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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scovery and Exploration of the Tomb of Jang Mui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일제강점기 장무이묘의 발견과 조사

  • Jung In-seung (Department of Cultural Anthropology at Yeungnam University)
  • 정인성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 Received : 2024.03.27
  • Accepted : 2024.05.02
  • Published : 2024.06.20

Abstract

The Tomb of Jang Mui was discovered and investigat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It has provided key archaeological material for identifying the Daebang Commandery mentioned in historical records as Sariwon in Hwanghae-do Province when some bricks used in the construction of the tomb were found to be stamped with the official title "Prefect of Daebang Commandery." The discovery of the Tomb of Jang Mui served to confirm that the brick chamber tombs found along the Daedonggang River in 1909 were related to the Nangnang Commandery. It can be viewed as a major archaeological breakthrough that settled a debate over the locations of the Daesu River and Daebang Commandery that had been ongoing since the early Joseon Dynasty. Despite its significance for archeology and ancient Korean history, the circumstances of the discovery and investigations of the Tomb of Jang Mui have not been thoroughly examined. Inscribed bricks and roof tiles unearthed during the excavation conducted by Sekino Tadashi in 1912 are currently housed at The University Museum of The University of Tokyo. A number of other bricks excavated from the Tomb of Jang Mui are in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Main agents of the investigations into these materials have not all been identified. Only some records on the materials collected during the investigations by Nomori Gen and others specify the main investigators. Inscribed bricks from other related tombs are also found in the Tokyo National Museum and at several universities in Japan. It is hoped that a comprehensive report incorporating all these materials can be written. Based on a reinterpretation of its structure conducted by Jung In-seung in 2010, the Tomb of Jang Mui has been dated to 348. This means it was not built during the Daebang Commandery period. The most compelling archaeological evidence regarding the location of the Daebang Commandery and its local capital has been undermined. It is hoped that active discussions will be held on the issue of the Daebang Commandery and its local capital.

일제강점기에 발견되어 조사된 장무이묘는 문헌 속의 대방군을 황해도 사리원으로 비정하는 결정적인 고고자료가 되었다. 무덤 축조에 사용된 전돌 중에 대방태수라는 관직명이 찍힌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무이묘의 발견은 1909년에 발견된 대동강변 벽돌무덤군을 낙랑군과 관련된 유적으로 확정 짓는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이래로 대수(帶水)와 대방군의 위치를 둘러싼 논란이 고고학적으로 정리된 일대 발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고대사와 고고학 연구에서 이토록 중요한 유구임에도 불구하고 그 발견 경위와 조사 내용이 제대로 검토되었다고 할 수 없다. 1912년 세키노의 발굴에서 출토된 문자 전돌과 기와류는 현재 도쿄대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다수의 장무이묘 출토 전돌이 소장되어 있는데 개별 자료의 조사 주체는 아직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노모리 등의 조사에서 수집된 자료에는 이를 명시한 주기가 있음을 확인한 정도이다. 이 외에도 도쿄국립박물관과 일본의 몇몇 대학에도 관련 문자 전돌이 반출되어 있다. 이들 자료를 망라한 종합 보고서가 작성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장무이묘는 무덤의 구조에 대한 재해석(정인성 2010)을 바탕으로 그 시기를 4세기 중엽인 348년으로 보는 설이 우세해 졌다. 대방군 시기의 무덤이 아닌 것이다. 대방군과 군치의 위치를 둘러싸고 가장 유력한 고고학 증거가 사라진 셈이다. 관련하여 대방군과 군치문제 등을 둘러싼 논의의 활성화를 기대한다.

Keywords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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