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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lysis of Edinburgh Fringe Festival Visitor Gaze as the Performance Turn

공연적 전환 관점에서 에딘버러 프린지 축제방문객 시선 분석

  • 박서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미디어문화연구)
  • Received : 2021.11.08
  • Accepted : 2021.12.14
  • Published : 2022.03.28

Abstract

"Tourist Gaze" discussion in the 21st century introduces that tourist is the post-modern and post-fordism figure. Festival visitors can be said as one of the post-modern tourists, so this figure has "performance turn" feature as well. It will be discussed here why festival visitors of the Edinburgh Fringe Festival want to visit the festival. As post-modern and post-fordism figure, festival visitors want to experience autonomy, competence and relationshjp based on the performance turn.

현대 관광의 시선에 대한 논의는 현대 관광객들을 포스트포드주의적이고 탈분화적 공연적 전환의 주체로 이해한다. 축제방문객은 관광객의 한 부류이기 때문에 이들 역시도 공연적 전환의 주체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이제 축제방문객들도 함께 축제 생산에 참여하는 주체로 이해하며, 그 존재만으로 축제의 생산과 변화를 만드는 주체로 이들 방문객들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축제방문객들은 생산 주체로서, 상호 관계에 직접 참여하고, 그들의 일탈성에 대한 욕망을 현존을 통해 축제에 드러내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현대 축제방문객들은 공연적 전환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의 자율성과 유능감 그리고 관계성을 축제 속에서 획득하고자 한다. 에딘버러 프린지를 하나의 사례로, 이 축제의 '열려있음'의 가치관이 만든 규모와 다양성이 이러한 축제방문객의 공연적 전환의 시선에 부합함을 알고, 그것이 꾸준히 축제방문객들의 방문을 유도하는 원인임을 보이고자 한다.

Keywords

I. 서론

1. 연구배경과 연구질문

2020년부터 시작된 국제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은 전 세계 축제 제작자들과 축제 애호가들, 즉 페스티벌고어(festival goer)들에게 심각할 만큼 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축제들이 취소되고 무기한 연장되었으며, 관련 예술가들과 산업 관계자들이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몇 세기에 걸친 시간 동안 10년에 한번 개최되는 전통을 가진 독일 오버아머가우 성고난극 축제는 2022년으로 연기되었으며, 세계적인 규모라는 에딘버러와 아비뇽의 여름 축제들도 2020년 한 해는 예정된 모든 행사를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세계적인 록 페스티벌이라고 하는 글라스톤베리도 잠정 연기되었다. 장르와 시기, 그리고 지역을 불문하고,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 세계 많은 오프라인에서 벌어지는 축제들을 멈추게 하였으며, 그에 따라 많은 페스티벌 고어들이 자신들의 취향 욕구를 억제하고 다시 열릴 그때를 기다리며 여행을 자제하게 되었다.

사실, 이 상황이 이렇게 연단위로 오래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흔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해가 바뀌도록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국내 여러 공연장에서는 검역 규정을 최대한 지켜가면서 공연을 여는 방법을 모색해보기 시작했다. 출입 명단을 작성하여 감염 경로를 빠르게 추적할 수 있게 하거나, 출입시 체온 체크 등을 통해 감염 및 활성화 여부를 체크하거나, 마스크 착용을 공연 관람 내내 유지하도록 강제하는 소극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방법부터, 좌석의 반 이상을 비워 관객들 사이의 거리를 만들거나, 사이사이에 보호벽을 설치하여 서로 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만드는 적극적인 방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을 통해 공연장에서 바이러스 감염과 전파를 최대한 억제하면서도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하지만, 이렇게 나름의 대안을 통해 많은 공연들이 관객들과 다시 만날 수 있게 하였어도, 바이러스의 두려움과 감염자에 대한 사회적 공포로 인해, 관객들이 예전과 같이 적극적으로 공연장으로 찾아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는 마찬가지 노력을 다한 축제들도 여전히 적극적으로 개최되기 어렵게 만들었다.

다른 대안으로, 다양한 축제들이나 해외 유명 극단들에서 시도된 바와 같이, 온라인으로 공연과 축제를 즐기도록 관객들에게 제시한 방법이 있었다. 영국 국립극장이나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 등은 그동안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영상 아카이브를 유료 또는 무료로 온라인에서 공개하기 시작했다. 국제적으로 여러 도시에서 개최되었던 커피 페스티벌은 이번 기회에 오히려 글로벌 커피 페스티벌이라고 하는 여러 도시들의 커피 축제를 통합적으로 개최하는 온라인 축제를 2박 3일 동안 쉴새 없이 방영하여 전 세계 어느 시차에서든지 간에 끊임없이 축제를 보고 진행할 수 있도록 하고, 지난 프로그램도 다시 시청할 수 있도록 서비스함으로써 전 세계의 커피 애호가들이 시간 및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서로 만날 수 있게 만들었다. 2021년에는 에딘버러의 여러 8월 축제의 경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하여,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국제적인 팬더믹 상황으로 인해 찾아오지 못하는 관객들도 온라인상으로 공연들을관람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더불어 공연자들도 굳이 축제 도시인 에딘버러까지 찾아오지 않고서도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에서 공연한 영상을 축제 주최 측에 제공하여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해주어서 오히려 이번 팬더믹 상황이 새로운 공연자와 관객의 만남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게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온라인 매체들이 오프라인에서 치러졌었던 각종 예술 및 이벤트들을 완전히 대신할 수 있을까? 지금과 같이 함께 모이기 어려운 상황이 아닌, 다시 이전과 마찬가지의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이러한 온라인 매체가 현장에서의 경험을 대체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축제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축제에 참여하고 함께 만들어갈 사람들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 이들에게 축제는 중요한 것인가, 그리고 그 동안 그것이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이고 어떤 가치를 안겨주었는지를 고민해보고, 그것이 온라인과 같은 매체를 통해 변형되었을 때 그 의미와 가치가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은 도시 공간이라는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맞춰 축제는 발생했었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그 축제라는 행사에 대한 나름의 기대 지평을 가지고 그 시간에 맞춰 공간에 직접 방문하여 그 즐거움을 향유했었다. 하지만,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대안 플랫폼이 국제적 위기 속에 대안으로 등장하며, 축제라는 콘텐츠를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이러한 위기 상황이 이어지는 동안 그 기대지평을 온라인에서 만족시키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정말로 그 기대 지평을 온라인에서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그 기대 지평은 무엇인가? 다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온다면, 그 때도 우리는 온라인이 이러한 경험을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을 방문기록이나 통계 수치만으로 대답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축제에 대한 연구가 보여주었던 것과 다른 관점과 결과들이 필요할 것이다.

2. 사전연구와 연구방향

지금까지 국내의 축제에 대한 담론들은 축제의 역사나 인류학적 의미들을 다루거나, 문화 행정학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축제를 만들고 성과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축제의 성과 지표를 오로지 방문객 수와 같은 숫자로 평가하다보니, 축제의 의미와 가치를 깊이 있게 바라보지 못한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 의미와 가치를 분석하지 않고, 축제가 만들어진 결과만을 토대로, 피상적인 지표만 살펴보면서 당장의 성과에만 집중한 연구들은 축제가 가진 본질적인 문제나 콘텐츠적 성격을 간과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연구만이 계속된다면, 축제를 방문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의 의미를 따라잡지 못하고 일회성 방문 또는 지역 문화 상품으로서의 가치 이상을 논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국내 대부분 축제들이 관(官)주도형으로 만들어지고, 이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국내 지방자치단체들의 활동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축제 역시도 하나의 지역의 문화 및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지역 행정의 노력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보는 지적이 나타났다. 이러한 지적은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행정적인 관점에서의 성과를 빠른 시간 안에 내고자 하는 요구에 따라 비슷한 테마와 양상을 보이는 축제들이 ‘붕어빵’ 찍어내는 것처럼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비판을 가했으며, 그로 인해 전국 축제들이 세금 낭비라는 오명과 이에 관련한 문제 제기도 드러나게 되었다[1].

또한, 2020년부터 코로나 상황이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그동안 다양하게 시도된 온라인 매체들에 대한 연구들을 기반으로 축제가 온라인에서도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 진행되어 왔다. 아직은 온라인매체가 국내 축제들의 한계와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 플랫폼인지에 대해서 확답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코로나 상황은 오히려 온라인 매체에 대한 다양한 실험과 연구, 논의를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온라인 매체의 기술적인 측면이나, 참여자 만족도 조사 방법론이나 확장성 및 상업성 등의 성과중심적인 논의에 한정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팬더믹 상황 이후에도 축제와 온라인 플랫폼의 관계 대한 연구가 가치가 있기 위해서는 새롭게 부상한 온라인 매체들이 오프라인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지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연구는 연구자 개인의 에딘버러 프린지 축제에 대한 페스티벌고어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에딘버러 프린지를 2005년부터 2019년까지 거의 매년 방문해온 연구자의 경험은 스스로 왜 에딘버러 프린지의 페스티벌고어가 되었으며, 그로인해 얻는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지 고찰해보는 연구의 좋은 시작점이 되었다. 그동안 국내의 축제 논의들이 그 주체의 입장을 만드는 기획과 행정의 관점에서 논의한 나머지 방문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놓치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 지점을 단순히 수치적인 성과로만 환산해서 이해하는 것에서 좀 더 면밀하게 다가가 그 이유와 가치, 의미를 가까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현대 관광의 시선이 담은 의미를 다룬 연구를 중심으로 축제방문객들과 페스티벌 고어들이 축제를 찾는 이유를 연구자의 참여 관찰을 토대로 이론적으로 논의해보고자 한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관광의 패러다임도 마찬가지로 바뀌면서, 현대 관광객들은 기존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좀 더 확장된 의미를 위해 그들의 모빌리티의 능력을 발휘하는 경향이 있음은 지속적으로 언급되어 왔다. 축제방문객들, 특히 페스티벌 고어들은 이들의 한 사례이기 때문에, 현대 관광객들의 시선을 통해 알 수 있는 이들의 목적과 가치를 이들에게 마찬가지로 적용시켜 이들이 축제를 찾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대 관광객의 분석 틀을 가지고 이러한 목적과 가치를 알아보고, 에딘버러 프린지라는 축제에 대한 연구자의 경험을 토대로 한 사례를 통해 어떻게 이러한 의미와 가치를 축제방문객 그리고 페스티벌 고어들로 하여금 향유하고 전유하도록 해주는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동안 축제방문객들, 특히 페스티벌 고어들은 사실상 축제에 대한 담론에서 축제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게 해주는 숫자를 통한 지표의 대상에 불과했으며, 소비자이자 타자로써 축제의 성패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주체로 판단되어졌다. 하지만, 축제와 같이그 현장에서 발생하는 공연적인 이벤트에서 이들이 축제 현장에서 발현하는 상호 관계는 축제를 만드는 중요한 생산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중요한 생산의 주체의 하나인 축제방문객들, 특히 페스티벌고어들의 관점을 중심으로 논의해보면서, 그것을 통해 지금까지의 현대 축제가 어떤 의미가 있어야만 이들로부터 가치를 인정받았는지 논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축제를 방문하는 행위와 실천이 축제방문객들에게는 무엇을 얻도록 해 주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앞으로 팬더믹 이후 그 가치가 온라인을 통해 또는 다른 매체를 통해 전환될지 고민해보도록 하자.

여기서는 축제방문객이라는 개념을 페스티벌 고어라는 개념과 분리해 임의적으로 제시하고 사용하고자 한다. 페스티벌고어가 특히 음악 축제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루는 연구에서 가장 많이 쓰인 용어인 관계로, 페스티벌고어라는 명칭과 축제를 관광객처럼 또는 일시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언어에 대해서 사실 명확하게 제시된 경우가 드물다. 여기서는, 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페스티벌고어가 애호가적 측면이나 반복적인 방문, 특정 취향에 결부된 개념이라면, 축제방문객은 이들을 포함하여 축제 기획 및 제작에 참여하지 않고 물리적으로 축제를 즐기고자 하는 마음에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Ⅱ. 이론적 배경

1. 관광의 시선과 공연적 전환

라슨과 어리는 『관광의 시선』[2]이라는 저서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관광객들의 시선이 의미하는 것들을 분석해보고, 이 시선이 의미하는 바가 단순히 이들이 추구하는 시각적인 감각적 쾌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이 안에는 복잡한 감각적 경험 추구의 욕망과 함께 사회적이고 또 문화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이들의 연구는 시각적인 감각으로 지칭되는 ‘시선’이 사실상 직접적으로 느껴보는 감각과 그 감각을 통한 상호 관계적 경험을 중시하는 ‘공연적 전환’으로 이행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 포드주의적 가치관, 즉 대량생산적이고 구조적인 가치관을 거부하는 사회 변화를 통해 이제는 관광객들이 원하는 바가 단순한 방식으로 획일화되지 않으며, 각자의 취향에 따라 탈맥락적이고 탈분화적 성격을 띠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맥카넬[3]의 ‘무대화된 진정성(staged authenticity)’ 논의를 통해 관광객들이 경험하는 상당수의 것들이 소비자로서의 이들의 만족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며, 그들의 기대지평에 맞춰 ‘진정성’을 갖춘 것처럼 보이도록 구성된 일종의 수행방식 또는 결과임을 설명하고 있다. 라슨과 어리는 무대화된 진정성은 실제로 ‘있음직한’ 현지의 일상과 삶의 패턴을 담고 있으면서도 ‘무대화’된 일종의 환상적인(fantastic) 요소, 즉 관광객 자신의 일상과 괴리된 요소를 담고 있다는 의미로서 해석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 ‘무대화’의 의미는 흥미롭게도 관광객들이 자신 앞에 펼쳐진 이들 무대화된 진정성이 사실상 ‘무대화’된 것임을 이미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용인하고 있음도 의미한다고 덧붙인다. 이러한 ‘무대화’된 의례들, 예를 들면 일상에서는 자연스럽지 않은 서비스의 태도나 경험을 오히려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들이나, 이미 사라져버린 전통 문화의 경험 또는 일상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안전장치들은 오히려 관광객들이 관광지를 방문하면서 기대하고 있는 기대지평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광산업은 이러한 ‘무대화’된 의례를 매뉴얼화하여 관광객들에게 더 효율적이고 만족스럽게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라슨과 어리가 제시한 관광객의 시선에 담겨있는 ‘공연적’인 감각에 대한 욕망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해석해볼 수 있다. 먼저, 이들이 고프만[4] 을 인용했던 것처럼 현장에서의 상호관계를 통해 직접적인 관계를 맺음으로 경험할 수 있는 관계적 욕망이다. 따라서 이 의미대로라면 여기서 말하는 ‘공연적’의의 미는 현장성 또는 직접적 상호 관계성을 의미하게 된다. 고프만이 말한 자아 연출이 의미하는 것은 상호 관계적 의례에서 나오는 것으로 상대방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전달하는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으로 담겨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표현하기 위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각각의 개인이 의례적 기호를 취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그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즉각적으로 표출하는 연출 방식인데, 매우 의도적일 수도 있지만, 관계와 소통의 주체가 사회나 문화적 배경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그 상황을 조율하기 위해 의례적으로 나오는 연출이기도 하다고 고프만은 설명한다.

라슨과 어리는 고프만을 인용하면서, 관광객의 시선과 실제로 관광지에서 거주하고 있는, 그곳에서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충돌할 때 나타나는 상호 관계적 의례 상황과 그 가운데 나타나는 즉흥적인 자아 연출 기법을 설명한다. 이들 현지인들이 이익을 창출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일상이 침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나름의 안전장치로서의 의례로 이러한 자아연출의 방식이 공연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들은 호텔이라는 수용소와 같은 숙소로 관광객들을 몰아넣거나, 외국어 메뉴에 현지 언어 메뉴판에 있거나 있지 않은 다른 메뉴가 제시되어 있는 것들, 또는 ‘전통적’또는 ‘문화적’ 이라는 이름에 맞춰 이미 사라져 버린 일종의 문화적 산물이나 행위들을 다시 관광객들 앞에서 부흥시키는 등의 것들을 일종의 그런 예로 들고 있다.

‘공연적’인 관광객의 시선의 의미는, 시각적인 경험을 넘어서 시각적으로만 남는 경험이 아닌 그 자리에 존재함으로 상호 관계를 그 장소와 맺음으로 얻는 만족이다. 라슨과 어리는 관광객들이 시각적인 만족과 감흥에만 그 의미를 두고 있다고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말한다. 현대 사회처럼 시각적 이미지의 재현이 오히려 현장에 가서 보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명확하게, 심지어 인위적으로 조작함으로써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에서 굳이 관광지까지 찾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시각적 감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관광객의 시선이 가지고 있는 공연적인 특성은 그 자리에서 현존함으로 구성되는 일종의 관계에 대한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오슬란더[5]의 ‘생동감(liveness)’에 대한 논의에 반박하는 피셔-리히테[6]의 논의와 유사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점차 기술적으로 생동감을 재현하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에 공연성이 갖는 의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오슬란더의 주장은 피셔-리히테에 의해 공연은 관객과 공연자가 직접 현장에 ‘현존’하는 것으로 형성되는 ‘자동 형성적 피드백 고리’ (autopoietische feedback -Schleife)에 의해 이루어지고 완성되며, 그 현존에 의해 공연 미학적 감정이 전달되고 공연이 완성된다고 반박된다. 공연장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자각이나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닌, 존재로 발생되는 ‘현존’이라는 사건을 통해 자동적으로 순식간에 엮여지는 공동체적 연결고리에 의해 공연적인 피드백 고리가 형성되고 그로 인해 상호 관계가 형성되면서 공연이라는 것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어지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재현된 생동감만으로는 이 공연적인 사건과 현상으로부터 얻어지는 미학적 경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라슨과 어리의 관광의 시선의 분석 틀은 공연 미학적인 맥락과 매우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공연 미학적인 이론이 관광의 시선을 분석하는데 매우 유용한 이론이 된다고 주장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를 토대로 본다면, 축관광의 시선은 그 안에 ‘공연적 전환’을 통한 직접적 경험에 대한 욕망이 담겨 있으며, 그 경험은 직접적인 존재가 됨으로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사건의 중심이 되어 그 상황을 생산하는 주인공이 되는 경험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생산 주체가 되는 직접적인 경험은 그 방문하는 장소나 상황에 연관되는 상호 관계의 경험으로 또한 연결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논의는 축제방문객들을 분석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라슨과 어리가 제시한 관광객과 관광의 시선의 정의도 좀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유희를 위해 떠나는 유희적 모빌리티 주체들과 그들의 관점을 총체적으로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축제방문객의 경우도 이들의 논의에 충분히 포함될 수 있다. 사실 축제방문객의 경우, 이들에게 있어서 축제를 방문하는 것은 단순하게 축제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특정 공연이나 행사, 이벤트, 제공된 체험 상품 등과 같은 단편적인 축제의 콘텐츠만을 감상하고 즐기는 목적에만 머물지 않는다. 축제방문객들이 이런 목적만으로 축제를 방문한다고 해석했다면, 마치 관광객들이 시각적인 감각에만 목적을 두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과 같다. 관광객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가 시각적인 감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 축제방문객들이 기대하는 ‘축제’라는 개념에는 축제가 담고 드러내는 행사와 이벤트, 그 콘텐츠만이 아니라 그 축제가 이루어지는 한명의 생산자 그리고 참여자로서의 경험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2. 축제의 ‘유쾌한 시간’의 의미

사람들은 왜 축제를 좋아하는 것일까? 축제가 가진 유희성의 기원은 서양의 고대 그리스나 한국 전통 극예술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그 의미와 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연구는 현대 축제에서의 유희성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고자 한다. 물론, 현대축제의 유희성 역시도 중세 카니발리즘에서부터 논의할 필요는 있다. 바흐친에 의하면, 그는 카니발이 가진, 일상에서 벗어난 일탈적 유희의 허용이 이루어지는 기간의 미학, 즉 “유쾌한 시간”[7]의 원리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유희성을 허락한다고 말한다. 바흐친에 의하면 종교적 절기에 의해 1년에 한번, 사람들이 일상의 의례와 규범, 사회 관습과 계급에 의한 체계로부터 벗어나 이 모든 것들을 전복하고 거스르며 일탈적 행위들을 저지르는 기간이 카니발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는데, 이 기간 동안 당시 종교적으로 억압되었던 이교적인 행위들이나 사회 규범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사회 이면에 숨겨지고 억압된 사람들의 욕망들이 드러났다고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 축제가 가진 축제성도 이와 마찬가지의 일상의 규범과 관습에서 허용되지 않은 어느 정도의 영역이 허용됨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면은 바흐친이 말한 ‘유쾌한 시간’의 맥락과 같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심지어, 이러한 축제의 특징은 라슨과 어리가 말한 관광객의 시선이 욕망하는 일탈적 측면과 맞닿아있다. 그들은 관광객들은 ‘이탈’의 개념을 포함한 행위와 경험에 그 시선을 맞추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는 일상생활에 규정된 것들과의 단절이기도 하고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과 감각과 다른 것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설명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축제 방문객들이나 페스티벌고어들이 일종의 관광객들의 한 양상이라고 본다면, 결과적으로 이들 역시도 축제에 대해서 하나의 이탈, 즉 자신의 일상과의 단절이나 변형, 또는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자극을 ‘유쾌한 시간’을 통해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바흐친이 설명했던 축제의 ‘유쾌한 시간’은 현대 사회에서는 일상의 맥락과의 단절이며, 일종의 일상 속에서 느끼지 못한 새로운 자극의 경험이고, 그것이 축제에서, 더 나아가 특정한 이탈의 경험 속에서 더욱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또는 만족시켜줄 것이라 기대하는 기대 지평을 품기 때문에 사람들은 축제에 가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역사적으로 오래전부터 ‘유쾌한 시간’이라는 일탈적 시간을 통해 일상에서 벗어난 일탈을 선물해 준다고 사람들은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관광은 물론이거니와, 현대 축제들에게 있어서도 카니발리즘의 ‘유쾌한 시간’의 형태는 오랜 시간 동안 나름대로 유지되고 있는 축제의 원리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이탈의 경험을 선물해주고, 그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일탈 속에서 즐거움을 얻으며, 그 경험은 방문객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재방문하며, 스스로 페스티벌고어가 되어가게 만드는 축제에 대한 기대 지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축제방문객들은 이 ‘유쾌한 시간’ 속 일탈 속에서 어떤 감각을 추구하고 느끼고자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앞서 논의했던 공연적 전환의 상황 속에서 감각되어지고 재현되는 것일까? ‘유쾌한 시간’이라는 일탈적 시간은 결국 일상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순간적이고 기화되어버리는 시간이다. 사실상 손 안에 남지 않는 이 순간과 경험을 통해 얻는 어떤 일탈의 경험을 위해 사람들은 축제를 찾는다고 볼 수 있다. 축제가 발생하는 당시의 상황은 마치 꿈처럼 또는 공연처럼 사라져버릴지라도, 그 안에서 경험한 것은 개개인의 기억과 감정 속에 남게 된다. 그렇다고 그렇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3. 축제방문객과 페스티벌고어의 자아개념

한호성[8]의 연구에 따르면, 축제를 좋아하고 자주 방문하는 사람들은 축제를 경험하는 모든 상황들에 대해서 자기결정적인 행위로 인한 경험과 감정들이라고 인식하려는 측면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자아개념의 산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것을 통해 페스티벌 고어들은 축제를 방문함으로 동일한 관심을 갖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자아개념을 형성하고, 따라서 축제를 통해 나름의 정체성을 획득하기도 한다[9]. 한호성은 축제 방문이 실제로 각자의 자기 결정적인 태도인가 아닌가와는 상관없이 축제 그 내부에서 축제방문객들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모든 것들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인식해야 사람들이 축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러한 인식이 축제 공간과 그 관련 주체들과 상호 관계가 잘 이루어지는 관계성 이잘 이루어지고, 자신의 원하는 것을 자유롭고 또 유능하게 획득할 수 있다고 여길수록 마찬가지로 축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남게 된다고 축제 참여자들의 설문조사를 통해 드러냈다. 따라서 그는 이를 자율성, 유능감 그리고 관계성으로 분류하고 이들이 실제로 축제방문객들, 그리고 애호가 계층인 페스티벌고어들이 축제를 향유하는 과정에서 추구하는 중요한 감정들이라고 지적한다.

앞에서 논의했던 축제방문객들의 관광의 시선적 측면, 특히 공연적 전환의 측면을 이에 대입시켜 본다면, 이러한 축제 방문자들이 선호하는 자율성, 유능감 그리고 관계성의 감정들은 실제로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감정들이다. 그리고 ‘유쾌한 시간’에 대해 논의했던 것처럼, 이것이 그들이 실제로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과 다른 일탈적인 것이어야만 하며, 따라서 그것이 축제가 발생하는 그 공간의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일상에 대해서도 ‘유쾌한 시간’, 즉 일탈적 경험이 될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유쾌한 시간’은 결국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발생한 자율적인 이탈적 선택이자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주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을 향유하고 즐기는 데에 어려움이나 제약이 없어야 또한 자유로움을 인식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자신의 능력의 증명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축제의 공간과 시간이 자신과 다른 맥락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자신이 그 축제의 생산에 참여하는 관계적 감정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이 모든 감정들은, 따라서 현장에서 일어나고, 현존의 사실로 인해 자동적으로 구성되는 피드백 고리에 의해 끊임없이 상호 관계가 형성되고 완성되어가는 공연적 전환에 의해 탈분화적으로 발생해야 한다.

라슨과 어리는 현대 관광객들은 탈분화적 경험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관광객들이 이제 더 이상 특정 맥락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관광의 경험들, 예를 들면 관광가이드가 지정한 대로 움직이거나 관광지로 표시되고 관광의 경험으로 안내되는 것들을 추구하는 기존 관광의 맥락을 원하지 않게 되고, 각자 개개인의 성향에 맞춘, 어떤 기준에 따른 것이 아닌 스스로의 선택과 취향, 결정에 따른 관광의 경험에 더 관광의 시선을 두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현대 관광 객들은 관광지가 어떤 특정한 건물이나 풍경에 함축되어 제시되는 것을 이제는 거부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단일화 또는 몇몇 한정적인 선택의 여지를 남긴 장소의 선택은 각자의 취향과 결정을 모두 존중하고 만족시켜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점차적으로 현대 관광 산업은 최대한 많은 선택지와 변형 가능한 계획을 주는 관광지와 관광계획을 선호하게 될 것이며, 포스트포드주의적인 가치관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현대 사회에서 관광지의 탈분화적인 이러한 양상은 필수불가결한 현상이 되고, 이것은 관광지와 관광의 시선 양쪽 모두 많은 변화를 통해, 앞으로도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라슨과 어리는 주장한다.

이러한 탈분화적인 경험은 자신의 취향과 가치관에 맞는, 관광의 시선에 부합되는 것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게 된다. 기존에는 관광의 획일화된 맥락이 이러한 능력을 각각의 관광객들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관광객들은 특정 상품 맥락을 선택해서 그에 맞는 비용을 지불하고, 그 상품이 사전에 제시하고 계약했던 내용대로 향유하고 즐기고 오면 되는 것이었다. 이 때의 불만족은 자신에게 사전에 계약되고 제시되었던 관광의 내용이 실제로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감각으로 해석되어졌을 때 얼마나 차이 나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탈분화적 경험은 이러한 모든 관광의 맥락을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도록 하며, 다만 관광 산업은 그것을 얻기 위한 일종의 보조 장치에 불과해지게 만든다. 따라서 관광객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각자 획득하기 위해 현지의 언어, 문화, 사회적 맥락과 일상적 상호 의례 등에 익숙하고 쉽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관광의 시선은 앞서 논의했던 축제방문객들과 마찬가지로 자율성과 유능감을 경험하게 된다. 관광객들의 탈분화적 경험은 곧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자유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획일화되고 지정된 모더니즘적 가치관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관광지에서의 모든 선택이 사실상 관광이라는 경험 기저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인 맥락들이 있을지라도, 관광객들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이 모든 경험을 얻게 되었다고 인식하기 쉽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삶의 공간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언어나 문화적 이해, 사전 경험 등의 능력을 발휘함으로 스스로의 유능감을 확인하고 자신에 대한 자아개념을 확고하게 만들 수도 있다. 따라서 라슨과 어리가 밝힌 관광객의 시선 속 탈분화적 욕망에 대한 논의는 관광객으로서의 축제방문객들의 자아개념으로 형성된 자율성과 유능 감의 추구와 매우 깊게 연관된 면을 보인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지점은 관광의 시선과 축제방문객들의 욕망이 실제로 그 자리에 직접 현존하는 현장에서의 참여로 인해 형성되는 관계성에 의해 발현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관계성’에 대해서 앞서 논의했던 피셔-리히테의이론에 따라 좀 더 확장적인 의미로 해석해볼 수 있다. 즉 서로를 직접적으로 인식하고 영향력을 주고받는 관계성을 넘어서 무의식의 관계까지, 다만 존재라는 사건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성으로까지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이 해석은 관광과 축제 어느 쪽에서든 그것의 공연적 전환이나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관계와 그것을 통한 생산의 의미를 좀 더 확장되면서도 정확한 해석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앞서 논의했던 공연 미학적 논의를 통해 본다면, 관객은 공연의 상황에서 배제되고 타자화된 존재임에도 공연의 시간과 장소 속에서 즉각적인 반응으로 영향을 미치고 공연을 완성시키는 중요한 존재이다. 그들이 어떤 특정한 반응을 주기 때문도 있지만, 따로 의도적인 피드백이 없이도 존재 자체만으로도 피드백 고리를 형성하여 공연의 의미를 만들기 때문이다. 주체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공연을 포함한 이러한 현존적 가치가 중요한 인간의 모든 행위들, 라이브 이벤트적 특징을 가진 모든 상황들은 존재만으로 이루어지는 상호관계로 인해 그 모든 상황과 행위, 이벤트를 완성하고 또 그 관계로 인해 스스로 감정과 기억, 가치를 획득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러한 자동 형성적 피드백 고리, 즉공연적 전환 관계로 인해 이루어지는 관계성은 관광객이든 축제방문객이든 자신들의 시선을 두고자 하는 곳에서의 현존을 더욱 추구하게 한다. 다른 어떤 사전 조건이 아닌, 현존만으로 얻을 수 있는 감각과 유희라면, 현존의 가치는 그만큼 더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축제방문객이 추구하는 관계성의 의미에서든 관광객의 시선의 의미에서든 공연적 전환은 ‘현존’의 경험을 앞서 모든 욕망과 시선, 가치를 완성하는 중요한 매개로 보게 한다.

지금까지 논의한 공연적 전환, 유쾌한 시간 그리고 자아개념을 형성하게 하는 자율성, 유능감 그리고 관계의 의미를 구체적은 사례를 통해 논의하기 위해 이 연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축제이자, 가장 많은 방문객, 특히 페스티벌 고어의 방문을 이끈다는 에딘버러 프린지 축제에 대해 논의해보기로 하겠다.

Ⅲ. 연구대상으로서의 에딘버러 프린지

1947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시작된 에딘버러 프린지 축제(Edinburgh Fringe Festival)는, 세계대전으로 인해 무너진 유럽의 자존감과 상처를 다시 문화적으로 풍성하게 만들어서 회복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되었던 에딘버러 인터내셔널 축제(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와 함께 시작되었다. 당시, 인터내셔널 축제는 일부 사전에 기획되거나 ‘초청받은’ 공연들에 한해서 치러졌기 때문에, 여기에 초청받지 못한 몇몇 공연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에딘버러로 찾아와 자신들끼리 따로 공연장이 아닌 빈 장소들에서 공연하면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에딘버러 프린지의 시초이다. 처음에는 따로 조직된 프로그램이나 커뮤니티 없이 인터내셔널 외부에서 일종의 ‘부가적인(adjunct)’[10] 이벤트로, 당시만 해도 따로 ‘축제’라는 명칭조차 쓰지 않았던 행사였다. 그들의 이름 프린지, 즉 ‘가장자리(fringe)’라는 의미를 가진 이 명칭도 이들, 실제로 공연을 했던 예술가들이 아닌 그것을 지켜본 극작가 로버트 켐프 (Robert Kemp)가 1948년에 이브닝 뉴스(Evening News) 신문에 언급함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인터내셔널 못지않은 인기와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 다수 공연되면서 사람들의, 특히 지역민들의 관심을 얻게 되면서 켐프가 이들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명칭이었다.

1958년이 되어서야 현재까지 이른 프린지 축제 조직인 프린지 소사이어티(Fringe Society)가 구성되었다. 이후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알란 베네트(Alan Bennett)와 같은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공연하는 창의적인 학생 작품들이 합류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72년이 되어서야 프린지는 학생이나 예술가들, 또는 지식인들의 선을 넘어 노동자 및 소외 계층 등의 참여, 그리고 이들의 관심 주제와 장르에까지 넓어지며, 점차 다양한 계층들과 사람들을 포괄하게 되면서 현재에 이르는 규모와 다양함을 가진 축제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에딘버러 프린지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은 ‘열려있음(openness)’[10] 이며, 이 가치관을 초창기 때부터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초기부터 누구나 공연할 수 있었으며, 법이 허용하는 한에서 숙소를 구하고 머물거나 극장 대관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초창기에는 자발적으로 운영을 맡아 이루어졌으며, 주로 에딘버러 대학 학생들이 이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들 에딘버러 대학생들은 프린지 소사이어티가 정식으로 구성될 때까지 예술가들을 위한 지역의 저렴한 숙소와 식사를 안내하거나 1955년 이후부터는 티켓 판매와 프린지 카페를 운영하는 주체로 활동하기도 했다. 오히려 이러한 운영조직과 방식을 바탕으로 그 가치관과 의미를 전승해온 프린지 소사이어티의 철학과 운영 방법은 오히려 프린지 축제의 성공요인 중 하나로 지적되기도 한다[10]. 이들은 처음부터 프로페셔널한 공연 극단부터 학생 극단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열려 있었으며, 그러한 다양성과 열린 관점, 차별 없는 환대의 가치관은 프린지의 다양성과 규모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이 축제의 역사가 70년이 넘었다. 2022년이 되면 75주년을 맞게 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제 에딘버러 프린지에서 그 현대 예술 축제의 방향성과 아이디어를 얻은 세계 곳곳의 예술 축제들이 ‘프린지’라는 이름을 걸고 그 취지와 방식을 인용하면서, 에딘버러와 마찬가지로 열린 프로그램 구성 방식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치관으로 축제를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서울에서 ‘서울 프린지’라는 이름으로 매년 예술 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렇게 프린지라는 이름과 방식을 따오는 축제가 전 세계적으로 200여 개가 넘으며, 이들은 다시 ‘월드 프린지’[11]라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함께 이야기를 공유하고 다양한 의제를 논의하고 있다. 이러한 프린지 형식의 축제들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다양성이나 자치적 운영, 지속가능성 등의 사회적 의제를 적용하고 실현하기에 알맞은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며, 실제로 국제적으로 이러한 이슈들을 실천하는 규모와 성과에 있어서도 가장 잘 만들어지고 성공한 현대 축제의 한 형식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예술 축제의 혁신을 만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에딘버러 프린지 축제의 가장 핵심 요소는 그 ‘열려있음’이 만들어낸 엄청난 숫자의 공연과 공연자들, 그리고 공연장들이다. 2019년에 3, 500여개가 넘는 공연이 프린지에서 공연되었으며, 150여개 이상의 국적을 가진 예술가들이 참여했고, 공연장 수도 수백 개에 이른다[12]. 이것을 계산해보면, 축제기간이 한 달 이채 안 되는 4주 정도이니, 계산해보면, 하루에 125편 이상, 한 시간에 5편 이상의 공연을 보아야만 모든 공연을 다 관람할 수 있다고 나온다. 한마디로, 한 사람이 한 번의 축제에서 모든 공연을 다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프로그램도 다양해서, 공연 시간도 오전 시간대부터 밤늦은 시간대까지 있으며, 즐길 수 있는 연령층도 어린이들부터 성인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다양한 성적 취향부터 정치적 관점까지, 국적과 언어도 다양하며, 장르는 물론이고, 공연하는 공연자들의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에딘버러의 프린지의 열려있음의 가치관은 이러한 다양성을 모두 수용하는 전제조건인데, 문제는 이것은 어느 정도 공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이 시기에 에딘버러를찾아온 사람이라고 한다면, 최소 하나 이상은 관심 작품이 생길 수밖에 없는 형태를 현재는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열려있음’으로 인해 꾸준히 70년이 넘게 다져지고 성장해온 에딘버러 프린지의 규모와 다양성은, ‘세계 최대’라는 타이틀만으로도 많은 축제 방문 준비자들의 관심을 얻고 있다. 따라서 ‘축제’라는 행사와 그러한 형태의 문화적 산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일종의 성지순례처럼 방문하고 싶어 하는 축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라슨과 어리가 맥카넬을 인용했듯, 에딘버러 프린지 역시도 페스티벌고어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성지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게 되고, 축제라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가치관과 정체성을 부여하고 관련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으로 방문해야 되는 행사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에딘버러 프린지는 이러한 맥락만으로 해석하기에는 주기적으로 매년 방문하는 페스티벌 고어들이 전 세계적으로 있고, 현대 국제 공연 예술계의 흐름을 논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축제가 되었다. 이는 에딘버러 프린지가 현대 축제 및 공연 애호가들은 물론이고 현대의 유목민들과 같은 관광객들, 축제방문객들에게도 가치와 즐거움, 그리고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성지순례와 같이 다녀왔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의 미가 될 수도 있겠지만, 8월이라는 에딘버러 프린지의 ‘유쾌한 시간’ 동안 축제 공간 속에 현존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 의미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자동으로 형성된 피드백 고리에 의해 얻어진 상호 관계적 생산을 통해 에딘버러 프린지에 나름의 방식으로 참여하는 실천이 주는 가치와 의미가 이들 축제방문객들이 페스티벌 고어들로 구성되고 또 매년 움직이게 한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축제방문객들이 페스티벌 고어가 되도록 작동하게 되는가 하는 점이다.

Ⅳ. 연구내용

1. 자아개념 장(場)으로서의 에딘버러 프린지

에딘버러 프린지 축제는 지금까지 논의한 관광객과 축제방문객의 현존적 가치, 탈분화적 욕망의 추구, 자율성, 유능감, 그리고 관계의 의미,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하게 하는 축제라는 일탈적 시간, 즉 ‘유쾌한 시간’의 사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에딘버러프린지가 가진 ‘열려있음’의 가치관이나 그로 인해 성장한 규모와 다양성, 프린지가 형성되면서 점점 갖추게 된 도시 공간과의 상호 관계성, 그리고 지금에 와서 가지게 된 에딘버러 프린지의 역사와 규모로 인해 형성된 권위 등은 성지순례처럼 페스티벌고어들에게 한번은 직접 찾아가 봐야만 되는 축제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며, 또한 이렇게 형성되는 과정과 결과로 인해 현대 관광의 시선과 축제방문객들의 자아개념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좋은 사례가 되는 축제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에딘버러 프린지의 운영 방식이나 경제적 가치 등을 논의해온 것이 대부분이지만, 사실 에딘버러 프린지가 그 축제 주체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축제방문객들이나 공연 애호가들에게 일종의 ‘성지’가 된 것은 단순히 이들의 행정적인 절차나 운영 능력이나 경제적인 가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축제라는 타이틀도 한 몫 했겠지만, 에딘버러 프린지를 매년 주기적으로 8월의 시간을 비워 찾아오는 관객들은 단순히 타이틀만으로 축제를 찾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에딘버러 프린지는 일단 공연예술이라는 콘텐츠를 바탕으로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현존성의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 장르의 축제이다. 다만, 그것이 다시 축제화 되면서 공연 콘텐츠를 공연화된 플랫폼에 얹은 다층적인 라이브 이벤트라는 점에서 현존에 의한 관계성이 복잡하게 나타난다. 각각의 3, 500여개의 공연들이 직접 현존함으로 경험해야만 되는 예술 장르이기도 하지만, 이것들이 한자리에 총체적으로 ‘현존’하는 축제도 이때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에딘버러 프린지 안에 참가하는 각각의 공연 작품들이 갖는 질적 가치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너무 논의를 확장시키게 되므로 이 부분은 제외하고 전체적인 축제라는 측면에 집중하여 논의하도록 하겠다.

먼저, 한호성의 논의를 중심으로 에딘버러 프린지를 들여다본다면, 이 축제가 자율성과 유능감 그리고 관계적 측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만, 이렇게 많은 축제방문객들, 그리고 특히 페스티벌 고어들이 매년 에딘버러로 향하는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축제라고 여겨진다는 의미는 한편으로는 에딘버러 프린지 축제가 가진 페스티벌고어들 사이에서의 상징성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율성과 유능감이 무제한적으로 발휘되고 드러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규모와 다양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선택의 문제를 통해 자유로움을 느끼고 스스로의 유능함을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딘버러 프린지의 규모와 다양성은 페스티벌고어들에게는 흥미로운 조건이 될 수 있다. 이 정도 규모의 예술 축제는 먼저 페스티벌고어로 하여금 유능감을 검증할 기회를 얻게 한다. 에딘버러 프린지의 ‘열려있는’ 특징은 참석한 작품들이 어느 정도의 질적 보장을 할 수 있는 작품들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어떤 면에서는에딘버러 프린지는 ‘좋은 작품’을 볼 수 있는 축제는 아니지만, 반대로 그 참가작의 엄청난 규모의 숫자는 그탈분화적인 욕망을 최대한 다양하게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규모와 다양성에서 모든 축제방문객들은 제한된 ‘유쾌한 시간’ 속에서 자신의 기대지평을 만족하기 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다. 공연 예술이라는 특정한 장르의 예술 축제에서 그 엄청난 숫자의 규모와 다양성이 공존하는 상황이라면,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고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공연 예술 애호가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자아개념을 확고히 하는 태도가 되며, 그 안에서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취향에 맞는 선택을 하는 능력을 보인다면, 그만큼 또한 유능감의 증명이 될 수 있다. 특히, 이것은 그 능력을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인정과 가치 증명을 이 축제에서 다른 방식으로 얻어가고 확고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에딘버러 프린지의 규모와 다양성안의 ‘열려있음’이 완벽하게 존중되는 방법 중에 하나로 이 축제에서는 프린지 소사이어티 측의 추천이나 가이드 등이 딱히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표를 구하는 티켓 오피스의 위치나 할인받을 수 있는 방법, 각 베뉴(venue)의 위치 등이 안내되어 있고, 프로그램 북 안에 각 공연 팀들이 간략하게 소개해둔 공연 소개 글이 짤막하게 제시될 뿐, 그 이상의 가이드가 특별히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에딘버러 프린지의 다양성의 존중과 열려있음의 한가지 방법이지만, 반대로 이것은 앞서 언급한 현대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탈분화적 경험과 포스트 포드 주의적 축제 맥락이라는 것을 구성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탈분화적, 포스트포드주의적 맥락은 축제방문객들이 페스티벌고어로 이행되도록 그 자율성과 유능 감을 더 명확하게 경험하게 해준다.

에딘버러 프린지에서는 이렇게 실제로 모든 방식과 기준에 열려있기 때문에, 작가들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스스로 작품을 고르는 데에 자율성을 갖고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수준이 낮다고 여겨지는 작품을 골라 보았다고 해서, 그것이 본인이 의도한 선택이라면 관객들도 존중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고, 오히려 어떤 작품을 찾아보든지 간에 공연자들에게 관객은 언제나 환대를 받기 때문에 자율성의 가치가 존중된다. 에딘버러의 8월이라는 ‘유쾌한 시간’ 속에서 모두가 서로 다른 동선과 작품 선택 리스트를 가지게 되며, 이것은 서로가 각자의 정보를 갖고 공유할, 그 사람의 가치 있는 축제 경험과 정보가 되는 것이지, 누가 더 낫고 부족함의 기준이 있지 않다. 굳이 표를 구입하지 않고 펍에서 치러지는 무료 코메디쇼나 길거리 공연들에만 집중해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여기서 프린지를 ‘올바로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로 치부되지 않고, 그 나름대로의 프린지 관객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열려있음은 자유로운 선택을 보장할 가능성도 함께 갖게 된다.

또한 관계적 측면에서도 에딘버러 프린지의 규모와 다양성은 존재만으로도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열려있는’ 가치관이 만들어주는 관계의 가능성은 엄청난 규모와 숫자의 공연들 사이에서 초청받고 환대받는 관객의 입장을 경험하게 해준다. 예를 들면, 관객은 어마어마한 숫자의 공연들 속에서 어떤 공연을 선택하고 관람해야 할지 선택에 어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처음 에딘버러 프린지를 방문한 사람들은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는데, 또한 이것은 공연을 만들어 가져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관객들을 불러 모으고 홍보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연자들은 ‘손님’ 또는 ‘소비자’의 입장에 있는 축제방문객들을 최대한 환대하고, 그들에게 작품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에딘버러 프린지의 ‘열려있음’ 은 사실상 공연자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대면 마케팅의 전쟁을 만들어낸다. 이 정도로 엄청난 수의 작품 소개를 온라인 또는 책자 매체를 통한 소개만으로 찾아보는 것은 사실상 쉽지 않고 선택의 확신도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객들에게 언어나 문화, 인종이나 국적, 성별 등과는 상관없이 직접적으로 거리에서 만나 작품을 설명해주고 자신의 작품으로 초대하는 행위는에딘버러 프린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에딘버러에서 프린지는 아무리 작품의 완성도나 수준이 뛰어나고 높다고 하더라도 관객들에게 단순히 프로그램 책자나 포스터만으로는 그 가치를 선보이기가 쉽지 않은 공연 예술의 장이다. 그 가운데에서 관객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어떤 관객이라 하더라도 환대하고 초청할 수 있는 열린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즉 관객과 공연 자간의 관계의 가능성이 공연 바깥에서도 항상 열려 있으며, 그 가능성이 공연의 취향이나 공연을 관람하기 위한 연령이나 언어 등의 공연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과 관련된 경우가 아닌 이상 모든 이들에게 모든 공연에 대해서 동등하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에딘버러 프린지의 ‘열려있음’은 그 규모와 다양성을 70년이 넘는 세월을 통해 축적해오고 생산해왔으며, 그 ‘열려있음’을 토대로 오랜 시간 형성된 규모와 다양성은 축제방문객들과 이들이 다시 페스티벌 고어가 되도록 하는 자아개념 형성 및 증명을 위한 자율성, 유능감, 그리고 관계성을 경험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예를 든 사실 뿐만 아니라, 분장을 한 상태에서 돌아다니는 공연자들, 다양한 방식으로 거리에서 공연을 하는 버스커들, 엄청난 양의 포스터와 홍보지들, 그 사이사이에 그대로 일상을 영위하는 에딘버러 시민들의 삶까지도 모든 것이 이러한 것들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은 에딘버러라는 도시 공간에서 직접 경험되어야 획득되는 감정과 의미들인데, 따라서 축제를 관광과 마찬가지로 공연적 전환, 그리고 공연적 현존의 의미로 분석하는 것은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2. 공연적 현존의 장(場), 에딘버러 프린지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에딘버러라는 실제 도시 공간이라는 물리적이고 지리적인 현실 공간 속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규모와 다양성이 주는 한계는 ‘현존’의 한계성을 주는 실제 도시 공간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현존’은 지리적, 물리적 현실 공간 안에서 같은 시간에 이중적으로 동시에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현존의 한계는 지금까지 논의했던 자율성이나 유능감 그리고 관계성의 측면을 강화한다. 앞서도 논의했듯이, 엄청난 규모와 다양성은 시간적 그리고 공간적 한계라는 현실에 맞닿으면서 오히려 이러한 자아개념의 가치를 획득하게 만든다.

탈분화적이고 포스트포드주의적인 현대 축제의 가장 대표적인 양상을 가지고 있는 에딘버러 프린지는 이러한 실제 도시 공간의 현존의 한계 속에서 오히려 현대 관광객들, 그리고 축제방문객들에게 더 매력적인 축제로 다가올 것이다. 공간이 가지고 있는 현존성의 가치는 공간의 존재들이 현존으로 인해 발생하는 상호관계로 인해 공간의 생산에 참여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공간은 사회적 생산물이며[13], 그래서 상호 관계에 의해 생산되는데[14], 이러한 상호 관계로 인한 공간의 사회적 생산의 실천은 어떤 정체성이나 가치관으로 인해 엮은 관계가 아니라 의도성과 무관하게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처럼 엮이는 관계에 의해 형성되고 발생한다. 즉, 공연처럼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축제 공간은 축제를 만들고 주최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방문하고 관람하는 이들까지 포함하는 현존에 의해서 형성되고 생산되며, 이들의 유동적이고 다층적인 관계로 인해 복잡하게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공간의 생산으로 인해 총체적으로 구성되는 공연화된 축제 역시도 이들의 존재로 인한 사건과 이들의 생산 참여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에딘버러에게 있어서 ‘유쾌한 시간’인 8월은 에딘버러가 축제라는 옷을 입는 시간이며, 그 해의 8월은 내년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뿐, 다시 그대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이대로 기화되어 버리는 유쾌한 시간의 가치는 페스티벌고어들에게 그때만 경험할 수 있는 자유롭고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며, 또다시 에딘버러 축제를 만드는 관객으로서의 경험을 이 순간에 이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상호 관계적 생산의 맥락 속에 경험할 수 있는 한때의 실제적 경험을 만든다. 에딘버러의 8월에 직접 찾아와 축제의 현장에 존재하는 경험은, 따라서, 축제를 만드는 경험이고, 축제를 구성하고 기억할 수 있는 경험이며, 그로 인해 가치와 의미를 획득하는 실천이 된다.

그동안 국내의 축제 연구들은 축제가 가진 서사나 그것의 문화적 맥락이 축제를 즐겁게 하고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자아내었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축제는 동일 인물이 수회에 걸친 방문으로 이끌기는 어려움이 있다. 라슨과 어리의 연구를 통해 서술했듯, 탈분화적이고 포스트 포드주의적으로 변화한 관광의 시선의 변화는 언제나 같은 양상의 축제를 지루함으로 결론내리게 만든다. 매년 다른 프로그램을 만들고, 매년 축제방문객들이나 특히 페스티벌고어들에게 이러한 자율성이나 유능 감, 관계적 측면을 다채롭게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함을 주지 못한다면, 이러한 축제는 일회적인 호기심에 의한 방문이나 피상적인 경험의 의미에서 그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제는 관객이자 관광객의 입장에 있는 축제방문객들이 단편적인 맥락에서 감상하는 축제는 일회성의 이벤트로 인식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양성의 극대화를 통해 탈분화적인 경험과 의미를 만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현존’의 의미는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라이브 이벤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실제 시간과 공간을 통한 제한적인 경험이며, 그 가운데에서 선택의 여지를 항상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 공간도 하나의 공연과 같은 양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공간의 존재들에 의해 언제나 다각도로 생산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들에게 도시 공간은 방문할 때마다 다르게 경험되는 다양한 사건과 루트에 의해 다채롭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축제를 담고 있는에딘버러라는 도시 공간도 마찬가지로, 방문할 때마다 다른 루트와 다른 경험으로 사람들에게 다양성을 선물한다. 어떤 공연을 선택하고 경험하느냐에 따라 방문하는 시간과 일정, 공연장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달라지는 동선에 의해 만나는 인파와 사건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공연과 공연장의 수가 엄청나다보니, 이러한 다양한 루트의 가능성도 엄청나게 늘어난다. 에딘버러프린지의 규모와 다양성은 도시 공간이라는 실제 공간 속에서 더 많은 가능성과 경험으로 기억되고 생산되는 가능성을 창출한다.

이렇게 앞서 논의했던 ‘유쾌한 시간’으로의 전환 경험은, 공간의 공연적 전환 특성에 의해 현장에서만 경험될 수 있는 일탈의 시간이 된다. 에딘버러라는 축제가 아니더라도 천년고도의 역사를 지닌 관광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높은 도시 공간은, 오히려 이 규모와 다양성, 그리고 현대적 예술 가치를 담은 축제를 품음으로써 상상할 수 없는 무한대의 생산 가능성을 만들고, 방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아개념을 찾아 획득할 수 있도록 열어두게 된다. 이것은 현존의 경험을 통해 그 시간과 공간에 들어옴으로 경험되어지며, 인식되고 감각되며, 또 생산에 참여하게 된다. 스스로 생산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기억과 경험, 감각을 통해 나름의 유희적 의미로 인식하게 된다. 페스티벌고어들에게 에딘버러 프린지가 성지가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3. 온라인 축제 플랫폼에 대한 논의

또한 그런 의미에서 축제를 온라인 플랫폼으로 전환하는 것에 대한 논의를 좀 더 다른 각도에서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최근 발생했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팬더믹과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현실은 사람들의 현존의 경험을 억제하고 강제적으로라도 제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온라인 축제 및 공연 감상의 경험은 그것이 현장의 경험과 동일한 만족을 주어서가 아니라 하나의 대체 경험으로 소비되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동안의 축제가 가지고 있고 전해주었던 현장에서의 현존감과 그로 인한 상호 관계, 다양성과 유동성에 따른 다채로운 경험과 인식, 그로 인해 형성되는 의미와 기억이 온라인에서도 재현될 수 있을지도 들여다보아야 한다.

온라인으로 재현되는 축제가 앞서 언급했던 오슬란더[5]의 주장대로 기술적인 측면만 보완해서 얼마든지 생동감을 재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현장에서 직접적인 상호 관계성을 토대로 한 현존의 감각을 재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온라인이 상호 관계의 커뮤니케이션을 어느 정도까지 재현할지 모르겠지만, 현존이라는 사건을 통해 자동 형성되는 관계까지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에 준하는 다른 어떤 경험과 감각이 현존감에 대신해서 경험하고 느낌으로 현존감을 대체할 수 있게 하는지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그 대체적 감각이 축제 현장에서 느끼는 자율성이나 유능감, 관계적 측면을 동일하게 전달해줄 수 있는지, 동일하게 전해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에 준하는 어떤 가치를 축제방문객들, 특히 페스티벌고어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지를 논의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에딘버러 프린지 축제조차도 이번 코로나로 인한 국제적 위기에 결국 2020년에는 전면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2021년에 들어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하여 운영되는 축제 방식을 시도해보게 되었다. 에딘버러 프린지가 기본적으로는 공연 예술이라는 장르를 토대로 구성된 축제이기 때문에, 팬더믹 상황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었음은 자명하다. 따라서 이러한 프린지의 시도는 그것의 성패여부를 떠나 그 시도만으로도 많은 관심을 모았었다.

2021년 에딘버러 프린지에서는 출품한 모든 작품들을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이라는 한쪽 플랫폼에 편중되어 배치하지는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프라인에만 한정된 작품들도 있었고, 온라인에서만 감상이 가능한 경우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온라인임에도 정해진 시간에만, 또는 기간에만 감상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프린지 소사이어티에 의하면, 이번 시도는 코로나 상황이라는 한계 속에서 경제적인 수입의 하락이나 대면 소통의 어려움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지만, 많은 도움과 협력을 통해 많은 가능성을 보고 경험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12].

하지만, 이러한 에딘버러 프린지조차도 2022년에 75 주년을 맞으면서, 비록 예전과 같은 환경이 유지될 것임은 확실하지 않고, 항상 같은 방식을 고수하는 침체된 축제가 되길 원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축제를 통해 직접적으로 만나는 기회를 포기하지는 않고 다음 축제를 개최할 것임을 밝혔다[11]. 이것은 에딘버러 프린지 뿐만 아니라 다른 여타 전통과 규모를 가진 축제들, 예를 들면 아비뇽이나 잘츠부르크와 같은 도시들의 공연 및 예술 축제들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이미 팬더믹 상황에서도 규모는 줄이더라도 아비뇽의 경우 2021년부터는 모든 공연이 실제 아비뇽 도시에서 공연되어졌으며, 잘츠부르크는 2020년에 조차 중단되지 않고 이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오프라인에서 축제를 운영하였다. 축제가 온라인 플랫폼에서 펼쳐지고 소비된다는 것에 대해서, 이러한 국제적 위기 상황에서조차 아직까지는 공감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비공감은 에딘버러 프린지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축제들이 아직까지는 온라인 매체로 재현되기에는 현실적인 한계를 갖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많은 프린지 페스티벌고어들이 2021년 축제를 온라인으로 접속했을 것이고, 지금까지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공연자와 관객이 동시에 접속해야만 볼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시도들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술이나 재현의 문제에 있어서 현존이 가져다주는 사건의 의미와 그 사건에 함께 동참하여 상호관계를 만든다는 측면에서 앞서 논의했던 ‘열려있음’ 그리고 그로 인한 다양성과 규모의 체감이 매우 결여된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온라인으로 운영된 프린지의 프로그램의 경우, 오히려 다양한 아티스트들을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이동과 비용, 시간의 문제를 극복하고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을 드러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반대로, 매체가 가진 비용과 기술력 및 접근성의 문제로 인해 현존에서 느낄 수 있는 자율성과 유능감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라이브 공연만큼의 상호관계성이 떨어지면서 관계성마저도 부족해져서, 집중력 등의 문제가 있었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결국 축제와 같은 공연 적 전환 및 공간적 매체로 재현되는 콘텐츠들은 현존적 상황에서의 상호 관계가 가져다주는 다양한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 다시 재차 상기된 셈이다. 이는 피셔-리히테[6]가 언급한대로, 존재가 만들어내는 사건 그 자체로 발생하는 수많은 관계와 감정들 때문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는 다시 한 번, 오프라인의 콘텐츠들을 온라인으로 이행시키는 데에 있어서 그의 주장을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드러낸다.

물론, 글로벌커피페스티벌(GCF)[15]과 같이 온라인으로 이전하여 국제적으로 여러 도시에서 개최되던 커피 축제를 통합하여 온라인상에서 개최하여 전 세계 커피 산업계의 관심을 받은 사례도 있다. 공연이라는 콘텐츠와 커피라는 콘텐츠의 차이만큼의 축제가 주 테마로 삼는 콘텐츠의 차이가 매체특성에 따른 영향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도시 공간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되었던 축제와 사실상 도시 공간이 크게 큰 차이와 의미를 만들지 않는 축제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축제마다 온라인 플랫폼이 더 그 의미와 가치를 활성화할 수 있는 사례도 있을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비교 분석 및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Ⅴ. 결론

그 동안의 국내 축제 연구의 초점은 축제의 성과를 평가하고, 주체와 객체를 분리해서 축제를 만드는 주최 측의 입장에서 만족할 만한 의미를 찾는데 집중해 있었다. 축제가 지역 사회의 문화적 행사이고, 지역민들의 문화적 그리고 경제적 가치를 만들기 위한 의미를 갖는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접근은 무의미한 시도와 연구는 아니다. 하지만, 현대 관광의 흐름의 일부의 측면에서 축제가 경제적 효과를 보기 위한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 본다면, 축제가 앞서 말한 현대 관광객들이 원하는 탈분화적 그리고 포스트포드주의적 욕망에 부합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라슨과 어리의 관광의 시선 논의를 축제 논의에 대입해서 축제방문객들, 그리고 애호가인 페스티벌 고어들의 시선을 분석해보는 것은 필요한 시도라고 생각된다.

이제는 관광지로 방문하는 지역과 도시에 대한 그 사회와 문화뿐만 아니라 그곳의 풍경이나 가볼만한 곳, 심지어 맛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보를 구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는 대부분의 현대의 유희적 모빌리티주체들이 누군가의 사전 정보에 의해 자율성과 유능 감의 감각이 제한된 관광객의 양상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라슨과 어리의 관광의 시선은 모든 유희적 모빌리티에 적용하고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 될 수 있다.

하나의 관광객으로서 또한 현대 축제방문객들은 더이상 획일화되고 정형화된 경험을 원치 않을 것이며, 축제에서 그 모든 것들을 거스르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경험을 획득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더 나아가 축제를 만들고 참여하는 입장과 축제를 방문하고 바라보는 관객의 입장의 구분이 무의미함도 깨닫게 된다. 축제는 이제 그 자리에 함께 현존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들이 함께 상호 관계를 통해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유동적인 역학관계 속에서 이루어내는 한편의 도시 공간의 공연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 축제의 문제는 피상적으로는 유사한축제 콘텐츠와 비슷한 프로그램, 획일화된 양상 등을들 수 있지만, 사실상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변화하는 시대와 가치관에 맞춰 지역 문화에 대한 행정적 인식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세금 낭비라고 지적되는 피상적인 지역 축제의 문제들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포스트포드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신의 비용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이동하는 주체적이고 역동적이며 적극적인 유희적 모빌리티 주체들을 아직도 객체로 해석하는 바람에 획일화되고 단편적인 콘텐츠와 축제 구성이라는 안일한 결론으로 이들에게 축제라는 콘텐츠를 제시한다는 데에 있다. 관광이든 축제이든, 현대 포스트포드주의적인 이들의 시선은 매우 탈 분화 적이고 공연적 전환의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관점을 토대로 다시 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딘버러 프린지에 대해서 라슨과어리의 관점으로 재해석해서 분석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간 프린지의 축제가 얼마나 경제적으로 지역 사회에 중요한 의의를가지고 있으며, 그 규모나 성공의 여부가 어떤 운영과 행정적 시스템에 의해서 구축되었는지 논의하는 바는 많았다. 앞서도 언급한 ‘열려있음’의 가치는 에딘버러프린지의 중요한 가치관이며, 이것이 현대 축제방문객들의 매력 요소를 만드는 중요한 핵심 원인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축제 운영 주체와 기획자들,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자 노력한 행정적 관리를 통해 현실화되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열려있음이 단순히 규모와 다양성을 만들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열려있음으로 인해 만들어진 규모와 다양성이 결과적으로 축제방문객들에게 어떤 가치와 의미로 전달되었는지를 보는 것까지 이어질 필요가 있다.

축제가 가진 ‘유쾌한 시간’이 만들어내는 일탈의 의미는 라슨과 어리의 논의에 따르면 공연적 전환에 의해 현장에서의 존재로 인한 발생론적 사건을 통해 상호 관계가 발생하면서 형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 관계 속에서 축제방문객들, 특히 페스티벌고어들은 자아개념을 형성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축제를 방문하는데, 이 자아개념은 자율성, 유능감 그리고 관계적 측면을 통해 획득될 수 있으며, 따라서 축제가 이러한 것들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유쾌한 시간’을 형성시켜 줄 수 있어야만 한다. 에딘버러 프린지는 이러한 ‘유쾌한 시간’을 ‘열려있는’ 가치관을 통해 이루어진 규모와 다양성을 통해 자율성과 유능감과 관계성을 획득할 수 있는 축제이며, 따라서 세계 최대의 방문객 수와 경제적 효과라는 성과와 결과를 이루고 있음을 이 연구는 논의해 보았다. 축제방문객들의 자아개념이나 관광의 시선의 관점에서 본 축제의 공연적 전환의 속성, ‘유쾌한 시간’의 일탈성과 같은 축제 방문객들과 페스티벌고어들에게 있어 중요하게 여겨지는 특징들은 실제로 축제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점을 그러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술적인 기록들이 아닐지라도, 다양한 사람들의 축제 방문 기록들, 예를 들면 김혼비와 박태하(2021)[16]의 서술과 같은 리뷰들도 축제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가질 수 있다. 앞으로 좀 더 이러한 개개인의 시선을 면밀하게 들여다볼 질적 연구의 결과물들이 더 많이 나와야만 다층적인 의미에서의 축제가 갖는 가치와 의미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마무리되어가고 ‘위드 코로나’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지금, 이제는 직접적인 공연적 전환의 경험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다시 논의될 필요가 있다. 라슨과 어리가 그들의 연구 후반에 밝힌 대로 코로나뿐만 아니라 환경이나 사회적 문제로 인해 축제에 대한 현존의 가치와 함께 축제를 찾아가던 사람들의 시선과 욕망이 앞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모빌리티의 욕망은 실제로 여행을 떠나려고 하고, 공연장에 찾아가고자 하며, 실제로 경험하고 방문하는 경험을 갖고자 몸부림치는 사회적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온라인 매체가 공연적 전환의 움직임을 대체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 섣부른 판단일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17].

코로나로 인한 그간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대안으로 온라인을 택했다고 해서, 그것이 공연적 전환의 직접적 대면 경험의 가치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혀 다른 매체가 나타났고, 다른 경험과 의미를 제공할 또 하나의 매체적 경험의 방식과 유희적 플랫폼이 등장했을 뿐이며, 공연적 경험에 대한 가치는 여전히 유지될 것이다. 다만, 오히려 이러한 온라인으로의 다양한 콘텐츠 플랫폼의 전환은 포스트 포드 주의적 가치관과 소비 방식을 점차 더 강화할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공연적 전환의 모든 콘텐츠와 플랫폼 논의에서 그것의 공연성의 가치와 의미를 논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서 공연 적 콘텐츠와 플랫폼은 어떤 양상을 띠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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