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폴 비릴리오(Paul Viriolio)는 현대사회를 ‘가속’ 의사회라고 지적한 바 있다[1]. 가속의 사회는 경제적 합리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속도에 대한 무한신뢰는 발 빠른 기술 혁신을 가져왔고, 이와 함께 사회가 변화하고 생활 양식이 유행처럼 바뀌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가속의 사회는 사람과 사람, 조직과 조직 간 경쟁을 자양분으로 삼는다. 현대인은 조직 안에서 경쟁을 피해 살아갈 수 없게 되면서 가속의 사회에 성찰하지 못하는 주체로 살아가게 되었다. 현대인은 지식과 담론을 생성하는 주체가 아닌 이에 포섭되어 살아간다. 가속의 사회는 또한 현대인을 새로운 문화,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주체가 아닌 소비의 주체로 전락시킨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상품들과 스마트폰 속 광고는 주어진 시간을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하는 데 마음을 쓰게 만든다. 속도 경쟁의 사회는 타인, 공동체라는 단어를 낯설게 만들고 자기 성찰을 힘겹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가속 사회의 경쟁은 ‘장치’(dispositif)[2]로서 개인의 의식을 통제하였다.
지금 현대인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가속의 사회를 성찰할 기회를 맞고 있다. 타인과의 관계를 벗어나 살수 없다면, 개인은 어떻게 자기충족적이면서 동시에 윤리적인 삶을 실현할 수 있는가? 본 연구는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에서 조명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자기 배려’의 철학을 조명하여 이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자기 삶에 적용 가능한 실천양식을 도출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자기 배려’란 무엇인가?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역사적으로, 불연속적으로 구성되었던 주체의 자기 구성 방식들을 하나씩 점검해 나아간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자기 점검, 진실한 삶과 용기, 자기 확신에서 오는 이성의 사용에서 ‘자기 배려’의 본원을 발견한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플라톤의 저서로 전해지고 있는 <알키비아데스 1·Ⅱ>의 내용을 시종일관 언급하며 자기 배려의 본원을 파헤치고 있다[3]. 자기 배려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돌보는 행위’이다. 고대 그리스의 자기 배려(소크라테스로 대변되는)는 자기에게 한시적으로 속한 육체, 젊음, 아름다움에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닌, 생과 사를 넘어 존재하는 인간의 근원인, 영혼, 지혜를 연마하는 것이었다. 즉, 자기 배려는 자기 수양의 실천이었다. 가령, 소크라테스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는 분별력, 자기 절제, 인내심 등 모두 ‘자기에 대한 점검’으로부터 출발하는 자기 수련의 실천이었다. 자기 배려는 주체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항구적 생성의 길 위에 놓는 것이었다. 푸코는 자기 배려를 ‘자기와의 관계’(rapport à soi), ‘자기 테크닉’(technique de soi), ‘자기 실천’(pratique de soi), ‘자기 수양’(culture de soi)과 같은 다양한 표현들로 조금씩 다른 층위에서 언급하고 있다[4].
그렇다면 왜 지금 현대인에게 ‘자기 배려’의 실천들이 필요한가? 본 연구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으로 인한 폐해이다 [5]. 경쟁을 기반으로 승자 독식, 다수의 패자를 만드는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낳았다. 또한, 대다수 국민이 경험하는 우울증, 최근 청년 세대의 열패감과 자기혐오 역시 경쟁 사회가 초래한 우리 사회의민 낯이다[6]. 자기 배려는 패배감을 안기는 비교, 경쟁의 문화에서 벗어나 개인이 자기 삶을 통치하는 주인으로 거듭나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 둘째, 개인주의에 대한 재고이다. 이제껏 권력은 위로부터 아래로 향하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시대의 권력은 아래로부터 형성되고 있다. 유튜브로 대변되는 대안 미디어의 증가, 플랫폼 기반의 업무와 의사결정 그리고 합의 문화는 어느새 우리 사회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지금의 시대가 바로 ‘개인’의 시대라는 것을 증명한다. 특히 재택근무의 일상화, 사회적 거리 두기로 개인은 그 어느 때보다 집단의 가치와 논리와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 즉, 개인은 사회가 제시하는 성공적인 삶, 비교 우위의 상태에서 느끼는 행복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젊은 세대의 귀촌 현상, 자발적 백수 되기 현상은 사회가 제시하는 성공한 삶의 표준을 거부하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윤리적 개인에 대한 시대적 요청이다. 반인륜적 범죄, 지능적 사이버 범죄는 법으로 해결될 수 없다. 그 해답은 결국 윤리적 개인이라는 사실에 도달한다. 또한, 남을 비방하며 인기를 얻는 정치인들의 행동은 ‘진실’하지 않는 개인이 사회를 결코 변화시킬 수 없음을 보여준다.
푸코는 소크라테스에게서,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들에게서 자기 실천, 즉 자기 배려가 서신 교환과 같은 일상의 수단을 통해 ‘개인과 개인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의식을 점검해 주는 ‘의식의 지도자’가 되었던 사회적 실천의 예를 주목한다. 오늘날 현대인의 ‘힐링’(healing)’, ‘빠른 은퇴’, ‘요가’는 자기 배려인가, 자기 계발인가? 이 시대의 권력이 생성하는 또 다른 주체화인가? 본 연구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재편되는 사회 구조와 장치 속에서 개인이 어떠한 행동[7]을 통해 자기충족적이고, 동시에 사회적 실천이 될 수 있는지를 자기 배려의 개념을 통해 고찰하고 이 시대에 필요한 ‘자기 배려’의 실천양식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선행연구 검토 및 시사점
자기 배려 개념에 천착한 연구들은 크게 자기 배려개념을 구성하는 구성 요소들을 분석하는 이론적 연구, 자기 배려 개념을 구체적 분석 대상에 적용한 응용 연구로 구분된다. 전자는 주로 해외 연구에서 진행되었고, 후자는 국내에서 주로 진행되었다. 데니스 뮐러(Denis Müller)는 ‘자기 배려’의 개념에 용해되어있는 ‘타자’ 개념에 주목하였다. 그는 20세기에 들어와 윤리학이 ‘현실’과 결코 유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는 점, 삶 속에서의 윤리, 즉, 실천적 차원의 윤리를 새롭게 제기하였다. 그는 윤리학, 신학, 푸코의 ‘자기 배려’의 윤리학이 모두 ‘타자’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8]. 이 연구는 ‘자기 배려’ 개념에 관한 초기 연구이며, 자기 배려가 타자로부터 촉발된다는 점을 강조한 연구였다.
프레데릭 그로(Frédéric Gros)는 자기 배려가 사회적 실천이라고 강조하였다. 그에 따르면, 푸코가 조명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삶의 기술이었던 자기 배려는 이기주의, 나르시시즘과 구별된다. 자기 배려는 고독으로의 침잠, 자기 유폐와 다르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단호하고 규칙적인 관계의 구축’으로 언제나 타인, 사회 그리고 세계를 의식 속으로 포섭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자기 배려는 친구, 스승을 막론하고 타자로부터 촉발된 주체의 도덕적 깨달음이 자기 자신과 새롭게 관계를 맺게 한다. 이를 통해 주체는 새롭게 타자와 관계를 맺게 되기에 사회적 실천으로 나아간다[9].
앙리 폴 푸뤼 쇼(Henri-Paul Fruchaud)와 장 프랑수와 베르(Jean-François Bert)는 ‘자기 배려’로 촉발되는 ‘파레시아’(parrê ̂sia)의 의미를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하였다[10]. ‘파레시아’는 ‘진실을 말하는 용기’이다. 파레시아는 정치적 차원의 파레시아와 윤리적 차원의 파레시아로 구분된다. 전자는 그리스 시민 정치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 솔직한 ‘말하기’를 통해 동료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 것, 좋은 군주가 자기에게 쏟아지는 파레시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예가 된다. 후자는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파레시아이다. 윤리적 파레시아는 소크라테스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들어가 영혼을 돌보도록 깨우치는 파레시아, 견유학파[11]의 자유롭고 거친 말하기로서의 파레시아, 타자를 인식하는 방법인 타자의 파레시아가 그러한 예이다. 이처럼 서구의 연구자들은 ‘자기 배려’가 결국 사회적 실천의 의미를 조명하는 연구를 진행해 왔다.
국내의 연구자들은 자기 배려를 분석 틀로 활용하는 응용 연구를 진행해 왔다. 연구 분야는 주로 교육 분야에 집중되었다. 신은미는 유아 교사가 갖추어야 할 윤리성에 착안하여 ‘자기 테크닉’(technique de soi) 에초점을 둔 문헌 연구를 진행하였다[12]. 그는 유아 교사가 자기 배려 차원에서 행할 수 있는 실천을 크게 ‘비판적으로 성찰하기’와 ‘교육적 기록 작업’으로 구분하였다. 본 연구는 자기 배려의 개념을 유아 교사의 교육에 적용하여 그들의 구체적 자기 수련 방법으로 도출한 연구이다. 정회진은 학습자이자 교육자인 교육대학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기 배려’의 경험을 분석하였다[13]. 정회진은 자기 배려가 실천의 행위라는 점에 착안하여 관찰 대상자의 이야기 속에서 자기 배려의 구체적 실천을 포착하고자 하였고, 이연수는 초등학교 대상 자기 배려 측정 도구 개발 및 도구 타당성 관련 연구를 진행하였다[14].
이연수의 연구는 자기 배려에서 측정 도구를 개발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 연구는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자기 배려의 개념을 초등학생의 도덕성 규준으로 삼고 있었다. 둘째, 초등학생의 대상 도덕성 규준으로 나열한 자기 배려의 구성 요인에 페미니즘이라는 정치적인 개념을 구성 요소를 삽입하고 있었다. 이러한 작업은 자기 배려 개념과 페미니즘 개념을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응용, 적용하려는 의도에서 기인한다. 즉, 초등학생이 가져야 할 도덕성의 규준으로서 자기 배려, 그 속에 페미니즘을 용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초등학생에게 적합한 자기 배려, 페미니즘에 대한 조작적 정의가 필요했다. 요컨대, ‘자기 배려’에 관한 선행연구들을 분석한 결과, 국내 연구는 자기 배려 개념을 분석의 틀로 활용하려는 연구자의 의도 아래 의미가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푸코의 관점에서 윤리는 규범 윤리로서의 “규칙의 총체”가 아니다[15]. 그가 고대 그리스인들의 성적 쾌락의 활용, 가정 경영, 연애술에서 ‘절제’와 ‘능동성’을 겸비한 삶에서 이상적 자유로운 인간성의 모습을 발견하고자 한 것처럼[16], 그가 상정하고자 하는 윤리는 실천 윤리로서 주체가 스스로 권력에 대하여, 타자에 대하여 ‘자기를 변형’하는 것에 관한 도덕적 행동의 원칙이다. 실천의 윤리로서의 자기 배려는 지금 이 시대에 가능한 자유를 얻기 위한 도덕적 행동에 관한 규약과의 관계, 현실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자기와의 관계에 관한 행동의 원칙이다. 따라서 4장에서는 이러한 푸코의 실천 윤리학적 관점에 따라 지금 이 시대의 현대인에게 필요한 자기 배려의 실천양식들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분석과 해석의 자료는 푸코의 저서, <주체의 해석학>,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 Ⅰ· Ⅱ>, 그 외 그리스, 로마, 헬레니즘 시대 철학자들의 원전을 번역한 저서들로 한정하였다.
III. 이론적 고찰
1. 자기 배려
푸코가 진행했던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의 강의(1981-1982)는 <주체의 해석학>이라는 제목의 강의록으로 출간되었다. 이 시기의 푸코는 역사적으로 변형된 ‘주체’를 파헤치기 위하여 데카르트 주체 철학의 ‘자기 인식’ 철학부터 비판한다. 그리고 고대 자기 배려에 내재한 본질을 새롭게 조명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기 배려의 기원을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와의 대화가 오간 <알키비아데스 Ⅰ· Ⅱ>에서 찾는다.
푸코에 의하면 ‘자기 배려’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이며 자기 자신에 몰두하는 행위”이다. 그리스어로 자기 배려는 ‘Epimeleia heautou’인데, 자기 배려는 이기주의, 나르시시즘, 자기에로의 침잠도 아니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해 ‘애를 써’, 나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며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자기 점검이었다[17]. 즉, 자기 자신을 제3 자의 눈으로 객관화하는 작업이었다. 자기 배려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망각하지 않고 돌보는 것”과 관련된다.
자기 배려의 의미는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를 충고하는 대목, 소크라테스가 변론하는 대목에 잘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정치에 대해 무지한 채로 입문하고자 하는 제자, 알키비아데스를 타이르고 충고한다. 소크라테스의 눈에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한 숙고가 없는 자기 ‘혼’을 가꾸지 않는 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보이지 않는 것, 즉, 변하는 육체에 반대되는 불변하는 ‘혼’이 사람 그 자체이며 ‘혼’의 훌륭함이 지혜라고 설명하였다. 혼은 갈고 닦은 ‘이성’이며, 그 이성은 신성함을 지닌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자신의 이성을 단련하는 데 힘쓰라고 충고한다. ‘너 자신을 알라’(Conn ais-toi toi-même)도 원래 과도하게 신에게 질문하지 않아야 하며, 질문 자체가 질문의 가치가 있는지도 신에게 질문하기 전에 스스로 생각하라는 권고의 문구였다. 요컨대, ‘너 자신을 알라’는 자기 배려 개념에 포함된 일부였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한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이성을 스스로 향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눈에 대다수 아테네 시민들은 집단주의 사고 아래 시간 속에 사라지는 재산과 명예를 탐하며 이성, 진리, 영혼과 같은 불변하는 가치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눈에 이성,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는 철학자의 자질이었다. 그의 생각에 이러한 자질은 자유로운 자, 독립적인 개인의 자질이었다.
푸코는 자기 배려의 황금기를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이 활약한 시기로 보았다. 그 이유는 스토아학파의 자기 배려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삶의 지침들로 널리 퍼져 적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자기에 대한 관계의 자기 목 적화’(auto-finalisation du rapport à soi)를 강조하였다.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대상으로 하고, 자기 자신만을 목적으로 하여 행복을 지향하는 것이었다[18]. 요컨대, 그들에게 ‘자기 배려’는 내적 만족을 지향하는 삶의 기술이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자기 배려’는 내적 만족이 타자와의 관계로 형성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세네카가 세레누스에게 조언하고 그를 경청한 것, 세네카가 루킬리우스와 가진 우정의 관계가 그 예이다.
자기 배려는 “자기 변형의 총체”로서, “정화, 자기 수련, 포기, 시선의 변환, 생활의 변화, 실천, 경험의 전반” 이 포함된다. 푸코는 진리에 접근하고자 하는 이의 대가를 ‘영성’이라고 이야기한다[19]. 그러나 고대 철학 의자기를 돌보는 행위는 점차 중세 시대로 오며 자기 포기, 금욕으로 변화하였다. 푸코는 왜 이렇게 ‘자기 배려’ 의 의미에 천착하였을까? 그의 눈에 주체는 언제나 역사 속에서 담론을 형성한 권력에 철저히 예속됐고, 주체를 새롭게 예속화하는 방식은 언제나 권력을 통해 불연속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그의 눈에 권력에 저항하고 그것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힘은 모두 개인의 반성적사유에서 비롯되었고, 그 반성적 사유가 바로 자기 배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의 자기 전향, 그리고 칸트의 ‘실천 이성’ 모두 거대 담론에 맞서 개인이 개인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이성을 무기로 한 투쟁이었다[20].
2. 자기 배려의 변형
자기 배려는 헬레니즘 시대로 들어와 자기 전향으로 변한다. 즉, 자기 배려는 시선을 자기에게로 돌려 내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한다. 푸코는 덧붙여 사회적 실천으로 나아간 자기 배려의 예로 후기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에픽테토스(Epictète)의 경우를 꼽는다. 프레데릭 그로에 따르면, 푸코는 이 시기의 세네카, 에피쿠로스 등의 철학자들이 모두 자기 삶을 ‘실천’적 행위를 통해 창조한 실존의 증인들이었다고 지적한다. 이 시대 철학자들은 또한 공동체 속에서 교류하며 자신을 사회 공동체 ‘밖’에 두지 않았다. 스토아학파 시대의 직업 교사로서의 에픽테토스의 노력, 앞서 언급한 세네카의 서신,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편지’(Lettres à Lucilius)는 모두 자기 배려가 공동체 안에서 더 나은 삶을 지향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21].
푸코는 고대 철학의 자기 배려가 새로운 권력의 등장과 함께 왜곡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그리스·로마철학과 초기 기독교에서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의식을 관리하는 문화가 죄를 고백하는 행위, 더 나아가 모든 것을 고백하는 행위로 변형되었다고 폭로하였다. 그에게 기독교적 진실 말하기(dire-vrai chrétien)는 ‘고안’ 된 것이었다[22]. 푸코에 따르면, 사실 초기 기독교에 그리스 철학의 자기를 점검하고 의식을 관리하는 자기 배려의 문화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초기 기독교의 문화는 주체의 진실을 무작위로 캐내는 일련의 절차들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기독교 문화에서는 두 가지의 의무, 즉, 신앙, 성경, 기독교의 교리와 관련된 진실의 의무와 자기 자신, 영혼 그리고 마음과 관련된 진실의 의무가 존재한다. 그는 개인에게 요구되는 고백 의무(세례, 고해 성사, 의식의 관리) 중, 고해 성사를 집중적으로 해부하였는데, 원래 초기 기독교 문화에서 고해 성사는 의무적인 고백 행위가 아닌 교회 공동체 구성원이 집단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가 자신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정화’였다. 푸코는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계시(illumination de soi-mê ̂me)와 신성에서 오는 계시(illumination par la lumière divine)가 핵심인 기독교가, 고해 성사 (exomologesis), 고백의 의무(exagoreusis)와 같은 법적 형식을 만들어내는 ‘권력’으로 변형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자기 배려는 기독교의 ‘고행’과 ‘금욕’으로 변형되는 과정을 겪고, 그 후 데카르트의 주체 철학(‘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코기토)으로 발전하여 합리적 이성으로 왜곡되었다.
3.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자기 배려
사회는 어떻게, 무엇으로 변화되는가? 푸코는 자신의 지적 여정 끝에 위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근대적 주체와 ‘불화’하는 ‘새로운 주체’를 상정한다. 그는 명시적으로 해답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조명한 ‘자기 배려’에 내재한 자기 점검의 비판적 태도에서 유일한 가능성을 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고대의 ‘자기 배려’, 헬레니즘 시대의 ‘자기 배려’, 기독교 문화의 ‘자기 배려’를 살핀 것은 어떠한 자기 배려가 더 우월한지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권력에 포섭된 고행, 금욕처럼 ‘왜곡된 자기 배려’ 도 있었지만, 그는 자기 배려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타인과 사회를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그것을 사회적 실천 윤리이자 정치적 기술로서 재조명하려 하였다.
자기 배려는 정치적 행위이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구축하여 관계들(권력)을 ‘다르게’ 조정하기 때문이다. 후기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에픽테토스, 세네카, 에피쿠로스 등 철학자들은 모두 자기 삶을 ‘실천’하고 공동체를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자기 배려’는 개인이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양식이자 동시에 새로운 차원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도록 한다. 개인이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주인이 된다는 점에서 자기 배려는 우선 비판적 태도를 전제로 해야 한다. 푸코는 “어떻게 지배되지 않는 상태에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비판적 태도”라고 대답한다. 비판적 태도란 “관리하는 기술들 (arts de gouverner)에 맞서 적으로서, 동지로서 그것들을(관리하는 기술들) 의심하고, 거부하며, 제한하고, 그 속에서 적절한 방법을 찾는 것이며, 그것들을 변형시키는 것이며, 또한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면서, 본질적인 저항의 이름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라고 그는 설명한다[23]. 비판적 태도, 반성적 사유를 통해 주체는 자기 자신을 능동적으로 구축하는 윤리적 삶을 실천할 수 있다. 푸코는 칸트를 새로운 시대를 연 개인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이성으로 반성적사유를 통해 새로운 주체를 상정하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개인은 자기 배려를 통해서 전복적 사유와 삶을 실천할 수 있다[24].
IV. 윤리적 삶을 위한 자기 배려의 실천양식
1. 지배적 생각과 거리 두기
지금 이 시대에 더 많은 자유와 이동의 가능성을 품기 위하여 현대인은 무엇을 행동의 원칙으로 삼을 수 있는가? 디지털 기술이 정치, 문화, 경제의 구조를 바꾸고 인간의 감정과 의식이 구성되고 재현되는 방식까지 바꾸는 디지털 휴머니즘[25]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러한 기반 위에 급작스럽게 다가와 새로운 윤리적 차원의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 인터넷과 서점은 새로운 기술 권력의 영향으로 디지털 플랫폼 사회, 초연결 사회, 4차산업혁명, 인공지능 담론을 활발히 생산하고 있다. 기술 권력은 특정 학문 영역을 빠르게 소외시키고 있다. 문·사·철(문학, 사학, 철학) 로 불리는 인문학은 대학에서 퇴출 대상이 되어가고 있고, 이러한 학문을 자기 본성에 기초하여 선택한 대학생들은 ‘문과충’으로 불리며 패자로 만들어지고 있다.
푸코가 권력이 바뀌면서 새롭게 등장한 학문(통계학, 생물학, 의학), 그러한 학문으로 생산된 주체화를 파헤친 것처럼[26], 오늘날 현대인은 지금의 새로운 기술 권력에 대하여 푸코가 지적한 대로 “의심하고, 거부하며, 제한하고, 그 속에서 본질적 저항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27] 무엇을 제1의 행동의 원리로 삼을 수 있는가? 최근 인공지능 만능주의 담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학문 간 경쟁을 유도하는 대학 ‘통치’에 대하여, 개인은 어떠한 구체적 행동을 윤리적 실천의 양식으로 삼을 것인가? 자기를 배려하기 위해 먼저 지배적 생각과 거리 두기가 요구된다.
한국 사회는 최근까지도 집단의 논리와 가치를 개인보다 강조하였다. 여군 성폭력 피해자 자살 사건, 성 소수자 자살 사건은 소수자로서의 개인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통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은 집단의 시대가 아닌 개인의 시대라 말할 수 있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 평등, 존엄을 존중한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반성적, 성찰적 능력들을 신뢰한다. 그러나 이제껏 개인주의는 권력과 지배 담론에 맞서며 발전해 왔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정치적으로 소수의 논리, 좌파의 논리였다[28].
개인이 되고자 하는 대중의 욕망은 몇 년 전부터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현상이 ‘힐링’ 열풍이다. ‘힐링’은 몇 년 전부터 서점가를 점령하고 있는 대표적 문화 현상이다. ‘산과 바다로 떠나기’, ‘나 자신을 사랑하기’, ‘미움받을 용기’와 같은 주제는 미디어 출판, 여행, 식음료 광고를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힐링은 자기 계발에 가깝다. 그 이유는 산과 바다로의 여행, 요가 수련과 같은 자기 돌보기의 기술은 자기 자신에 변형을 가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 타자, 사회적 관계가 제외된 자기 돌보기라는 점이다. 현대인의 힐링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근원적 탐색과 성찰이 제외되어 자기 자신을 근본적으로 치유하고 회복하는 행위로 보기 어렵다. 자기 수양을 통해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 자기 자신을 완성할 때 느끼는 쾌락은 여행으로, 육체를 교정하는 일로 대체될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자기 배려’, 에피쿠로스의 ‘자기 돌보기’처럼 영혼의 치유를 위해 전제되어야 할 실천은 ‘거리 두기’이다. 거리를 두는 행위는 신중함의 증거이다. 그것은 <알키비아데스 1·Ⅱ>의 대화들과 델포이 신전의 ‘너 자신을 알라’에 내포된 의미이다. 소크라테스는 시종일관 정치를 알지 못하며 정치에 뛰어들고자 했던 알키비아데스를 타이르며 행동 전의 사태를 파악하는 신중함을 강조했다. 델포이 신전의 ‘너 자신을 알라’도 행동 전의 신중함을 환기하는 문구였다. 개인이 자기 자신을 삶의 지배자로서, 통치자로서 세우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할 일은 집단과 지배적 생각과 거리를 두는 일이다. 요컨대, 현대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한 목적에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개인은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자기 자신을 능동적으로 새롭게 구축할 계기를 맞이하고 있다. 개인은 지배적 생각과 거리를 두는 비판적 태도를 발휘하여 반성적사유를 실천해야 한다.
2. 주체적 사유의 연습과 글쓰기로 나를 형성하기
미셸 마페졸리(Michel Maffesoli)에 따르면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은 ‘취약성’으로 규정하였다. 경계의 취약성, 정체성의 취약성, 제도의 취약성, 거대 담론의 취약성이 바로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이다[29]. 이러한 취약성은 ‘탈(脫)경계’, ‘탈 규칙’, ‘탈 형식’, ‘탈 표준적’ 삶을 지향하는 개인과 집단의 현상에 근거한다. 포스트모던 사회는 또한 이미지가 실체보다 중요시되는 사회이다. 즉, 이미지에 대중의 욕망이 매개된다[30]. 개인은 이러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어떻게, 무엇으로, ‘나’를 구성하는가?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한 공론의 장에서, 현실과 가상이 교차하는 사회적 공간에서, 오늘날 현대인은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주체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현대인에게 필요한 실천양식은 바로 ‘철학적 독서’이다. 철학적 독서는 원래 자기 생각을 검토하며 확립하기 위한 훈련으로 이루어졌다. 푸코는 철학적 독서가 ‘명상’을 위해 행해졌다고 말한다. 고대의 명상은 오늘날 현대인들의 ‘생각 비우기’와 ‘머리 비우기’와 다른 사유의 훈련이었다.
라틴어, meditatio는 명사, ‘훈련’의 meletê와 동사, ‘연습하다’, meletan을 번역한 단어이다. 그리스어로 ‘연습하다’의 meletan은 ‘사유의 훈련’을 의미한다. 이는 생각한 바를 뇌리에 새겨지도록 반복해서 말로 내뱉는 데 초점을 두었다. 반면, meditatio는 ‘동일시의 경험’을 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푸코는 명상이 주체를 허구적 상황으로 이동시키는 훈련이라고 보았는데, 이것은 meditatio의 의미에서 유래한다. 요컨대,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적 독서는 사유하는 대상에 자신을 놓는 것이었고, 사유하는 대상이 몰고 올 결과들을 떠올리는데 목적이 있었다.
오늘날 현대인은 독서를 통한 주체적인 사유의 형성보다 저자의 생각을 흡수하는 데 그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고대의 독서가 갖는 “동일시의 경험”이라는 본질을 살펴보아야 한다. 독서를 통한 동일시의 경험이란 무슨 의미인가? 가령, 우리가 독서를 통해 코로나 19 바이러스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지식(정보, 감염경로, 사망자 수)이 아니라 아프리카, 인도와 같은 빈민국 사람들이 백신을 구하지 못해 죽음에 직면한 상황, 즉 국가 간 불평등, 사회적 거리 두기를 통해 사회로부터 방치된 채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공감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동일시의 경험은 철저한 독서를 통해 이루어지고, 동일시의 경험은 개인이 사회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철학적 독서는 주체적 사유, 글쓰기의 원동력이며, 자신을 새롭게 변형시키는 자기 배려로 귀결된다. 헬레니즘 시대의 세네카와 에픽테토스는 독서가 글쓰기와 병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세네카는 그 두 작업이 수시로 번갈아 가며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였고, 에픽테토스는 명상하고 글을 쓰는 행위가 자기 수련 행위이며 철학자들이 지속해야 할 행위라고 언급하였다.
독서를 통해 촉발된 자기 생각을 글로 쓰는 작업은 개인적 차원에서 두려움 없이 진실한 것, 즉 윤리적 ‘파레시아’에 해당한다. 참된 독서는 참된 자아를 구성하게 하고, 진실한 자신을 드러내도록 하는 용기를 준다. 그리고 그 용기가 타인과 사회를 변화시킨다. 요컨대, 철학적 독서는 ‘파레시아’를 가능하게 한다. 동시에 독서는 타인의 파레시아를 읽고 이해하도록 하며 성숙한 사회를 구성하도록 한다. 일상에서 행하는 철학적 독서는 진실한, 용기 있는 개인을 형성하여 결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근본적 힘으로 작동한다.
3. 앎을 일상에서 실천하기
우리 사회의 지도층은 상대적으로 높은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기술이 발달하고 사회조직 시스템이 정교해질수록 발생하는 금융, 보험사기, ‘소라넷’과 같은 불법 사이트 운영, 이른바 ‘화이트 범죄’가 늘어난다. 앞서 충분히 고찰한 자기 배려에 따르면, 현실에서 이러한 범죄는 절대로 지식을 갖춘 학력 높은 이들에게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사회의지식(앎)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앎을 획득하는 방법의 문제인가?
푸코는 진리가 주체에게 ‘다가온다’라고 했다. 즉, 진리를 얻기 위해 주체는 인내, 탐구라는 육체적, 정신적 행위를 주체 자신에게 가해야 한다. 진리는 수양을 통해 얻게 되는 일종의 ‘깨달음’이다. 진리에 도달한 자는 고행의 시간, 그 속의 윤리적 행위를 기꺼이 행하여 내면의 악습을 제거한 자이다. 즉, 아는 자는 윤리적인 사람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신이 축적한 지식으로 일상에서 공동체, 사회를 의식하는 삶을 살아가는지 자문해야 한다. 어떤 지식이 몸의 운동을 통해, 시간의 궤적을 통과해 구축된 산물이 아니라면, 그 지식은 윤리적 주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윤리적 주체로 구성되지 않는 사회는 변화의 가능성을 품을 수 없다. 더 많은 이동의 자유를 품는 개인, 권력에 해당하여 전복적인 삶을 감행하는 용기 있는 개인들이 출현하는 사회는 사회의 단자가 되어 ‘원심력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세네카는 “사유하는 바를 말하고 말하는 바를 생각하고 언어가 행동과 일치하게 만들기”를 제시하였다[31]. 이는 ‘파레시아’(parrhê ̂sia)이다. “진실을 말하는 주체와 이 진실이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주체 간의 일치” 를 의미하는 ‘파레시아’는 진실이 ‘말하는 개인’으로, ‘행동하는 개인’으로 변형시킴을 뜻한다. 오늘날 선거철이면 정치인들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타인을 비방하며 자신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회변화는 ‘위로부터의’ 권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원자 단위의 자기 변형을 가하는 개인에 의해, 타자에게 영향을 주는 개인, 영향을 받는 개인으로부터 이루어진다. 두려움 없이 진실을 말하는 개인은 앎을 삶으로 실천한 개인이다. 요컨대, 우리는 진정한 앎을 통해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앎을 삶으로 실천하기 위해 일상 속에서 개인은 도전하고 인내하며 시련을 기꺼이 겪는 자세를 통해 진실한 주체, 윤리적 주체로 거듭난다고 볼 수 있다.
4. ‘굽어보는 시선’의 연습
성찰은 개인적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 차원으로 나아간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헬레니즘 로마 시대의 ‘자기로의 전향’을 자기 배려의 완결된 형식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시대의 철학자들이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여 오직 자기 자신만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공동체의 선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푸코는 세네카의 저서들에 관류하는 삶의 기술, ‘굽어보는 시선’에 천착하였다. 이 시선은 세계를 인식하고 난 후 새롭게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기술이다. 세계란 나를 둘러싼 존재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회, 국가 그리고 국경을 넘어 존재하는 이들이 살아가는 ‘현실태’를 의미한다. ‘굽어보는 시선’은 성찰의 기술로서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함몰되지 않고 사회적 맥락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읽는 후퇴의 기술이다.
굽어보는 시선은 이 세상을 ‘총체성’ 속에서 파악하도록 한다. 총체성은 ‘시간’의 총체성, ‘관계’의 총체성 속에서 자기 자신을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시간의 총체성은 우주적 관점에서 일시적인 것, 덧없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굽어보는 시선은 우리 자신이 한시적인 대상에 매몰되어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세네카에 따르면, 인간은 책무와 보상의 체계에 예속된 삶을 살아간다. 즉, 우주적 관점에서 한시적인 명예, 재산, 권력을 인간은 추구하며 자기 자신을 도구화하며 살아간다고 보았다. 세네카의 눈에 인간은 이러한 한시적인 것들을 더 많이 갖기 위해 스스로 너무나 많은 책무를 자기 자신에게 부과하는데, 정작 추구해야 할 행복과 쾌락은 모두 자기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관계의 총체성은 현재의 나를 세계의 맥락에 위치시키면서 공동체의 부분으로서, 더 넓게는 세계 속에 속한 ‘나’로서 ‘나’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세네카의 “위대한 것은 자신의 영혼을 입술 가장자리에 위치시키고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다”의 문장은 나 자신을 생성하게 만든 것이 타자이며, 나의 삶은 결코 공동체의 삶을 벗어나 존재하지 않음을 함축한다. 요컨대 ‘굽어보는 시선’은 시간의, 관계의 전지적 시점에서, 현 실태로 서의 나를 성찰하는 일상의 기술이다.
V. 결론
본 연구는 이 시대의 개인이 가속의, 경쟁의 사회에서 자기충족적이며 윤리적인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한 실천 윤리를 푸코가 천착한 자기 배려의 개념을 통해도 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먼저 역사적으로 변형된 자기 수양의 방식(예를 들어 영혼 수련, 자기 전향, 고행과 금욕, 자기 인식 등)들을 고찰하고, 오늘날 윤리적 주체의 자기를 배려하는 실천의 행동 원리들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푸코 자신은 철학 작업 전체를 통해 새로운 주체는 무엇이며, 무엇으로 구성되는지, 대안이 무엇인지 명확히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본 연구는 그가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 고대의 능동과 절제의 삶의 기술에서, 그의 저서, <비판이란 무엇인가?>에서 강조된 자유의 실천을 위한 ‘비판적 태도’에서 그가 상정했던 새로운 실천 윤리학에 근거하여 오늘날 현대인의 자기 배려의 실천 윤리를 새롭게 제시하고자 하였다.
서론에서 밝혔듯이 오늘날 ‘자기 배려’의 실천양식이 필요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으로 인한 폐해, 둘째, 개인주의에 대한 재고, 셋째, 윤리적 주체에 대한 시대적 요청이었다. 먼저, 자기 배려는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 시스템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타진하도록 한다. 자기 배려는 개인이 처한 관계망의, 권력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전복적 사유이자 행동이기 때문이다. 둘째, 개인들에 의한 새로운 권력의 생성이었다. 이제껏 권력은 위로부터 아래로 향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지식 사회의 권력은 합리성과 공정성을 기초로 하는 개인들에 의해 생성되고 있다. ‘거침없이 말하기’ 위한 유튜브, 플랫폼 기반의 업무와 의사결정은 우리 사회가 개인에 의해 움직이고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재택근무의 일상화, 사회적 거리 두기로 개인은 그 어느 때보다 집단의 가치와 논리를 거리를 두며 성찰할 기회를 안았다. 젊은 세대의 귀촌, 자발적 백수 되기 현상은 결코 마케팅이 낳은 현상이라고 결코 보기 힘들다. 셋째, 윤리적 개인에 대한 시대적 요청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상생하는 권력이 아닌 독점하는 새로운 권력을 등장시켰다. 기술은 우리의 의식과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있고, 4차산업혁명 담론과 거대 플랫폼 기업이 재편하고 있는 산업 및 문화예술 생태계에 대항하는 대안 담론들은 지금보다 더 활발해져야 한다. 팬데믹 시대의 개인은 새로운 권력과 거리를 두고 성찰하는 주체,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자기 배려이다.
자기 배려는 자기가 자기와 맺는 도덕적 행동에 관한 관계, 자기가 타자와 맺는 관계와 관련된 실천 윤리였다. 고대 사회의 철학자(소크라테스)로 촉발된 자기 배려는 자신처럼 타인(알키비아데스)에게 마음을 쓰며 변화시켰다. 헬레니즘 시대의 자기 배려는 개인과 개인 간에 서로의 영혼의 성장을 일깨운 실천이었다. 오늘날 현대인의 자기를 돌보는 행위는 자기 배려로 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예를 들어 힐링 여행, 요가와 필라테스의 유행, 주식 투자, 일인 일식 열풍은 주체가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기 위해 감내하는 인내와 수련의 의미가 약하기 때문이다. 즉, 자기 배려는 도덕적 주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이러한 자기 돌봄은 주체화의 또 다른 방식으로서 미디어 권력이 만들어 낸 예속적 주체화에 가깝다.
본 연구는 팬데믹 시대 현대인의 윤리적 삶을 위한 실천양식들을 네 가지로 보았다. 첫째, 지배적 생각과 거리 두기, 둘째, 주체적 사유의 연습과 글쓰기로 나를 형성하기, 셋째, 앎으로 삶을 실천하기, 넷째, ‘굽어보는 시선’의 연습이다. 이러한 실천양식들은 권력에 예속되지 않는 자기 자신이 되고, ‘자기에게 이르는’ 즉, 자기변형을 통해 타자를 변화시키는 윤리적, 사회 실천적 행동이다.
결국, 지금의 현대인은 ‘무엇으로 나를 완성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더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것인가?’를 묻고 자기를 변형시키려는 필연적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그것은 피상적 자기 계발이 아닌, 자기를 완성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변화 가능한 개인들의 집합’, 즉 사회 속에 두기 위함이다. 팬데믹 시대의 현대인은 ‘연결된 나’라는 인식 속에서 고유한 삶을 구축해 가야 한다. 끝으로 푸코는 자신의 지적 작업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형태가 무엇인지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기 배려의 의미를 고찰한 바에 따르면, 새로운 사회는 변화의 가능성을 사회 내부에 응축한 사회일 것이다. 즉, 그 사회는 자기 배려를 실천하는 개인들이 변화의 실마리를 찾고 언제나 대안을 제시하는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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