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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 창건과 철불 조성 연구

The Establishment of Seongjusa Temple and the Production of Iron Buddhas

  • 투고 : 2023.10.05
  • 심사 : 2023.11.23
  • 발행 : 2023.12.20

초록

충청남도 보령에 위치한 성주사(聖住寺)는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 800~888)이 창건한 사찰이다. 무염은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잠시 수도 경주에 머물다 김인문(金仁問, 629~694)의 후손들이 관리하던 사찰에 주석하였다. 이곳에서 무염은 불타고 남은 사찰을 중수하여, 847년에 선종사찰 성주사로 개창하였다. 이후 성주사는 사세가 번창하였고, 사역 내 여러 전각이 들어서며 대규모 가람의 모습을 갖추었다. 지역 내 성주사의 영향력은 「숭암산성주사사적(崇巖山聖住寺事蹟)」에서 살펴볼 수 있다. 「숭암산성주사사적」을 보면 성주사에 건립된 불전은 모두 73간으로 전한다. 이 중에서 주목되는 기록은 '전단림구간(栴檀林九間)'이다. 전단림구간은 '전단으로 지어진 건물이 9간' 혹은 '전단을 보관한 곳이 9간'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성주사에 전단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전단은 유향목재(有香木材)로 동남아시아 자바나 수마트라에서 생산되었다. 장보고 사후, 서남해안일대를 장악한 군소 해상세력이 동남아시아 전단을 대량으로 입수하여 성주사에 시주한 것으로 보인다. 문성왕대 김양(金陽, 808~857)은 무열왕계인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지역 내 명망이 높았던 무염의 성주사를 후원하여 왕실과 성주산문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원성왕계 왕실에서는 성주사를 지방 거점사찰로 삼아 반왕실적인 기운이 남아있는 지역에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무염은 사찰을 수호하고, 민심을 교화하고, 나아가 지역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철불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주사 문도가 2,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사세가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성주산문의 중심사찰인 성주사에 봉안된 철불은 지역의 민심을 결집하는 하나의 존상(尊像)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성주사 철불은 모두 2구로 확인되며, 현재 전하는 철불편과 대좌의 크기로 볼 때 각각 금당과 삼천불전에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금당에 봉안된 철불1은 2m가 넘는 대형 철불이고, 삼천불전에 봉안된 철불2는 1m가 넘는 중형 철불로 판단된다. 「숭암산성주사사적」을 보면 '개창선법당오층중각(改創選法堂五層重閣)'이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이를 통해 성주사 개창시 철불1과 같은 대형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 중층식 금당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철불1은 「성주사비(聖住寺碑)」와 손가락편의 모양을 통해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결한 불상으로 추정된다. 성주산문은 동시기의 실상사(實相寺), 보림사(寶林寺), 삼화사(三和寺)와 같이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주존불로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무염이 초년에 화엄을 수학하였고 귀국 후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신라하대 왕실을 중심으로 한 화엄종의 복고적인 경향이 선종사찰 성주사에도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Seongjusa Temple was founded in Boryeong in Chungcheongnam-do Province by Monk Muyeom (800-888), better known as Nanghye Hwasang. After returning from studying in China, Muyeom stayed in the Silla capital city of Gyeongju for a period. He later settled in a temple that was managed by the descendants of Kim In-mun (629-694). He then restored a burned-out temple and opened it in 847 as a Seon (Zen) temple named Seongjusa. It prospered and grew to become a large-scale temple with several halls within its domains. The influence of Seongjusa in the region can be seen in the Historical Record of Seongjusa Temple on Sungamsan Mountain, which relates that there were seventy-three rooms within the domains of the temple. What is most notable in the record is that the temple is referred to as "栴檀林九間," which means either "a structure with nine rooms built with Chinese juniper wood" or "a place that houses Chinese juniper wood and has nine rooms." Regardless of the interpretation, Seongjusa Temple had a large amount of juniper wood. Around this time, the term "juniper" referred to the olibanum tree (Boswellia sacra) native to the islands of Java and Sumatra in Southeast Asia. It is presumed that at some point after the death of Jang Bogo, the maritime forces that controlled the southwestern coast of Korea may have acquired a large amount of Southeast Asian olibanum wood and offered it to Seongjusa Temple. During the reign of King Munseong, Kim Yang (808-857) patronized Seongjusa Temple and its head monk Muyeom, who enjoyed a lofty reputation in the region. He sought to strengthen his own position as a member of the royal lineage of King Muyeol and create a bridge between the royal family and Seongjusan Buddhist sect. The court of King Wonseong designated Seongjusa Temple as a regional base for the support of royal authority in an area where anti-royal sentiment remained strong. Monk Muyeom is believed to have created an iron Buddha to protect the temple, enlighten the people, and promote regional stability. Given that the Seongjusa community had expanded to include more than 2,000 followers, the iron Buddha at Seongjusa Temple would have been perceived as an image that rallied the local residents. It is assumed that there were two iron Buddhas at Seongjusa Temple. The surviving parts of these Buddhas and the size of their pedestals suggest that they were respectively enshrined in the Geumdang Main Hall and the Samcheonbuljeon Hall of Three Thousand Buddhas. It is presumed that the first iron Buddha in Geumdang was a large statue over two meters in height and the second one was medium-sized with the height over one meter. The Historical Record of Seongjusa Temple on Sungamsan Mountain contains the phrase "改創選法堂五層重閣" which indicates that a multistoried Geumdang was newly built to enshrine a large Buddha sculpture like the first iron Buddha when Seongjusa Temple was founded. Also, according to the Stele of Seongjusa Temple and the surviving finger fragments, the first Buddha was making the fear-not and wish-granting (abhayavarada) mudras. The main Buddha of Seongjusa Temple is possibly Nosana Buddha, just like the main Buddhas at the contemporaneous temples Silsangsa, Borimsa, and Samhwasa. Given that Monk Muyeom studied Hwaeom teachings in his early years and received royal patronage upon his return, it is believed that the retro tendencies of the Hwaeom school, centered on the royal family of the Silla Dynasty, were reflected in Seongjusa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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