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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무용의 역사적 변천과 작품 경향

A Study on the Historical Changes and Trends in the Dance of Ethnic Koreans in China

  • 조영 (경희대학교 공연예술학과) ;
  • 윤미라 (경희대학교 공연예술학과)
  • 투고 : 2022.04.29
  • 심사 : 2022.06.23
  • 발행 : 2022.07.28

초록

중국 조선족 무용은 원형 그대로 전해 내려왔으며, 간혹 인명 또는 지명들이 바뀌면서 일부 무용들이 약간의 변화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한민족의 뿌리에 바탕을 두고 발전시킨 창작무용이다. 따라서 그 유산에는 한민족의 고유한 심리와 정서, 예술적 기호, 창조적 재능이 배어있으면서도 조선족만의 역사와 생활이 반영되어 있는 독특한 형태의 무용예술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조선족 무용의 역사적 변천과 시대별 대표작품들을 통해 조선족 무용의 정체성을 알아보았으며, 한민족의 뿌리를 지니고 있는 조선족무용의 특성을 알아보면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하여 정체성 확립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본 연구는 문헌들을 바탕으로 조선족 무용의 개념 및 형성과정을 파악하여 조선족 무용사를 4개의 시기로 구분하여 각 시기별 대표작품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에 본 연구는 중국 조선족 무용은 단순한 춤이 아닌 중국 조선족 무용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지키는 것이 현시대에 가장 큰 과업이 아닐까 사료된다.

Chinese Korean dance has been handed down in its original form, and some of the dances have changed slightly due to changes in the names of people or places, but it is a creative dance developed based on the roots of the Korean people. Therefore, it is a unique form of dance art that reflects the history and life of the ethnic Koreans while imbuing the unique psychology, emotions, artistic symbols, and creative talents of the Korean people. In this study, however, it is most important to identify the identity of Korean dance through historical changes in Korean dance and representative works by period, and to increase awareness by examining the characteristics of Korean dance. Therefore, based on the literature, this study will understand the concept and formation process of Korean dance, and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presentative works of each period by dividing the history of Korean dance into four periods. On the other hand, this study suggests that the biggest challenge of the present era is not to establish and protect the identity of Chinese Korean dance, rather than simple dance.

키워드

l. 서론

중국의 조선족은 조선반도로부터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이주하여 온 재중 한인 디아스포라로, 그 뿌리를 한반도에 두고 있다. 과거 봉건시대 통치자들의 부패와 무능, 인민들에 대한 학대로 인해 조선변방의 일부 농민들이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동북지방으로의 이주가 더욱 빈번해지며 새로운 삶의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조선족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한민족과의 상당한 동질감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족 무용은 원형 그대로 전해 내려왔으며, 간혹 인명 또는 지명들이 바뀌면서 일부 무용들이 약간의 변화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한민족의 뿌리에 바탕을 두고 발전시킨 창작무용이다[1]. 따라서 그 유산에는 한민족의 고유한 심리와 정서, 예술적 기호 그리고 창조적 슬기와 재능이 배어있으면서도, 조선족만의 역사와 생활이 반영되어 있는 독특한 형태의 무용예술이다. 또한, 조선족 무용은 오랫동안 한자권 속에 속해 있으면서도 한반도의 사회발전에도 영향을 받았으며,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지리적 환경 및 생활특성에 맞는 생존방식이 깊이 스며져 있다. 중국은 여러 민족과의 교류를 통해 독특하고, 고유한 예술양식을 탄생시켰다. 전통문화의 계속적인 발전과 계승을 위해서는 정체성의 확립이 중요하고 서양을 비롯한 타문화 무용의 수용이 다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 무분별한 타문화의 수용으로 본래의 전통문화 본질이 흔들리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중국 조선족 무용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조선족 무용이 어떠한 역사적 기반을 바탕으로 현재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중국 조선족 무용의 뿌리, 즉 정체성을 명확히 이해한 후에 타문화를 수용하면, 춤의 본질이 흐려지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고 무용수도 작품구성을 하는데 중국 조선족만의 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데 더욱 도움이될 것으로 보여 진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이후 조선은 외세(外勢)의 영향과 함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대립으로 인하여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으며, 현재까지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극명한 체제 대립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 간의 이념적 대립 속에서 상대적 우위를 획득하고자 지속적인 경쟁을 보 이면서도, 민족 통합의 염원을 소망하는 이율배반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에 남한과 북한의 문화와 예술은 이질적이면서도 동질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하고, 징은 무용에서도 극명하게 보여 진다. 남한의 무용은 전통무용의 표현기법을 새롭게 수용하여 재창조하였으며무용공연을 위한 극장 시설을 만들고, 음악선정에 있어서도 작품에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하여 무용작품의 표현적 확장을 이끌어 냈다. 반면 북한의 무용은 중국의 민속무용과 러시아의 발레와 같은 외국무용을 수용하여 무용의 기교에 중점을 두어 사회주의 이념을 절도 있는 동작 등으로 나타내는 움직임이 돋보였다.

한편 중국의 조선족은 역사상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한인들이 중국에 정착하여, 중국 사회에서의술이 지향하는 방향과 일치하는 주제로 무용이 창작되었다. 특히 최승희 무용체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중국의 타민족 및 구소련을 비롯한 외국 무용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양한 무용의 수용을 통해 조선족 특유의 전통적인 생활방식 등을 가미하여 민족적이면서도 향토적인 특징이 나타나며, 애국주의와 민족단결의 주제를 바탕으로 발전되어 왔다.

조선족은 자신들만의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 및 발전시키며 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최근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중심으로 동북 3성(요녕성, 흑룡강성, 길림성)에 거주하던 약 200만 명의 조선족 가운데, 상당수가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떠나고, 남아있는 조선족 역시 중국의 경제발전에 따라 타주로 이주하여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 비율이 약 30%대로 떨어지게 되었다[2].

이에 본 연구에서는 중국 조선족 무용의 개념 및 형성과정을 파악하여 주요 역사적 사건을 기점으로 조선족 작품을 분석하여 시기별 무용의 특징을 알아보고자 한다. 연구방법은 선행연구 분석을 통한 해석이 주를 이루어 조선족 무용의 개념정의를 실시하고 무용사의 시기를 4단계(형성시기, 발전시기, 이변시기, 전환시기)로 구분하여 각 단계별 무용수 또는 대표작품을 선정한 뒤 중국 조선족 무용의 역사 및 형성과정을 파악하여 중국 조선족 무용의 근간을 알아보았다.

Ⅱ. 본론

1. 중국 조선족무용의 개념

1928년 7월 9일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 대표회의에서 통과된 「민족문제에 관한 결의문」에서 조선민족을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인정했다는 것을 최초로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이후의 문서에서도 동일하게 중국 조선민족을 중국 소수민족으로 명시하고 있다. 다만 민족의 명칭을 고려인' 한국인' 조선인' 등으로 사용하였다.

조선민족의 이주가 집중되던 시기에 동북지역은 중화민국정부에 귀속되는 동북군벌정권에 의해 지배되었 고, 해당 행정기관은 조선민족을 중국 소수민족으로 불인정하여 외국 거류민으로 취급하였다. 1945년 항일전쟁승리 후, 절반에 가까운 조선인이 자의에 의해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가, 귀국하는 사람들과 남아있을 사람들이 완전히 구분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공산당 중앙동북국은 그 당시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 민족을 '한류 거주민', '조선인'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민현장에 남아 영주할 결심을 한 조선족구성원들은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제공 받았고, 지방정권수립에 참여하여 참정권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조선인'에서 '조선족'으로 점차 탈바꿈하게 되었다.

후에 1950~1954년 사이에 중국정부는 제1차 민족식별작업을 실시하였으며, 문화인류학적 이론에 따라40여 민족의 족속(族屬)과 민족성분을 확인했고, 민족명칭을 규범화 했다. 즉 민족명칭 뒤에 족(族)'으로 '인(시)'을 대체하여 중국국민을 분류했다. 규범화된 민족명칭은 족(族)'이 붙으면서 국민 아이텐티티와 민족 아이텐티티가 함께 내포된 명칭으로 되었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30여개의 과계민족(時界民族)이 있는 데, 중국내의 민족은 'Oㅇ족'으로, 그리고 국경선 밖에있는 그들 겨레는 'ㅇㅇ인'으로 규범화되었다[3].

아직도 '조선족'이란 호칭을 조선민족'의 약칭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나 정확히 말한다면 조선족이란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에 대한 전문호칭, 즉국적과 민족의 출신을 동시에 표시한 호칭이다.

중국 조선족 무용 문화는 한반도의 무용 문화를 기본 토대로 한 이질문화권과 중국 정치체제 속에서 독창적인 길을 걸었다. 중국 공산당의 영도 아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 속에서 한민족의 고유의 정서를 쪽박에 담아 중국 땅에 전파하였다. 또한 한민족의 고유한 심리와 정서, 예술적 기호와 창조적 슬기와 재능을 새로운 환경에 적용하여 자체적인 무용예술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오늘날의 조선족 무용은 중국의 역사와 정치적 배경, 그리고 투쟁의 현장과 민족 생활양식이 반영된 독특한 형태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즉 한민족의 고유한 움직임의 멋이 일맥상통하면서도 특유의 색채와 향기가 있는 무용예술이 되었다.

2. 중국 조선족무용의 형성개념

중국은 통일된 다민족(56개 민족)의 사회주의국가로, 각 민족은 모두 자기민족의 생활양식과 풍속습관을 갖고 있다. 중국 조선족은 본래의 전통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중국 사회와 문화에 대한 적응을 시도하였으며, 한반도 문화와는 구별되는 조선족 특유의 문화를 생성할 수 있었고, 이러한 새로운 문화는 민속놀이, 무용, 음악 등 다방면의 예술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족은 가무를 즐겨하는 낙천적인 민족으로 다양한 문화활동이 존재하였다. 조선족에는 고래(古來)로부터 다양한 민속놀이를 즐겨왔는데, 그 민속놀이는 농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공동체 구성원들 간에 친목과 유대를 다지는 목적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처럼 조선족의 오락문화는 즉흥적이고, 격식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자유분방 한 것으로 전통적이며, 서민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농사를 지으며 힘든 일이나 즐거운 일이 있을 경우 의례적으로 농악을 치게 되었는데, 이 놀이의 구성은 노래와 춤이 동반되었다. 따라서 농악무는 조선족이 중국에 이주하며 가장 널리 보급된 무용형태라 할 수 있다.

반면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전통춤에 타민족 및 외국무용의 수용이 이루어졌으며, 대표적으로 최승희의 무용체계는 새로운 형태의 전통무용을 선보였다. 발레가 지니고 있는 서양적인 기법을 전통무용에 접목시켰는데, 마치 중국의 경극과도 같은 상징적이며 과장된 형태로 보여 졌다.

또한, 최승희는 1944년 북경의 북해부근에 '동방무용연구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와 예술양식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중국고전무용의체계를 정립하였다. 중국 조선족 무용은 중국의 고전무용이 최승희 무용과 결합하면서 신중국무용의 형태로 탄생하기 시작하고 후에 개혁·개방이란 역사적인 대변혁 속에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는 새로운 문화를 자기 특성에 맞게 수용하여 창작에 대한 표현 형식의 변화를 주려는 노력이 강하게 나타났다. 조선족의 새로운 역사 시대의 생활과 새로운 무용문화의 수용작업으로 발전하면서 오늘에 이르러서는 예술적 문화를 창조하였다.

3. 중국 조선족무용의 변천과정 및 시기별 대표작품

3.1 조선족무용문화의 형성시기(이주시기~1949년)

중국에 이주한 날부터 해방의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은근과 끈기에 의한 투쟁의 결과들이 이어져왔으며, 이러한 역사 속에서 꽃 피워온 조선족 무용문화는 조선족의 생활양식과 투쟁의 현장이 고스란히 반영되며 그자체로 보존과 계승, 발전이 이어져 왔다. 중국 동북지방의 척박한 농촌에 정착하여 개척의 생활을 시작한 조선족은 강렬한 생존의식을 동반하였고 그들의 민간·민속무용에는 강한 삶의 정신이 담겨져 있었다. 당시에 중국으로 이주를 시작한 조선족들은 한반도의 문화와 중국 본토의 문화의 흡수와 충돌을 겪었다. 상이한 두 문화를 겪으며 조선족은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져온 한반도의 문화와 중국의 문화를 융합하여 조선족 문화라는 새로운 문화를 중국 본토에 뿌리내렸다[4]. 또한 조선족들은 이주 시점부터 중국에서 한반도의 민속무용을 널리 알렸다. 조선으로부터 익혀온 본래의 춤의 형태를 보존하고 전파하였으며, 이것은 조선족들이 집거한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시행되었다. 조선 반도의 민간예인들 역시 중국 내 조선족 밀집지역으로 다수 합류되어 조선의 민속무용들의 다양한 유형들이 혼합되어 새로운 공연형태를 보이게 되었다. 그 당시 대표적인 민간 춤들은 농악춤, 탈춤, 아박춤, 학춤, 수박춤, 삼삼이춤, 접시춤 등이 있으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때 추어진 춤이다. 그러나 단순히 놀이나 오락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았으며, 조선족으로서의 개척정신, 단결의 의지 등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 뿐 아니라 토지개혁, 전선지원 등과 같은 정치적 동참의 역할도 함께 보여 졌다.

1910년 한일합병'이후 조선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 일본의 가혹한 통치 속에 격렬한항거를 시행한 조선은 부분적으로 반일전사들이 동북간도로 이동하여 투쟁을 실시하였다. 1920년 비로서간도에 반일무장대와 독립군 대오가 나타나 일본군에 막대한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무용들을 살펴보면 가무 단심줄' 총춤' 곤봉춤', 재봉대원춤', 가병대춤', 붉은 수건춤', 붉은 봄 돌아왔네', 산 딸기춤', 총동원가춤', 경축대 최종곡 무장춤', '근거지 의춤' 등이 있으며, 혁명 전쟁시기에 활발히 전개된 무용의 창작활동과 공연활동을 토대로, 재능있는 무용인재들이 다수 등장하였다. 또한 무용공연을 할수 있는 공간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이러한 공간을 중심으로 조선족의 무용창작활동와 공연활동은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항일무장투쟁과 인민무장대내 예술문화활동은 중국 조선족 예술문화가 향후 중국 조선족 예술의 도약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 항일전쟁 이후 대군문공단의 설립으로 조선족들은 직업예술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이시기에 탄생한 작품들은 기존의 즉흥적인 창작양식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예술창작의 정형성을 연구하기 시 하였다. 항일 무장대원은 혁명적인 문예인들의 산실 이었으며, 전투로 향한 행군노정과 전투를 마친 후의 휴식터나 숙영지는 전사들은 위한 훌륭한 공연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전투의 승리 시에는 가장 활기가 넘치는 대중적인 춤판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중국내에서 실시된 외국 예술가들의 공연은 중국 조선족 가무단체를 비롯한 예술영역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술무용이 극장 무용예술로 확대되었고, 수많은 관객을 끌어들여 예술의 확장을 이끌었고 외래무용의 흡수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은 중국 조선족 무용체계의 창립자인 최승희 선생이다. 그는 수년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의 문화 선진국에서 유학을 하며 서양무용체계를 흡수하였고, 후에 상하이(上海), 톈진(天津), 선양(沈 阨), 하얼빈(始木浪) 등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하며 뛰어난 연기로 중국 관객을 사로잡았다.

1945년 8월, 선전대의 무용대장을 맡은 최혜련(崔惠 蓮)은 창작활동을 더욱더 활발히 하였다. 이 시기는 인민해방 전쟁연대의 사기진작을 위한 무용활동을 통하여 조선족 무용의 참신한 골간들이 나타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그들에 의해 조선족의 무용창작이 본격화되고, 극장예술 무용창작으로의 전이가 성행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무용활동으로 인해 향후 민족무용의 발전의 번영을 위한 실천적 토대가 다져졌음을 알수 있다[5].

중국 조선족 무용은 한 세기 동안 민족 고유의 무용문화를 유지하며 왔으며, 1950년대 초반 연변문공단의 설립으로 다수의 무용작품이 탄생하였고, 문예경연과 공연을 통해 예술 무용창작의 질을 향상시켰다. 서정성과 플롯의 결합이 조선족 무용예술 창작의 주류를 이뤘고, 춤 창작은 단순한 플롯에서 스토리를 가진 무용작품으로 발전해 플롯 창작 분야를 개척했다. 다음은 이 시기의 춤 공연에 관한 내용이다.

3.1.1 곤봉춤(1930년 아동단 공연)

군무이며, 1930년 전반기에 유격구에서 많이 추게 되었고, 아주 간단한 줄거리를 엮어 적의 무기를 빼앗는 유격대원들의 지혜와 용감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춤은 생동한 이야기 전달을 통해 이악하고 교묘하게 달라 붙으면 적의 무기를 빼앗을 수 있으며, 또 기어코 빼앗아야 한다는 주제를 강력히 드러냄으로써 유객대원들과 광범한 인민대중들이 무기 탈취투쟁에 궐기하도록 고무격려 하였다.

3.1.2 재봉대원춤(1930년 茶淸游志叵 공연)

여자 군무 재봉대원춤은 항전고난 속에서 여재봉 대원들이 앞선 전사들을 위해 군복을 만드는 노동의 정경과 혁명 승리에 대한 확신과 낭만 생활에 대한 절절한 비전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3.1.3 가병대춤(1930년 赤滿游去叵 공연)

군무 가병대춤은 항일 유격대원들이 말을 타고 산을 넘나들며 기동력 있게 적을 향해 돌진하는 전투를 그린 작품이다. 배우들이 말을 타고 앞으로 달리는 동작부터 등장하고, 채찍을 휘두르며 칼춤을 추고, 칼과 칼이 서로를 비난하는 분위기 속에서 펜싱 장면을 연출하며 배우들의 말을 타고 사격하는 장면을 유도했다.

3.1.4 무장춤(1930년 木滿游志冤 공연)

무장춤은 노래 총동원가에 맞춰 만들어진 춤으로 유격대원들의 높은 의지와 낭만적인 생활 정서를 반영한 무용작품이다. 전사들이 승리하고 개선한 뒤 유격대원들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 전투 경위를 이야기하며 흥분을 주체할 수 없는 한 병사가 총을 들고 춤을 추자, 주변 대원들은 그와 함께 손벽을 치며 박수를 쳤다.

3.1.5 단심줄(1930년 아동단 공연 가무)

가무 단심줄은 왕칭현 유격구 어린이 단원들이 노래와 춤을 접목해 단결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무대중심에 세워진 붉은 기둥 꼭대기에 리본이 채색으로 묶여있고, 배우들은 노동자, 농민, 해방군, 학생, 학자 등의 의상을 입고 사회 각 계층을 대표하여 한반도 각 지역의 지도를 손에 들고 등장한다. 이렇게 기둥 꼭대기에 점점 매달린 채 늘어선 채색 리본을 꼬아 만든 배우들이 무대 중심에 모이면서 작품은 사회 각계각층의 단합에 호소하는 것을 상징한다.

3.1.6 양산도춤(1946년 안무:김금덕 조선의용군 제1 지대선전대 공연)

독무 양산도춤은 조선족의 전통민요인 양산도의 독무를 단 한 사람이지만 출연자의 손에는 물장구를 들고풍부한 율동으로 다양한 리듬을 연주하며 흥겨움을 표현한다. 조선족의 줄타기 놀이처럼 줄이 오르내리면서 춤을춘다. 경쾌하고 운율적으로 기복이 있고,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으며, 정서적으로 명랑하고, 동작이 매끄럽고, 상지 동작이 부드럽고, 유연하며, 호흡마다 밝고, 경쾌하고, 점프하는 스타일의 특징을 보여준다.

3.1.7 절구춤(1947년 연변행정전업원도찰서 민족사무처문공단 집체창작, 공연)

군무인 절구춤은 조선족들이 '8·15'를 맞아 해방되고, 자신들이 열심히 일해 풍년을 거둔 벼를 절구통에 넣어 전통적인 방식으로 찧는 노동생활 장면으로 노동풍년의 기쁨을 표현한 춤이다. 안무가는 조선족의 전통적인 춤 방식을 바탕으로 여성들이 손에 들고 있는 절구봉은 장단 리듬에 맞춰 절구봉을 돌리고, 교대로 곡식을 찧으며, 교차적으로 찧는 등 다양한 리듬을 때마다 경쾌한 춤 동작과 연결되었다.

3.1.8 빨래춤(1947년 연변행정전업원도찰서 민족사무처문공단 집체창작, 공연)

빨래 춤은 조선족 여성들이 빨래하는 생활 장면을 바탕으로 편성된 춤으로, 사람들이 모든 구사회의 먼지를 씻어내고 새로운 사회로 진출하는 것을 상징하며 인민생활의 행복을 그린 무용 작품이다.

3.1.9 조선무용(1948년 안무:김인해 조선의용군 제1 지대선전대 공연)

군무 조선무용은 조선족무용의 전통적인 특징을 핵심으로 한 훈련성 작품이며, 무용수 10명이 조선족의 전통을 대표하는 여성 복식인 황상복에 붉은 치마, 머리에 정교한 머리 장식을 달고 무대 중심에 모여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불교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전통적인 돌방석 동작과 한쪽 다리를 꿇고 앉는 자세, 그리고 팔걸이를 핵심 동작으로 삼아 내성적일 뿐 아니라 유연한 조선족 무용의 특징을 발전시켜 가는 정서가 섬세한 동작에서 잘 드러난다.

3.2 조선족 무용 문화의 발전시기(1950년~1965년)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계기로 중국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으며, 중국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조선족 무용가들이 공화국 창건 전야와 직후에 모두 연길로 모여들기 시작하며 또 한번의 문화발전이 기대되는 시기였다. 또한, 조선족 무용예술가들의 지칠 줄 모르는 강인한 노력과 분투로 차분하게 자기발전을 하며 뚜렷한 성과를 쌓아올렸다. 해방 후에도 조선민족의 직업예술단체들이 속속 등장하며, 예술무용창작이 다시한번 성행하고 공연활동도 활발해졌다. 이 시기가 조선족 무용의 발전기라 할수 있다[6].

1950년대 초반 연변문공단의 설립으로 다수의 무용작품이 탄생하였고, 문예경연과 공연을 통해 예술 무용창작의 질을 향상시켰다. 서정성과 플롯의 결합이 조선족 무용예술 창작의 주류를 이뤘고, 춤 창작은 단순한 플롯에서 스토리를 가진 무용 작품으로 발전해 플롯창작 분야를 개척했다.

1951년 조선족 무용극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조득현 안무)는 해방 이후 조선족들의 실생활을 소재로 조선족이 항미 원조에 맞서는 국제주의 애국정신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서정무용으로서 조선족무용사뿐만 아니라 중국 무용사에서도 인민의 실생활에 대한 감정을 표현한 첫 번째 무용극이다. 즉, 조선족무용 창작사 뿐 아니라 중국의 무용극 발전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후 조선족들의 서정무용이 탄생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1952년 역사 이야기를 소재로 한 궁무(조득현 안무) 는 전설속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전통춤 동작을 기반으로 현대적 기법을 가미시킨 최초의 플롯댄스다. 1950년대 초 연변가무단의 춤 창작은 농촌, 인민생활에서 소재를 삼아 극장예술무용으로 변모시켰으며, 기존의 전통적인 형식을 충분히 적용하여 새로운 생활과 당대인의 감성을 반영하도록 하였다.

1948년에 성립된 연변문공단은 1953년에 연변가무단으로 개칭되고 뒤따라 동북 3성에는 조선족의 예술단들이 성립되었다. 연변의 각 현 소재지에는 모두 문공단이 섰고, 뒤를 이어 장춘 길림성 민족가무단, 흑룡강성 목단강시 민족가무단, 요녕성 단동시 민족가무단등이 세워져 무용일꾼들의 대오가 집중되고 확대되었다. 당시 연변문공단에서 나온 대표 작품들로는 '절구춤', '지게춤', 집체농장' 빨래춤' 승리경축부'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소박하고 호방하며 낙천적인 무용언어들이 만들어졌으며, 생활미가 짙고 형식미가 뚜렷한 것이 작품들의 특징이다.

한민족의 전통 문화에 토대를 두고 중국 조선족의 특색을 입혀 새로운 창작무용을 발전시켰다. 이시기는 작품들을 도식화하였으며, 창작 방법과 기법이 형식화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족의 무용예술이 자체의 발전의 길을 걷는 시기라고 볼 수 있었다.

무용의 형식면에서 독무, 2인무, 3인무, 군무, 무극등 다양한 장르가 탄생하였으며, 표현 기법에 있어서도 상징, 비유, 의인화, 과장 등 다채로운 양상을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단일한 루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기존의 전통무용을 기반으로 하여 무용 소품들을 추가 하였고, 작품에 현실적 소재를 사용하여 무용극 형식의창작무용을 뿌리내리게 되었다[7].

한민족의 전통 문화에 토대를 두고 중국 조선족의 특색을 입혀 새로운 창작무용을 발전시켰다. 이시기는 작품의 내용들을 도식화하였으며, 창작 방법과 기법이 형식화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족의 무용예술이 자체의 발전의 길을 걷는 시기라고 볼수 있었다. 무용의 형식면에서 독무, 2인무, 3인무, 군무, 무극 등 다양한 장르가 탄생하였으며, 표현 기법에 있어서도 상징, 비유, 의인화, 과장 등 다채로운 양상을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단일한 루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음은 이 시기의 춤공연에 관한 내용이다.

3.2.1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1951년 극본: 崔才 안무:조득현 연출: 연변문공단)

무용극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는 항미원조를 배경으로 조선족들의 높은 애국주의, 국제주의 정신을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이다. 작품들은 항미원조라는 시대적 주제를 붙잡고 실생활에 입각한 평화와 전쟁 대립갈등의 무대 이미지를 보여주며 비약적인 극의 변화를 보여주며 평화, 행복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염원과 애국주의, 국제주의를 부각시켰다.

3.2.2 농악무(1951년 안무: 조득현 연출: 연변문공단)

무인 농악무는 조선족 전통무용인 농악에 의해 민족무용 사상예술에 처음 녹아들어 전례 없는 예술작품으로 각색된 것으로 중국 조선족 무용의 발전 과정에서 전통무용이 예술무용으로 발전했음을 의미한다.

3.2.3 활춤(1952년 안무: 조득현 연출: 연변문공단)

무극 창작의 뒤를 이어 1952년에는 쌍무 활춤을 창작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부각시켰다[8], 이 춤은 외래침략자를 반대하여 싸운 조선 인민들의 역사 이야기에서 소재를 얻어 창작한 무용이다.

3.2.4 부채춤(1954년 원작:양창운 개편:김주봉, 최금성 연출: 아마추어무용단)

간결하고도 소박한 춤동작과 구도를 통하여 조선민족의 행복한 생활 정서와 미래로 펼쳐 나가려는 숭고한 지향을 정서깊게 재현하였으며, 중앙가무단에서 다시 재안무되었다.

3.2.5 물동이춤(1955년 안무: 이인숙 연출: 연변가무단)

군무 물동이춤은 조선족 부녀들이 물독을 머리에 얹고 강변에 물받으러 가는 전통적인 생활 습성을 묘사하였다. 조선족 여인들의 고유한 내성적 성격미와 외부적 형태미가 아주 자연스럽게 조화되었다.

3.2.6 독보조노인들(1964년 원작:김용준 개편: 마문호 연출: 아마추어무용단)

군무 독보조노인들은 새해 식량 증산을 위해 이른 봄부터 조선족 노인들이 밭에서 일어나 비료를 주는 작업을 하는 모습을 묘사해 억만 농민의 높은 사회주의 건설 적극성을 보여준다.

3.3 조선족무용문화의 이변시기(1966년~1977년)

1966년부터 1976년에 이르는 문화대혁명기에는 반혁명집단에 의해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에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이것은 조선족 무용 발전사에 있어서 일대 수난기였다. 건국 후 조선족의 예술은 정치에 존속되어야 한다는 좌·적 정치경향의 영향으로 교란을 받았으며, 예술인들도 본보기극을 공연해야 했다. 한때 조선족예술무대에는 본보기극 만이 판을 치는 비참한 국면이 나타나게 되었다.

1966년 5월에 시작된 문화혁명'으로 문학예술이 주요 비판의 대상으로 뒤바뀌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문화대혁명 시기는 민족문화혈통론에 대한 비판으로 조선족 무용예술에 대한 탄압을 실시하였으며, 건국 후 17년간 이룩한 눈부신 성과를 부정하고 조선족무용예술에 대한 전문적인 독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용수들의 오기를 자극하여 무용예술의 맥이 끊이지않고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힘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족 무용예술의 문화유산에 대한 수집 및 정리사업이 중단되고, 그 안에서 싹트고 자라온 무용들이 모두 '이국문화'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이후로 민족형식이 내비친무용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아 무대로부터 밀려났고, 그 어떠한 무용수도 작품에 민족의 정신, 형식, 품격 등을 감히 언급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조선족들이 그토록 즐기던 농악무 또한 지주계급의 노리개춤이라 힐난하고, 상모돌리기' 또한 당에 의심이 있어 머리는 돌리는 행위라 매도하였다. 뿐만아니라 장고춤' 역시 중국의 노리개춤의 일종이니 공연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시기의 무대는 우리 민족춤 형식의 하나인 소도구를 이용한 춤들, 즉 상모', 장고, 북' 춤등이 밀려나게 되었고, 심지어 무대의상과 장식물까지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럿듯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대중적 무용활동을 활발히 진행해오던 조선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른바 충성무'를 출수 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10년 동란의 시기의 조선족의 무용창작은 소기의 성과는 달성하였으나, 전제적인 틀에서 봤을 때에는 전례없는 재난을 입은 시기이다.

1976년 10월 4인 무리가 무너지자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고 중국은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고, 개혁과 개방의 심화로 대내외 무용교류가 더욱 빈번해지게 되었다. 적극적인 외래무용의 수용으로 조선족 무용문화가 급격히 발전을 이루었으며, 이에 따른 무용이론과 평론사업도 활발히 전개되어 문화의 개방으로 조선족 무용예술이 그 어느때보다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폭넓게 발전한 황금시기라 할 수있 다. 대표 작품들로는 '도라지꽃' 새봄', 논물 관리원' '고사리풍년 '등이 있으며, 작품창작에 있어서 자유화, 민족화, 개성화, 현대화 등 방향으로 추진되어 각자마다자신의 독특한 개성과 뛰어난 창조적인 영감으로 마음껏 창작 구상하게 되었다. 조선족 예술가들은 험난한역경 속에서도 은근의 끈기로 조선족 예술발전사에 획을 그을만한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 냈었으며, 연변가무단은 물쓰는 관리원', 수확', 우우의 노래', 稅肥打令' 등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

조선족무용은 군무 '군정을 가지다', 붉은 매화송 장구춤', 벌목꾼', 독무 돼지 키우는 처녀', 4인무 장백산아래新愚公; 남성 군무 '유쾌한 건설공'; 2인무 老兩口送飯' 등, 풍부하고 단조로운 무대를 오랫동안 회복해 조선족 가무의 예술, 특히 민족적 특색으로 칼 군무벌목꾼'처럼 연변의 우거진 숲을 배경으로 생기가 넘치는 남자의 동작을 창작하면서 조선족벌목꾼의 성격으로, 동시에 내적인 강인한 성격을 표현하여 오랫동안 빈약한 조선족 무용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 발굴하는 조선족 시대적 특징을 갖고 있는 발판을 마련한 춤을 바탕으로 탄탄한 한편은 시대, 민족적 특색을 모아 지방민족 특색을 갖춘 대표작이다. 또한 무용 경풍년'은 기존의 농악무' 무용을 바탕으로 조선족 춤 고유의 '장고무, '손북춤' 상모춤'의 어휘를 하나로 묶고, 조선족 민간민속행사예술의 무용화를 향상시켰다.

조선족 예술 창작은 조선족 예술가의 끈질긴 노력에서 일부 성과를 거두었지만, 문화 대혁명'이라는 극좌사상의 영향하에 주제 창작에서는 여전히 수령과 사회주의에 대한 과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노동 장면을 반영한 예술 창작에서도 혁명의 전투성을 때때로 나타내며, 예술 자체가 갖는 심미적 특징을 약화시킴으로써 이 시기의 무용을 만들었다. 다음은 이 시기의 춤 공연에 관한 내용이다.

3.3.1 捫伴葉(1972년 안무: 최옥주 출연: 연변가무단)

무용 捫罕菜는 농촌 처녀들이 아모니의 안내로 군인들에게 조선족의 전통요리인 김치'를 담그는 삶의 줄거리를 담아 군과 인민의 깊은 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3.3.2 홍매송(1972년 원작: 화룡현문공단집체 개편: 윤경자 출연: 연변가무단)

당시 사회정치적 분위기와 주제선행론의 영향으로 공연에 치중해 조선족부채춤의 특징을 살리지 못했지만 작품의 내용이 발전하는 감정선을 잡아가며 예술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당시 무용작품의 창작의식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준다.

3.3.3 돼지 키우는 처녀(1973년 안무: 최옥주 출연: 연변가무단)

독무 '돼지 키우는 처녀'는 처녀가 양식작업 과정에서 평범한 직장에서 집단 양돈사업에 헌신하는 신세대 청년의 경업정신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3.3.4 풍년을 경축하세(1974년 안무 및 출연: 이록순)

군무 풍년을 경축하세 는 전통적인 농악무의 형식을 발전시킨 여러 군상의 무용을 농악에 통합하여 비교적 활발하고 약동적인 무대공간을 쟁취한 것이 특징적이다. 즉 조선민족의 고유한 장고춤, 소고춤, 상모춤 등의 다양한 무용형식들을 도입하여 춤의 민족적 채취를 더욱 농후하게 하면서 약동하는 시대적 맛을 짙게 구현한 것이다.

3.3.5 벌목공(1975년 안무: 최옥주 출연: 연변가무단)

시대정신, 민족품격, 지방특색이 잘 통일된 생동한 무용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 무용언어 구사에서도 일정한 혁신을 보여주었는 바, 특히 조선민족 무용에서 미약한 부분인 발춤을 다양하게 발굴하여 그 양상을 두드러지게 한 것은 이후 조선족 무용에서 어떻게 시대정신에 맞게 무용언어를 부단히 혁신 발전시키는가 하는데 대하여 시사점을 주게된 작춤이다.

3.4 조선족무용문화의 전환시기(1978년~현재)

1978년 8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직속 문화부에서는 억울한 누명을 쓴 예인 55명의 명예회복을 위해 연극'장백의 아들' 평극 붉은 자매' 무용 '농악' 등을 무대에 올렸다. 이로써 중국 사회는 새로운 역사적 시기를 맞이하며 문화예술 사업 또한 빠르게 변모하였으며, 1987년까지 총 11개의 전문예술단체가 설립되어 직업예인이 2,500명이 이르렀고, 연변문련과 중국작가협회연변지회 산하 음악, 무용, 연극, 미술, 사진 등 협의회의 영향력이 높아졌다. 또한, 이 시기 무용창작은 그 내용면에서 안무가의 자아의 개성을 뚜렷이 내세우며 인간의 가치와 삶의 문제, 도덕적인 미와 오묘함, 안건의심층구조를 파악하며 인생천리를 조명하는데 무용창작의 기초를 두었다. 창작에 나타난 하나의 유형은 우리 춤의 표현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생활객체와 안무가의 창작주제의 유기적인 결합에 의하여 선명한 예술형태를 창조한 것이다. 1980년대의 조선족의 무용창작은 표현성 예술의 높은 차원에 올라서서 새로운 탐구와 혁신으로 그 발전의 활주로를 더욱 폭넓게 개척하였음을 간파하게 된다.

근대 전체 무용창작의 흐름은 세기가 바뀔 무렵의 춤창작의 흐름, 즉 근대 조선족 무용의 창작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중국무용의 발전과 영역 외에 동민족 무용의 발전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결과 무용 창작의 큰 흐름에서 중국 고전무, 중국 민간무용, 중국 현대무용 등구도에서 다양한 장르의 안무 작품까지 장르가 흐릿해져 최근 몇 년 사이 신무용(신풍무)으로 흐르고 있다[8].

특히 한중 수교 이후 활발한 춤 교류가 이뤄졌던 90 년대 한국 창작무용이든, 실질적인 교류가 없었던 80년대 한국 창작무용이든, 그 병행 발전된 20년 된 창작무용이 중국 창작무용과 유사하다. 예를 들면, 국내에서는70년대 말에 형성되기 시작해 80년대 말에 초보적인틀을 완성한, 신무용'의 창작 품격보다 좀 더 혁신적인 '창작 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은 아래와 같다. 전통무용의 원형에 가깝게 따라가는 동시에 기존 창작무용에서 벗어나 춤동작의 세련됨과 장식성에 중점을 두고, 춤 주제의 동작을 표현하는 중요성을 더 강화시키고 무게감을 더불어 달라진 역동감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중국 조선족무용은 극장무용예술을 창작무용의 중심으로 교육무용을 기반으로 하면서 발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고 창작무용에서는 궁중무용, 민속무용, 교방무용의 복합성을 띤 전통무용을 토대로 예술화 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나타내었다. 중국 조선족무용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형성시기, 발전시기, 이변시기, 전환시기의 단계를 거쳐 그의 시대적변화, 새로운 자연환경의 요소의 영향을 받으면서 중국 사회의 변화로 인해 생성된 무용예술 관념과 민족문화의 변화에 따른 심리적 요소로 하여 중국 조선민족무용의 특수한 훈련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은 사회적, 문화적환경과 외래무용문화의 예술관념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다음은 이 시기의 공연에 관한 내용이다.

3.4.1 논물 관리원(1978년 원작: 남일권 개편: 최옥주 출연: 연변가무단)

조선족의 사회주의 노동 적극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노동에서 느끼는 기쁨과 행복, 노동에 대한 희열과 긍지 등이 생생한 동작 표현을 통해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무용 동작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사실주의와 낭만주의를 잘 결합시키고 서정적이고 과장된 표현기법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자연미와 인간미가 균형있게 통일된 예술적 형상을 창조할 수 있었다.

3.4.2 분배받은 기쁨(1980년 원작: 김득현 개편: 최옥주 출연: 연변가무단)

군무 분배받은 기쁨 은 안무자가 예리하고 민감한 예술적 감각으로 시대변화의 본질을 파악하고 새로운 시대의 농민들의 정신 변화를 무용형상으로 집약한 작품이다.

3.4.3 벼이삭 설레일 때(1980년 안무: 이승숙 출연: 연 변가무단)

애정을 다룬다고 하여도 이른바 혁명의 반려를 표현하는 개념에서 벗어나 정도 있고 생활도 있는 진실한 사랑을 진지하게 표현하여 형상화하였다는데 의의가 있었다.

3.4.4 도라지꽃(1980년 안무: 박용원 출연: 최미선)

독무 도라지꽃은 연변산천 어디서나 피고 지는 청순한 도라지꽃의 아름다움에 조선족 여성 내면의 '50 포하고,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살아가는 의젓한 생의 보람을 꽃피워 가는 조선족 여성들의 미덕을 찬미한 것이다.

3.4.5 푸른숲 설레이네(1981년 안무: 최옥주 출연: 연변 가무단)

군무 푸른숲 설레이네 는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무대 공간의 구도와 선의 사용에 있어서 그동안 다른 작품에서 나타난 평형과 균형, 대칭 등의 2분법적인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무대 공간의 불평형 기법을 과감히 도입하여 울창하게 솟은 장백산 미인송들의 형태미와 입체미를 자연 그대로의 진실성 속에서 실감나게 그려준 것이 생동감있게 표현되었다.

3.4.6 참된 사랑(1981년 안무: 이인순 출연: 중앙가무단)

사랑의 비극을 심층적인 심리묘사와 섬세한 동작으로 표현하고, 만민의 상봉과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자신의 사랑의 고통은 소리없이 가슴에 묻어두고 다른 이들에게 축복의 미소를 보내는 조선족 여성들의 내면적인 특성이 생동적이고 진실되게 표현되었다.

3.4.7 수양버들 (1986년 안무: 이승숙 출연: 현순녀)

우리 민족 여성들의 미덕을 표현하며 현대 의식의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를 표현하였다. 민족무용의 새로운 형상을 창조한 것이며, 그 형상창조에서도 서로 조화시켜 자연물과 인간의 합일을 보여주는 이중적인 성격, 즉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3.4.8 바다의 노래(1986년 안무: 손용규 출연: 북경무용 학원)

1985년에 창작된 남성 3인무 바다의 노래 는 파도를 가로지르며 노를 저어가는 뱃사공들의 모습을 통하여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인생의 행로를 낙관적으로 개척해 가는 조선민족의 불굴의 정신과 굳건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3.4.9 기쁨(1987년 안무: 이승숙)

군무인 기쁨은 조선족 전통무용인 화동무의 이미지와 춤동작의 특징, 춤의 흥겨운 분위기를 배경으로 개혁 개방의 오늘을 생생하게 표현한 사람들의 행복한 삶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3.4.10 처녀지(1989년 안무: 이승숙)

군무 처녀지는 추상적 상징적인 수단을 주된 공연수법으로 시대적 창조정신을 형상화해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표현한 작품이다.

3.4.11 춘향전(1990년 안무: 최옥주 출연: 연변가무단)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춘향의 모습에서 인생의 보편적인 진리를 재조명해내고, 복잡한 서사적 내용을 서정적인 춤예술로 재창조하면서 무용 예술의 미적 매력으로 오늘날 우리민족의 심리적이고 심미적인 공헌에 이바지하였으며, 무극 창작의 새 길을 개척하는데 혁신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3.4.12 심현(1995년 안무: 송미라 출연: 연길시조선족예술단 동옥선)

독무 심현은 조선족전통악기 가야금현과 이 현이 팅겨 나오는 처량한 악성을 배경으로 한 소재로 조선족 여성들의 인생행로 중 희노애락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3.4.13 叭 (2002년 안무: 김영화 출연: 연변대학교예술학원)

3인무 啾는 낡은 사상과 이념에서 벗어나려는 주제의 작품으로, 조선족무용의 기본 표현방식은 새로운 현대무용 창작사로와 표현수법을 사입해 인간적 이념과 무용예술의 이미지를 표현한 작품이다.

3.4.14 풍년가(2001년 안무: 손용규 출연: 연변가무단)

남자 군무 풍년가는 농경문화를 주제로 조선족 전통의 생태문화를 배경으로 예술적 차원에서 추상적인 내용을 춤동작으로 표현한 고전이다. 안무가의 독창적인 사고방식은 조선족의 전통적인 생존의식을 문화적으로 현대적인 시각으로 구현하여 사실적이고 생생한 예술성을 반영하였다.

3.4.15 서혼(2007년 안무: 김희 출연: 연변가무단)

남자 군무 서혼은 숭배 문화에 이어 학문을 존중하는 중국 조선족의 우수한 전통을 주제로 선비 이미지로 지식과 지성의 염원을 숭상한 현대 조선족의 정신적인 모습을 담아내어 더욱더 예술성이 생동한 표현의 작품이다.

Ⅲ. 결론

중국 조선족은 한민족으로써 첫발을 중국에 내딛은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동하는 시대적 상황 및 혁명의 투쟁 속에서 눈물겨운 업적을 남겨왔다. 급변하는 중국의 사회,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환경에 적응하면서도 조선족만의 역사와 생활특성이 무용예술 전반에 깊숙이 반영되어 있는 한민족무용과는 확연히 다른 독특한 풍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족무용은 민속적이고, 동적이며, 조형과 형식미가 강조되는 복합적이며 다원적인 민족예술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사실 중국 조선족의 무용발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뿌리가 두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중국으로 이주할 시기에 조선무용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옮겨오는데 한계가 따랐다.

본 연구는 상기의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무구한 역사를 지켜온 조선족 무용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역사적 흐름속에 대표 무용가 및 작품들의 탄생배경을 알아보고자 하였으며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족 무용은 역사적 배경에 따라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중국 조선족 무용의 역사는 백의 겨레들이 온갖 설움과 역경을 이겨내어 지켜온 민족무용이며, 기본 베이스는 한반도의 전통무용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둘째, 조선족 무용의 역사적 변천과정은 총 4단계로 나뉘어지며, 각 시대별 대표적인 작품이 분석되었다. 조선족 무용 형성시기에는 조선족의 생활과 투쟁의 역사발전에 따라 자립적인 무용문화를 형성되기 시작했던 때로, 삶의 수단으로 되어 민간예인들에 의하여 전수되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중국 조선족 예술무용의 토대를 마련하여 주었다. 발전시기에는 1950년대 초반 조선족 무용이 극장공연예술 형태로 발전하며, 무대에서 공연될 수 있는 다양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변시기의 중국 조선민족무용예술은 1966년 5월부터 시작한 10년 동안이나 지속된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의해 다른 장르의 문화예술과 함께 비극적인 수난기를 겪게 되어 가장 쇠퇴하고 발전이 없었던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전환시기에서는 1990년대에 시작된개혁·개방정책의 일환으로 외국과의 교류가 빈번히 이루어지게 되며, 창작활동은 일대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셋째, 각 시대별 조선족 무용의 특징을 살펴보면, 조선족 무용의 형성시기의 작품들은 민족의 삶의 의식, 단결의식, 향토의식, 반일의식 등 민족의 해방과 문명개화를 지향하는 정서들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한반도로부터 이주를 한 직후라 본래의 한반도의 문화와 전통을 온전히 계승하지 못한 채, 중국이라는 새로운 사회문화적 체계를 수용함으로써 조선족 무용만의 독특한 형태를 만들어냈다. 발전시기에는 해방 후에도 조선민족의 직업예술단체들이 속속 등장하며, 예술무용창작이 다시한번 성행하고 공연활동도 활발해진 시기이다. 이변 시기에는 당시 중국사회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작품에 조선족의 민족정신, 민족풍격(民族風格)을 표현하는데 상당한 제약이 따르며 표현기법이 탄생하며 비극적 시대상황에서도 발전하는 양상을 보였다. 전환시기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시기를 벗어나 문화예술분야의 비약적 발전을 이룬 시기이다.

이와 같이 중국 조선족무용은 단순한 춤이 아닌, 저변에 깔려있는 조선민족의 정서를 담고 있고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며, 또한 조선족 무용에 대한 연구는 동북아시대를 맞이하여 지속적인 교류 및 상호이해를 바탕으로 소통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여 진다.

따라서 조선족 무용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 나아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조선춤이라는 고귀한 유산을 폭넓게 이해하고 실체를 파악하는 정체성의 확립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특성을 체계적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춤과의 동질성을 찾아내어 현대적인 미감으로 발전시킨다면 조선족 무용의 재창조가 올바른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조선족 무용을 더 많은 지역에 알리려는 노력을 부단히 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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