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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edia Archaeological Analysis on the Origins of Korean Broadcasting

  • Yoon, Sangkil (Dept. of Media & Communication, Shinhan University)
  • Received : 2022.07.12
  • Accepted : 2022.08.05
  • Published : 2022.08.31

Abstract

This study started with the awareness that the review of the historical origins of Korean broadcasting will be of great significance in exploring the future of Korean broadcasting, and examined the various "origins" of Korean broadcasting - colonial, Cold War, totalitarian, neoliberal. Based on the theoretical background of "media archaeology", the historical 'origin' of Korean broadcasting was applied to track the origin of Hallyu(the Korean Wave) in the 21st century by comprehensively examining the political and economic motives of the time, the state's situational awareness of problems, major broadcasting policies and broadcasting realities. As a result of the study, it came to the tentative conclusion that the historical origin of the Hallyu, which began to be formed in the 1980s, originated from the three origins of Korean broadcasting and the "synthetic mixture" in the subsequent development process.

본 연구는 한국 방송의 역사적 기원들에 대한 검토가 한국 방송의 미래를 모색하는 데에도 큰 의의를 가질 것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한국 방송의 여러 '기원들'(origins) - 식민지적 기원, 냉전적 기원, 전체주의적 기원, 신자유주의적 기원 - 을 검토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미디어 현실에서 출발하면서 그 현실이 세계사와 어떠한 연쇄구조와 단절구조를 가지는지를 파악하려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포스트콜로니얼 역사서술의 입장에서, 단선적으로 미디어역사를 바라보지 않는 대안적인 시각으로 등장한 '미디어고고학'(media archaeology)의 이론적 입장을 채택했다. 이러한 이론적 배경에 입각하여, 한국 방송의 역사적 '기원들'을 당대의 정치경제적 계기와 국가의 상황적 문제의식, 주요 방송정책과 그 방송정책 속애서 전개된 방송현실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이를 21세기 한류의 기원을 추적하는 데 적용했다. 연구결과, 한류의 역사적 기원이 198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 기원이 이후 전개과정에서 한국 방송의 세 기원과 '융합적으로(synthetically) 혼재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잠정적 결론에 도달했다.

Keywords

I. Introduction

2010년대 중반 무렵 넷플릭스(Netflix)를 필두로 본격적으로 글로벌 OTT(Over the Top) 사업자가 한국 방송시장에 진출했다. 한국 방송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던 글로벌 OTT의 영향력은 2020년 초 창궐한 ‘코로나19’를 계기로 급격히 커졌다. 이처럼 글로벌 OTT의 등장은 산업적으로 방송영상 콘텐츠의 유통 및 소비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의미의 방송 개념에 대한 재조정이 요구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방송’(broadcasting)은 행위적 개념으로서, 사전적으로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따위를 통하여 널리 듣고 볼 수 있도록 음성이나 영상을 전파로 내보내는 일’을 의미했다. 이후 유선방송의 등장으로,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유선(有線)으로 행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최근 광대역 통신망의 발전으로 인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방송은 이제 유무선 정보통신시스템으로 진화하고 있다. 즉, 웹(Web) 및 인터넷 응용체계들이 각종 미디어들을 훨씬 공격적인 방식으로 재매개함에 따라, 이제 방송은 광대역 망에 존재하는 행위자(앱)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글로벌한 기술적 추세 속에서 한국의 방송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 갈 것이고 또 어떠한 현실을 낳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방송현실을 한국 사회의 바깥과의 비교를 통한 접근법을 통해 내려질 수도 있겠으나, 지난 90여 년에 걸친 한국 방송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접근법을 통해서도 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개념의 역사를 연구한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은 그의 저작 『지나간 미래』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18세기 중반 이후의 근대에서는 경험공간(과거)과 기대지평(미래)이 분리되는 가운데 새로움이 낡음을 지속적으로 청산하면서 경험은 점점 적어지고 기대는 점점 커진다”[1], 이 언급은 미래의 세계가 현재나 과거의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르리라는 확신 속에서, 시간이 갖는 원칙적 동질성이 파괴되고 시간 구조 속에서 미래가 차지하는 몫이 불균형적으로 커진다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그는 시간에 대한 근대 사회의 편향된 인식구조가 과거로의 회귀를 퇴보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을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지적대 로, “과거는 결코 사장되지 않았으며, 사라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기원으로 되돌아가는 모든 길에 도달한 이 과거는(현재의 우리를) 뒤로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우리를 과거로 몰아붙이는 것은 미래이다”[2].

이러한 역사철학의 인식에 의거하여, 한국 미디어학계에서도 한국 방송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시도가 한국 방송70주년과 80주년을 기념해 두 차례 진행된 바 있다. 1997 년 한국방송학회 주최의 ‘한국방송 70년의 평가와 전망’ 세미나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방송이 등장함으로 인해 기존 지상파 중심의 방송제도가 바뀌고 있고, 글로벌 시대한국 방송의 모든 분야에서 근본적인 변혁이 요구되고 있음이 제기되었다[3]. 또한 2007년에는 한국언론학회 역사분과 주최로 ‘한국 방송 80주년’ 세미나가 개최되어 일제강점기 방송이 집중적으로 검토된 바 있다[4]. 그렇지만 한국 방송역사의 주요 국면에 주로 초점을 두었던 탓에 통시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한국 사회에서 가지는 방송의의미에 대한 탐색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제 앞으로 5년 뒤인 2027년이 되면 한국 방송의 연령이 100세를 맞게 되는 시점에서. 과거 한국 사회에서 방송이 갖는 의미에 대한 재조명이 한국 방송의 미래지향적인 발전 방향에 대한 모색에도 큰 의의를 가질 것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에 본 연구는 거시적으로는 포스트식민주의적인 역사서술과 미디어고고학의 시각에서 한국 방송의 여러 ‘기원들’(origins)을 검토하고자 하며, 미시적으로는 각각의 기원에서 당시 방송정책의 주체였던 국가가 가졌던 상황적 문제의식과 그 문제의식의 발현으로서 수립·시행되었던 방송정책, 그리고 그 방송정책이 낳은 주요 방송현실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II. Theoretical Background

1. Origin and ‘Broadcasting as a Complex’

흔히 기원(起源, origin)은 통상적으로 ‘사물이 생긴 근원’이나 ‘새로운 사물이나 현상이 생겨나는 출발점’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사전적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한국 방송의 기원’이라 함은 한반도라는 지리적 영토에 기반을 둔 국민국가에 방송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생겨난 근원 혹은 출발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 방송의 기원은 그 서술의 바탕이 되는 근본적인 가정으로서 ‘방송’의 필연성을 전제로 하는 만큼 전제로 하고 있는 방송 개념의 범주에 따라, 그리고 ‘새로운 현상이 생겨난 근원이나 출발점’이라는 어의에서 그 ‘새로움’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따라, 또 그 밖에도 한국사를 바라다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새로움’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한국사에 대한 관점은 매우 다양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기존 ‘방송’ 개념의 범주를 살펴본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방송은, 제작자에 의해 제작된 일련의 영상콘텐츠들이 시간적으로 선형적인 방식으로 편성되어 유무선의 전송수단과 TV스크린을 통해 주로 가족 단위의 수용자에게 소비되는 ‘전형적인 묶음’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즉, 방송의 범주를 특정한 ‘테크놀로지와 제도, 편 성, 장르 등의 복합체’로 이해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전형적인 묶음’의 큰 틀은 전반적으로는 거의 변화하지 않았으나, 세부적으로는 다소간의 분화와 확장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우선 콘텐츠 생산에 있어서는 과거의 방송콘텐츠들이 주로 방송사에 의해 제작되었던 것이 이제는 그 제작 주체가 독립프로덕션 등으로 다변화되었고, 기존 무선전파에 의존하던 것이 케이블(유선) 등으로 다변화되었다. 이에 따라, 케이블을 전송수단으로 한 방송 형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인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유선방송은 방송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후 방송의 범주 안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확산에 따라 최근 등장한 OTT 서비스는 기존의 방송 개념 범주에 근거하였던 방송이 스스로 문화적으로 자신을 다시 정의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위기’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5]. [그림 1]은 테크놀로지와 산업, 그리고 콘텐츠 생산의 측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21세기 영상콘텐츠 산업생태계의 변화를 요약한 것인데, 빨간 색 원으로 표기한 부분은 ‘방송’영상콘텐츠의 전형적인 ‘묶음’, 즉 ‘가족단위-TV스크린-선형편성-광고BM-방송사업자’의 묶음이 해체되고 다시 묶이는 과정을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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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 Changes in the Audio-Visual Contents Industry Ecosystem in 21C

이와 같이 방송을 테크놀로지, 제도, 편성, 장르 등의 특정한 복합체로 이해할 경우, 방송 영역은 그 형성 속도나 양상이 특수한 역사적 경험 속에 구성되어 왔기 때문에, 한국 방송의 기원은 어느 한 시점 혹은 정해진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 수 없다고 할 수 있다[6].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 방송의 ‘기원’을 단일한 것으로 상정하게 접근하기 보다는 ‘복수의 기원’을 상정해 접근하는 것이 현재의 방송을 제대로 이해하고 방송의 미래지향적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데에도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2. Multiple Origins of Korean Broadcasting, Postcolonial Historiography, and Media Archaelogy

방송을 ‘테크놀로지-제도-편성-장르 등의 특정한 묶음관계’라고 이해할 때, 이 묶음관계의 주요 항목들을 기준으로 하여 한국 방송의 기원을 여러 지점으로 설정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 방송의 기원이 형성되는 데 있어서는 대체로 ‘기술적 계기’와 ‘정치경제적 계기’가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기술적 계기는 ‘라디오’, ‘TV’, ‘다채널 기술’, ‘디지털 기술’ 등을 생각할 수 있고, ‘정치경제적 계기’는 당대 세계질서의 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그 기술적 계기를 도입하여 제도적으로 적용시키려 했던 정치/경제권력의 의도 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한국 방송의 기원과 관련된 한국 학계의 연구 성과를 기준으로 하자면, 이 두 가지 계기를 기준으로 하여 대체로 3,4가지의 기원이 제시된 바 있었다. 첫 번째는 식민지적 기원으로, 일제강점기 경성방송국(JODK)를 한국 방송사의 기점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고, 두 번째는 광복이후 전 세계적 냉전질서와 한국의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영향을 강조하는 냉전적/전체주의적 기원이제기된 바 있으며, 세 번째는 최근 제기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기원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한국 방송의 여러 기원들이 현재의 방송현실과 가지는 연관관계를 어떠한 이론적 틀로 이해하는가의 문제이다. 단순히 한국 방송의 역사를 서구적 근대성이 비서구로 확장되는 과정으로 이해함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한국 방송이 서구에 그 기원을 둔 ‘하나의 뿌리’로부터 진전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과거와 현재 한국사회에서 발현되었던 특수한 역사적 경험들을 시야에서놓치는 과오를 범할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한국 방송의 기원들을 조망하는 새로운 시각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가 현재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서구 중심적 자본주의 질서는 ‘근대성의 어두운 이면’이라 할 수 있는 식민성(즉, 서구 식민주의의 기저에 깔린 논리)에 근거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7].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와 같은 서구 중심적인 자본주의 원리에 입각해 작동되고 있는 현재의 미디어체계를 상대화하고 문제화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 대안적인 이론 틀을 통해 내려질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식민성의 문제에 대해 전면적으로 이의제기하는 학문 분야인 포스트식민주의 이론 (post-colonialism theory 을 통해 유효한 대답이 내려질 수 있다. 특히, 포스트식민주의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 하나의 통일되고 일관된 ‘발전과정’으로 이해하는 역사주의의 ‘사유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 역사주의의 사유양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경우, 우리는 역사 자체를 일종의 ‘대기실’과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되고, 무의식 중에 서구적 근대성이라는 준거를 상정함으로써 우리의 (미디어)현실을 어떤 ‘결여’, 어떤 ‘부재’, 어떤 ‘미완’(未完)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과오(過誤)를범하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8].

따라서 (방송이라는 새로운 외래의 미디어가 이식되었던 한국적 조건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시각은 외부적 시각에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유할 권리를 발휘하여, 한국 사회의 미디어 현실에서 출발하되, 그 현실이 세계사와 어떠한 연쇄구조와 단절구조를 가지는지를 파악하려는 시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한국 방송의 여러 기원들이 현재의 방송현실과 어떠한 연관관계를 가지는지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필요한 시각은 기본적으로 단선적인 역사주의의 관점에서 미디어역사를 바라보지 않는 대안적인 시각으로 등장한 ‘미디어고고 학’(media archaeology)이다.

미디어고고학은 미디어의 교체사(交替史)나 흥망사(興亡 史)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있었던 미디어에 새로운 미디어가 중층화(重層化)되고 있는 과정과 서로 얽히고설키는 상태를 분석해야 하고, 근현대의 지배적인 미디어들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와 그것들에 가려져서 잊혀진 ‘오래된’ 미디어들을 재고찰함으로써 새롭게 떠오르는 미디어 혹은 미디어 전반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분야이다[9]. 매클루언(McLuhan) 식의 다분히 미디어ᐨ기술결정론적 사회변동론보다는 기술ᐨ담론의 공진화적(coᐨevolutionary) 결합 양상에 주목하며, 단일하고 통합적이기보다는 다양한 갈래를 지닌 미디어 계보, 즉 미디어 역사의 다중적이고 분산된 경로를 상정하는 것이 특징이다[10].

미디어고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간적 흐름에 따라 새롭게 추가되는 기원은 기존 기원들과 공존하면서 서로 혼재하는 양상을 보인다고 볼 수 있다. 이론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혼재성을 유형적으로 나눠 보자면, 첫째, ‘잔여적 (residual) 혼재성’은 새롭게 추가되는 기원에 의해 기존의 기원들이 소멸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시적 혼재성이고 둘째, ‘경로의존적(path-dependent) 혼재성’은 새롭게 추가되는 기원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기원에서 비롯된 제도들이 강한 경로의존성을 띠면서 지속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지속적인’ 혼재성이며 셋째, ‘융합적 (synthetic) 혼재성’은 새로운 기원이 기존의 기원에서 비롯된 제도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생하는 혼재성이라 할 수 있다.

III. Analysis on the Origins of Korean Broadcasting

1. ‘Colonial’ Origin of Korean Broadcasting

한국 방송의 시작은 국권이 피탈되었던 일제강점기에 이뤄졌다. 1926년 11월 30일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JODK)이 방송을 개시했다.

1980년대 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의 방송을 한국방송역사에 포함시켜야 할지를 두고 논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방송을 한국방송사에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는 견해는 일본인이 주도했다는 점과 식민지 지배도구였다는 점을 근거로 삼았고[11-12], 반면 미디어 역사학자들은 광복 이후 한국 방송의 인적, 물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을 근거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3-14]. 이러한1980년대 학계의 논쟁은 1990년대 이후 역사학자의 견해로 무게추가 기울어져, 2007년 한국언론학회 역사분과 주최로 개최된 ‘한국 방송 80주년’ 세미나에서 일제강점기 방송이 집중적으로 검토됨으로써 한국 방송의 식민지적 기원이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서구적 근대성의 확장과정에서 ‘서구적 근대성의 어두운 이면’인 ‘식민성’이 발현되었던 세계사의 국면 속에서, 경성방송국의 방송 개시는 기본적으로 일본제국의 상황적문제의식이 발현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제국의 라디오 방송은 처음부터 광역적 미디어로서의 기대를 안고출발한 것이었기 때문에[15], 경성방송국은 ‘일본제국의 방송네트워크’ 확장의 일환으로 이식(移植)된 매체였다. 단적인 예로서, 경성방송국의 호출부호 JODK는 일본이 국제통신연맹(ITU)으로부터 JO를 받은 후 도쿄가 AK, 오사카가 BK, 나고야가 CK로 개국한 다음, 경성방송국이 네 번째로 개국했다는 의미였다[16].

이와 같은 상황적 문제의식에 의거했기 때문에, 설립정책 상 경성방송국은 형식 상 민영방송의 형태이지만, 사실상 관영방송 혹은 국영방송에 불과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경성방송국에 상당한 재정적 지원(창립당시 40만엔 (円), 이후 매년 2만엔 씩의 사업보조금 지원)을 했다[17]. 또한 편성정책에 있어서도, 개국 초기의 방송편성은 한․일어 혼용형태로 이루어졌고 편성비율 3:1에서 그 뒤 3:2 로 일본어 방송의 비율이 높았으며 한국어 방송은 대부분이 공지사항이었고 그밖에는 국악이나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 있었다[18].

특히 방송수신기 보급의 측면에서 볼 때, 초기의 방송현실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수신기의 보급률이 저조했을뿐만 아니라 가입자 또한 저조했기 때문에, 일본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야 할 정도로 경영난이 가중되었던 것이다. 이에 일제는 조선인 가입자의 수요를 높이는 동시에 만주사변 이후 중국의 방송전파를 막아 사상적 이탈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어 방송과 조선어 방송을 병행하는‘이중 방송체제’(1933.4.26.)를 채택했다[19]. [표 1]은 일제강점기 라디오수신기 보급을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나누어 집계한 결과인데, ‘이중 방송체제’가 채택된 이후 조선인의 보급수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여 1940년 무렵 일본인의 보급수를 앞서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Table 1. Registration Count and Penetration Rate of Radio Receiver in Colonial Period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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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방송의 개시로 인해 조선인 가입자가 증가하게 됨에 따라 식민지 방송의 영향과 결과는 보다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양상을 보였고, 식민지의 문화적 근대성 형성을 매개하는 역할까지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시기 방송은 주변적 영역에 남아 있던 전통음악이 발굴되어 민요와 설화가 방송되는 등 ‘전통 창출’의 계기가 되었고, (무성영화를 라디오에 적합하게 변형시킨) ‘방송영화극’(예: 나운규의 <금붕어>)이나 야담(野談)을 비롯하여 많은 연극단체가 새로운 방송문예 장르를 개척하는 등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공간이기도 했다[21].

그렇다면 위와 같은 내용의 한국 방송의 식민지적 기원은 후대에 어떠한 유산을 남겨 놓았는가? 우선 이념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방송을 국가의 ‘선전’ 혹은 ‘공보’ 수단으로 보는 인식 틀이 계승되는 ‘경로의존적 혼재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방송제도적인 측면에서는, 광복 이후 미군정 법령 33호(1945.12.6.)를 통해 미군정이 형식적이나마 사단법인이었던 방송을 사실상의 국영체제로 전환시킴으로써 ‘잔여적 혼재성’의 양상을 보였다. 또한 방송국에 파견된 미군정 정보과 소속의 감독관이 방송 현업을, 그리고 조선방송협회에 파견된 미군정 체신국 소속의 감독관이 기술과 사무 업무를 감독함으로써, 이후 공보부와체신부의 이원적 관리구조가 정착되기 시작되었다. 그리고1961년과 1963년의 유선방송수신관리법 및 방송법 제정 과정, 그리고 1980년대 유선방송관리법 제정 과정 등에이르기까지 공보부와 체신부 간의 갈등이 지속되는 ‘경로의존적 혼재성’의 양상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 방송인력의 측면에서는, ‘이중 방송체제’ 하에서 방송현업 및기술부서에서 근무했던 상당수의 한국인이 미군의 방송국접수 이후 모두 그대로 온존하게 됨으로써, 친일이 청산되지 못했다[22].

종합하자면, 한국 방송의 식민지적 기원은 그 형식적 단절에도 불구하고, 한국 방송의 정체성 전반을 규정하는 ‘후기식민지적’(post-colonial) 징후로 재생산되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23].

2. ‘Cold War’ Origin of Korean Broadcasting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탈(脫)식민이 바로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결정에 의해 한반도는 바로 미국과 소련의 분할 통치에 들어갔고, 점차 편제되기 시작했던 세계의 냉전 체제가 이후 남북분단과 중국내전, 그리고 6.25전쟁을 거치면서 그 중심축을 사실상 아시아와 한반도로 이전시켰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는 세계 냉전질서의 최전선이 되었다. 더구나 세계적인 냉전은 아시아에서는 열전에 의해 강화되는 구조였으며, 그 어느 한 체제로의 편제는 결국 냉전의 사상심리전의 성격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냉전(冷戰, cold war)은열전(熱戰)으로 전화(戰化)되었고, 그 열전과정에서 사상심리전의 본질을 갖는 냉전은 열전의 보완구조였다[24]. 광복 이후 6.25전쟁까지의 이와 같은 정치경제적 조건은 한국 방송의 냉전적 기원이 형성되는 주요한 상황적 문제의식의 토대였다.

광복 이후 한국 방송은 권위주의 정권시기를 거치면서 사실상의 ‘냉전적’ 방송환경을 구축하게 되었다. 먼저 정부수립 직전일인 8월 14일 공보처장 김동성은 군정장관의 양해를 얻어 ‘국가정책 상 부득이’하게 방송국을 다시 공보처로 귀속시킨다는 발표를 함으로써,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인 이승만 정권은 서둘러 방송의 국영화를 단행했다[25]. 이러한 단일한 국영체제는 1954년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인 기독교방송(CBS)이 설립됨으로써 민영과 공존하게 되었지만, 여기서 최초의 민영방송이 미국의 선전방송 수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기독교 계열의 방송이었다는 점은 특기할 사항이었다. 또한 냉전적 방송환경의 구축과정에서 냉전의 주축국가였던 미국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우선 6.25전쟁으로 파괴된 시설 복구에는 미국 경제부흥특별회계의 ICA 자금과 시설 공사비가 투여되었고, 그 결과 건립된 1956년 2대의 대출력 송신소와 그로 인해 가능해진 대출력 방송은 국내외 방송 시간의 증대와 채널 자원의 확보를 가능하게 했다[26]. 뿐만 아니라, 1950년대 후반기에 미국은 ‘기술정보개선’(Improvement of Technical Information Services) 프로젝트를 실행시킴으로써, 시청각미디어를 ‘반공주의를 교육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선전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을 한국에 이식하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1960년대 전반에 이르러 한국 방송은 일반적인 수준에서는 기술적으로 자립했다[27]. (미군정기에 이뤄진 ‘정시방송제'와 일종의 PD시스템의 도입, 미국식 방송드라마 포맷 도입에 덧붙여) 이러한 미국의 방송에 대한 ‘지도와 감독’은 ‘소유’의 측면에서는 방송의 정치적 이용이 용이한 국영의 형태로 하면서 ‘내용’은 미국식상업주의에 치중하는 체제로 성립되게 한 요인이었다[28]. 이처럼 냉전체제 편입에 따라 한국의 방송구조가 냉전적으로 주조되었기 때문에, 1950년대까지도 한국의 방송현실은 사실상 ‘청취자가 없는 방송’과 다를 바 없었다. 6.25전쟁 이전까지 KBS의 일반 방송은 저조를 면치 못하였고, 공산권 선전을 목적으로 개국한 복음주의 방송(HLKX, 이후 극동방송)은 물론, 기독교방송(CBS) 역시 부족한 출력에도 불구하고 ‘남북지향성’ 안테나를 사용하여 북한으로의 방송은 물론 (미국의 대외선전방송인) ‘미국의 소리’(VOA, Voice of America) 방송의 중계방송을 실시하며 ‘선전’방송의 역할을 일정 부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29].

위와 같은 내용의 한국 방송의 ‘냉전적’ 기원은 정책 이념적인 측면에서 방송을 전쟁 수행의 무기로 인식하는 틀이 계승되는 양상으로 이어짐으로써 ‘경로의존적 혼재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제도적 측면에서는, 반공 ‘거구기(巨口機)’ 방송을 위한 국영방송 체제의 유지라는 점에서 ‘잔여적 혼재성’의 양상으로 발현되었다. 또한 해외를 대상으로 한 프로파간다 방송(‘대외방송’)을 위해 1962 년 9월 추가적으로 대출력 송신소인 남양송신소가 건립되고 또 일본 오키나와에 있었던 VOA중계소가 1972년에 이뤄진 오키나와 일본 반환을 계기로 하여 1974년 김제송신소의 건립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는 ‘경로의존적 혼재성’의 양상으로 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합하자면,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맥락 속에서 방송을 ‘전파전쟁을 수행하는 무기’로 인식하고 실제로 대내외적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이승만 정권의 상황적 문제의식에 의해 성립되었던 한국 방송의 냉전적 기원은 대체로 1990년대 초 동서 냉전 해체까지 지속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Totalitarian’ Origin of Korean Broadcasting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지배의 정당성’이매우 취약했기 때문에, 1950년대의 반공주의적 동원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근대주의적 개발주의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동의에 기반한 지배’를 확충하기 위한 전략을 구사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전 시기에 걸쳐 ‘발전주의와 개발주의의 결합’이라는 총체적 관점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총체적인 선전공보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무엇보다 동의 창출의 기반으로서 미디어, 특히 방송을 조직화하는 데 많은 관심을 쏟았다[30]. 이와 같은 박정희 정권의 선전 체계가 (이전시기 이승만 정권의 권위주의적 선전과 달리) ‘전체주의적 면모’를 가지게 된 것은 ‘반공주의’와 ‘발전주의’라는 단일한 국가 문화의 배양을 우선시했다는 점에 있었다.

이와 같은 박정희 정권의 상황적 문제의식 속에서 형성된 한국 방송의 전체주의적 기원은 방송정책적으로 보자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핵심 골자로 했다.

군사정부의 강화된 대내외 선전정책의 주요 골자는 대공(對共)심리전 체제의 강화 및 일원화된 특수선전 기획체제의 확립, 그리고 그 일환으로서의 ‘방송을 통한 반공활동’ 강화책이었다. 그리고 이 정책은 1961년 대외선전방송을 전문으로 하는 서울국제방송국의 발족으로 실현되었다[31].

또한 방송의 전체주의적 지배를 위해 군사정부는 일련의 방송 관련법을 제정했다. 1961년 6월 ‘유선방송수신관리법’, 같은 해 12월 ‘전파관리법’의 공포, 그리고 1964년 1월‘방송법’의 공포 등으로 이어졌고, 1962년 6월 14일에는 명목상 방송의 자율규제기관으로 ‘방송윤리위원회’가 발족했다. 또한 정부의 엄격한 규제 아래서 민영방송사의 지속적인 허가와 설립이 이뤄져, 1961년 12월 문화방송(MBC)과 KBS-TV, 1963년 4월 동아방송(DBS), 1964년 5월 라디오서울(후에 삼성이 인수하여 TBC가 됨), 1964년 12월 민영TV방송으로 동양텔레비전(DTV)의 서울국과 부산국의 개 국, 1965년 서울 FM(후에 TBC FM이 됨) 등이 있었다. 그후 1968~1971년 사이에 MBC-TV의 개국(1969)을 포함하여 여러 지역에 연고를 가진 정치 실세들과 기업인 등이 결합하여 대폭적으로 지역민방 허가가 이뤄졌다[32].

한편, 4.19혁명 이후 성황을 이루었던 ‘민영(民營) 앰프촌’에서 기존 마을단위의 유선라디오 방송이 가진 공보적 (公報的) 활용가능성을 인식한 박정희 정권은 유선라디오를 라디오수신기 보급률이 저조한 농촌 지역의 공보방송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더 나아가 1960년대 중반기에 이르면 경제개발을 위한 미디어의 효율적 활용이라는 ‘발전커뮤니케이션의 비전’ 아래, ‘유선방송 일원화사업’을 통해유선라디오 방송을 정부의 공보방송망에 편입시키기도 했 다[33].

지금까지 살펴본 바처럼 1960,70년대 한국 미디어정경(mediascape)에서는 라디오, TV, 그리고 1960년대 중반까지도 ‘방송’의 범주에 들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유선라디오와 중계유선TV 등 다양한 형태의 방송미디어들이 등장하였지만, 일부 오락프로그램과 외화프로그램, 음악프로그램을 제외하곤 시·청취자에게 풍부한 방송콘텐츠를 제공해주는 못했다. 홍보에 역점을 둔 공보 방송망에 편입되었던 농촌 지역과 난시청 지역의 방송은 더더욱 그러했다. TV방송의 경우, 비록 1969년 MBC-TV의 개국으로 인해 시청자가 시청할 수 있는 채널 수가 3개로 늘어남으로써 어느 정도 시청자의 채널선택권이 높아지긴 하였지만, 1970년대 텔레비전 방송의 편성이 종일편성이 아니었던 탓에 당시 시청자들은 방송국이 정해놓은 시간대에만 TV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충족되지 못한 시청자들의 다양한 TV프로그램에 대한 욕구는 (1960년대 이후 꾸준히 방송시간을 늘리고 가시청권을 넓힘으로써 사실상 전국망을 갖춘 TV방송국이 되었던) AFKN-TV와 남한 국경을 넘어서 유입되는 일본TV방송을 통해 해소되었다. 특히 “일본 열도와 가까운 부산 등지의 남해안은 1960년대 초반기부터 일본TV방송이 선명하게 수신되는 사실상 일본TV방송의 방송권역이나 다를 바 없었다”[34]. 이렇듯 1960,70년대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 의해 계기 지워진 전체주의적인 한국 미디어정경은 전파월경(電波越境)이라는 틈새로부터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총체적 선전을 위한 방송의 ‘공보적 활용’과 상업주의적 방송의 공존으로 요약할 수 있는, 한국 방송의 ‘전체주의적’ 기원은 방송정책이념과 제도, 수용적 측면에서 이후 한국 방송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정책이념적 측면에서는 방송을 사상적 이탈을 막아 ‘봉쇄’하는 수단으로 인식하는 틀이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경로의존적 혼재성’의 양상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방송제도적 측면에서 보자면, 군사쿠데타를 통한 집권이라는 예외적 상황 속에서 방송관련 법이 입법화되는 절차적 정당성 부족이 1980 년 언론기본법 제정까지 지속되었다는 측면에서는 ‘잔여적 혼재성’, 그리고 군사정부에 의해 공보적 용도로 재편된 유선라디오 방송이 1980년대 말까지 공보행정용 유선TV 방송으로 지속되었다는 점에서는 ‘잔여적 혼재성’의 양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수용적 측면에서 보 자면, 지상파 방송 중심으로 방송 제도를 운영하면서 다채널 매체에 대해선 철저하게 진입 통제하는 억압적 군사정권의 방송정책은 수용자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대한 욕구를 자극함으로써 방송 수용자를 전파월경이나 유선비디오방송 등의 비공식적 미디어시장으로 이탈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는 점[35]에서, ‘융합적 혼재성’의 양상을 뚜렷이 보여준다.

종합하자면, 냉전적 세계질서를 배후 요인으로 하여 박정희 정권에 의해 형성되었던 한국 방송의 전체주의적 기원은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서서히 그 영향력이 감소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수용적 측면에서 나타난 ‘비공식적 미디어시장으로의 이탈’이라는 융합적 혼재성은 198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정치경제적 힘에 의해 상당기간 유지되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4. ‘Neoliberalistic’ Origin of Korean Broadcasting

명시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기원’을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학계에서 한국 방송의 신자유주의적 기원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90년대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단적인 예로, 1997년 한국방송학회 주최의 ‘한국방송 70년의 평가와 전망’ 세미나에서는, 1995년 케이블TV의 개시 및 위성방송 발사 등으로 기존 지상파 중심의 방송제도가 바뀌고 있고, 글로벌 시대 한국 방송의 법과 제도, 산업구조, 내용과 편성, 그리고 수용영역 등 모든 분야에서 근본적인 변혁이 요구되고 있음이 제기된 바 있다[36].

1980년대 한국 사회는 과거와 뚜렷이 구별되는 하나의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유신정권의 붕괴 이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기본적인 정책기조는 기존의 대외지향적 축적구조를 유지하는 가운데, 합리화를 통해 독점 자본에 좀 더 ‘건전한’ 축적기반을 마련하게 함으로써 국제경쟁력을 제고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기조의 변화 이면에는 1980년 미국 레이건 정부의 출범 이후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소위 신자유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전 세계적인 시장통합과 개방의 흐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37]. 이와 같이 198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전 세계적인 시장통합과 개방의 흐름은 문화시장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일본에 의해 개발되어 1980년대 말까지 활발하게 세계시장에 수출되었던 새로운 소비자용 매체기술(비디오 기기, 워크맨, 비디오테이프 등)의 탄생은 미디어 텍스트를 소비하는 시공간을 확장하고 이동하면서 다양한 정보와 이미지가 국경을 넘어 유통되는 것을 촉진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 공간의 자본화를 가속화시키고 있었다[38].

비록 민주화 이전 시기 한국 사회가 본격적으로 ‘문화적세계화’의 흐름에 편입된 것은 아니지만, ‘문화적 세계화’를 이끄는 핵심적 미디어 테크놀로지인 VCR(Video Cassette Recorder)과 카세트테이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전 시기의 ‘전체주의적 방송통제의 관성’을 지니고 있었던 당시 정치권력으로선, 1970년대 말 VTR과 카세트테이프의 도입 이후 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미디어 해적행위’(media piracy)가 점차 일반화되는 현상은 기존 전체주의적 미디어체계를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좌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당시의 전세계적인 시장통합과 개방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당시 방송정책 당국은 1980년 방송통폐합과 1981년 음반법 개정, 1986년 유선방송관리법 제정을 통해 방송을 전체주의적으로 통제하고자 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 방송의 신자유주의적 기원이 형성되는 데 있어서 시초적인 계기는 무엇보다 1987년 정치적 민주화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1988년에 기독교방송이 보도방송을 재개했고, 1990년의 방송구조 개편을 통해 민간 상업방송이 신설되어 1991년에는 서울방송 SBS-TV가, 그 이후 1990 년에 들어 평화방송, 불교방송, 교통방송 등의 특수방송들이 출현했다. 이러한 방송제도의 변화는 공영을 토대로 하던 제도를 상업 방송을 허용하는 구조로 전환시킴으로써 방송사들 간에도 치열한 경쟁을 유발했다[39]. 또한 1990 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는 ‘다매체 다채널 시대’로 진입하였는데, 1995년에는 케이블방송이, 2002년에는 위성방송이 시작되었다. 1994년에는 전국 4대 광역시에 지역 민방이 출범하기도 했다. 나아가 2010년을 전후로 하여, 방송과 통신이 융합하면서 다양한 기능을 갖춘 DMB나 IPTV 같은 새로운 미디어가 속속 등장했다[40].

그렇지만 한국 방송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에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87년에 이뤄진 저작권시장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1987년에 이뤄진 저작권시장 개방은 한국의 방송체계가 저작권 법률체계를 근간으로 한 새로운 글로벌 자본주의 통제패러다임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1987년에 동시적으로 진행된 두 계기, 즉 국내적으로는 정치적 민주화, 대외적으로는 저작권 시장개방은 방송체계에 대한 국가의 대응방식을 크게 변화시켰고, 그동안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시행되었던, 규제를 목적으로 했던 문화정책은 육성 목적의 산업정책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보편적인 권한으로서 문화를 생산하고 즐길 수 있는 문화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고, 1993 년 우루과이라운드(UR)에서 서비스 교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타결되는 등 문화시장 개방이 확대되면서 산업으로서의 문화에 대한 정책이념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1997년 외환위기는 문화산업 정책이념, 제도, 정책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킨 역사적 계기로 작동했다[41].

이와 같은 한국 방송의 ‘신자유주의적’ 기원은 방송정책이념과 제도, 수용적 측면에서 21세기 한국 방송의 현실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방송이념적 측면에서 방송을 산업으로 인식하는 틀이 등장한 이후, 이 경제주의적 인식 틀은 현재 한국 방송을 이해하는 주류적인 시각으로 정착되었다. 뿐만 아니라 방송제도적인 측면에서는 방송통폐합을 통해 방송 사업에 대한 진출이 차단되었던 기업 자본들이 정치적 민주화 이후 다채널 방송매체의 등장을 계기로 콘텐츠산업(프로그램 프로덕션 산업)을 필두로 활발하게 방송 산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문화 및 관련 산업의 향상발전에 강화할 목적으로 2006 년 12월 국내 저작권법을 전문 개정했다. 이에 따라 국가의 역할도 방송영역에서의 이해관계 갈등을 조정하는 ‘갈등조정자’로서 재조정되고 있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수용적인 측면에서는, 2000년 무렵부터 일부 아시아국가에서 한국방송콘텐츠에 대한 선호가 시작된 이후 일본시장으로의 진출이 본격적으로 경제적 성과를 내기 시작했고[42], 코로나 19 팬데믹의 국면에서 글로벌 OTT가 기존 방송시장에 더큰 위력을 발휘하는 조건 속에서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오징어게임’은 방송 한류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아프리카와 인도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분야인 ‘포스트식민주의적 해적 연구’(postcolonial piracy studies)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새로운 통제시스템인 저작권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복사 문화’(cultures of the copy)가 그동안 ‘근대성의 상상’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을 이 네트워크에 편입할 수 있는 접근 통로라고 본다. 그리고 1970년대카세트테이프와 1980년대 비디오테이프와 같은 새로운 접근 통로들은 사용자의 소비, 생산, 공유, 재생산까지 허용하고 그것의 확산을 제약하는 시도를 점차 어렵게 만듦으로써 미디어콘텐츠의 확산 속도를 가속화시킨다고 평가하고 있다[43]. 결국 포스트식민주의적 관점에서는 매우 이질적인 문화적 실천이라 할 수 있는 ‘미디어 해적행위’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논리에 필수적으로 연결되었단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실천이 로컬한 역사와 인식 틀에 의해 언제나 잠재적 타협으로 굴절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자 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44].

이러한 견지에서 보자면,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으로 방송을 통제하였던 한국 방송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문화적 세계화의 핵심동력이었던) 카세트테이프와 VTR이 기존 방송체제에 야기한 균열과 틈새는 글로벌한 자본주의 논리와 잠재적으로 타협한 결과이자, 또 다른 의미에서는 방송콘텐츠의 창조성이 발현되는 원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프랑스 학자의 지적대로) 21세기 전 세계적인한류 붐의 원동력은 어찌 보면 신자유주의적 기원 속에서 나타난 ‘미디어 해적행위’의 문화적 힘이 저작권법의 강화를 계기로 억압적으로 전환된 결과일지도 모른다[45].

IV. Conclusions

한국 방송 100주년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본 연구는 한국 방송의 역사적 기원들에 대한 재조명이 한국 방송의 미래지향적인 발전 방향에 대한 모색에도 큰 의의를 가질 것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포스트식민주의적인 역사서술과 미디어고고학의 시각에서 한국 방송의 여러 ‘기원들’ - 식민지적 기원, 냉전적 기원, 전체주의적 기원, 신자유주의적 기원 - 을 당대의 정치경제적 계기와 국가의 상황적 문제의식, 주요 방송정책과 그 방송정책 속애서 전개된 방송현실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미디어고고학의 문제의식을 살려 각 기원들의 주요 내용을 키워드로 정리하면, [그림2]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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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Media Archaeology and Origins of Korean Broadcasting

본고의 한국 방송의 ‘기원들’에 대한 미디어고고학적 분석결과에 따르면, 식민지적 기원은 ‘서구적 근대성의 지리적 확장’이라는 세계사적 변화 국면 속에서 한국 방송이 일본 제국주의의 필요성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부분적으로 ‘식민지적 근대성’(colonial modernities)이 실현되는 통로로 기능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 형식적 단절에도 불구하고, 한국 방송의 정체성 전반을 규정하는 ‘후기식민지적’ 징후로 재생산되어 작용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광복 이후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맥락 속에서 방송을 ‘전파전쟁을 수행하는 무기’로 인식하고자 한 상황적 문제의식에 의해 한국 방송의 ‘냉전적’ 기원이 형성되었고, 그 영향력은 ‘경로의존적 혼재성’의 양상으로 동서 냉전 해체까지 지속된 것으로 분석되었다. 뿐만 아니라, 냉전적 기원과 일정부분 연계된 기원으로서 ‘반공주의’와 ‘발전주의’라는 단일한 국가 문화의 배양을 우선시했던 한국 방송의 ‘전체주의적 기원’은 사상적 이탈의 봉쇄와 경제발전을 위해 방송을 ‘공보적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상업주의적 방송 또한 허용하는 양상으로 나타났고, 그 모순적 양상은 비디오 등과 같은 새로운 소비자용 매체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수용자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대한 욕구를 자극함으로써 방송 수용자를 전파월경이나 유선비디오방송 등의 비공식적 미디어시장으로 이탈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송 수용자의 비공식적 미디어시장으로의 이탈이라는 융합적 혼재성의 양상은 1980년대 전 세계적인 시장통합과 개방의 흐름에 부합하여 1987년에 동시적으로 진행된 두 계기인 정치적 민주화와 저작권 시장개방을 통해 형성되었던 ‘신자유주의적 기원’으로 새롭게 통합되기 시작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미디어고고학적인 시각에서 검토한 한국 방송의 다양한 기원들은 매우 복합적인 양상들로 전개되었고, 아직도 한국 방송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자면, ‘방송 한류’의 역사적 기원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적 기원이 이후 전개과정에서 앞선 한국 방송의 세 기원과 ‘융합적으로(synthetically) 혼재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잠정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본고의 결론은 그야말로 잠정적인 결론에 불과하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앞으로 본 연구의 결과가 한국 방송의 미래지향적인 발전방향에 대한 학계의 논의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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