이론도 개진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묵경" 속에 잘 기재되어 전해 온다. 이는 묵가가 물질적 조건이 인간의 윤리적 삶과 사회 제도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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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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