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I QR코드

DOI QR Code

A Study on the Meaning of Geometric Analysis of Gameun Temple's Taegeuk Shapes

감은사 태극문양의 기하학적 의미 연구

  • 김일환 (공주대학교 한문교육학과) ;
  • 박태봉 (공주대학교 한문교육학과)
  • Received : 2021.02.19
  • Accepted : 2021.04.03
  • Published : 2021.06.28

Abstract

This paper discusses the geometrical interpretation of the Taegeuk Shapes of Kameun Temple through the geometric analysis of mathematics. Based on the literature, This paper attempted to clarify that the origin of Gameunsa's founding of the spirit of patriotism may coincide with historical records through historical literature and geometric meaning. First, the background of the founding of Kameun temple, geographical location located near the East Sea, especially the history of the ancient Chinese mathematics at the time, And that mathematical knowledge influenced all fields such as agriculture, architecture, and art. Secondly, it is related to the historical record as the space of about 60 centimeters, which is uniquely underground, was identified as the structure of the excavated space. It is thought that there is a strong correlation with the origin that the King Munmu changed into a dragon, and set up the temple to be able to stay. Based on these, the clues of the interpretation of the taegeuk and the triangular pattern were searched in the samcheon yanggi(參天兩地) of the Oriental and circumference of the Western. The taegeuk and triangular patterns represent the symbols of yin-yang harmony, which correspond to the origin of its creation. the Korean people regarded the mysterious dragon as a symbol of yinyang harmony. In conclusion the Shapes of Kameun temple's stone is consistent with the contents mentioned in the historical record.

본 논문은 감은사 금당지 석재의 태극문양 의미를 기하학적 도형원리를 통해 고찰하는데 목적이 있다. 감은사의 태극문양에 대해서는 수리천문학적으로 해석한 것이 고작인데, 본 논문은 문헌을 바탕으로 기하학적 의미를 통하여 호국정신의 감은사 창건유래가 역사기록과 일치할 수도 있음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특히 창건유래와 지리적 위치, 당시 최고 교육기관인 국학에서 『구장산술』을 교육과목으로 한 점과 수학 지식들이 당 농업과 건축, 예술 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준 점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발굴된 금당의 구조가 약 60cm 높이의 석조유구로 지하공간을 이루고 있어 금당 아래에서는 동해 바닷물이 바로 감은사지 아래까지 들어오는 '문무대왕 수중릉→용지→용당'으로 이어지는 용수로의 흔적과 역사기록 등을 고려하면, 이를 전설이나 고사로 치부하기 보다는 해룡이 머무를 수 있도록 감은사를 창건했다는 유래와 깊은 상관성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금당지 석재의 태극문양과 태극의 좌우로 톱날과 같은 삼각형문양 해석의 실마리를 동양 천원지방(天圓地方)과 서양 원(圓)도형의 원주율과 관련된 원적(圓積)에서 찾아보았다. 결론적으로 태극과 삼각형 문양은 음양조화의 상징인 용(龍)과 신(神)을 나타내는데, 이는 창건유래와 부합하는 상징도형으로 우리민족이 신비한 용을 음양조화의 상징으로 보았고 이에 대응한 음양조화 도형인 태극문양을 사용하여 신성시해 왔다는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다.

Keywords

I. 서론

감은사는 682년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현재는 금당 터와 석탑 및 각종 석조 유물들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역사적 기록이나 동해를 지근에 둔 위치적 특성 그리고 사찰 건축의 특이한 구조, 특히 금당 터의 독특한 구조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주춧돌과 장대석들이 마치 마루를 깔 듯이 지하에 공간을 만들고 있으며 이 공간에 동쪽으로 구멍을 내어 동해와 연결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기존의 연구는 주로 건축, 석탑 등 발굴된 유물을 통한 문화재 분석 논문들이 대다수였지만 최근 수리 천문학적 입장에서 작성된 색다른 논문[1]이 있는데, 이 논문에서는 감은사지 석재의 태극문양과 이등변삼각형이지구 공전·달의 만월 주기를 나타내는 “해와 달의 운행을 계산하는 고도의 천문학적 상징체계”라고 새롭게 해석하면서, 이는 7세기 신라인들의 응집된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오래된 천문교과서’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천문학적 도형으로 해석한 것은 이러한 문양이 생기게 된 창건 연혁과 역사기록을 도외시한 데다 현장에서 직접 문양을 확인한 결과 많이 마모되어 삼각형의 수도 논란이 될 수 있다. 선행연구에서는 삼각형 수가 논문 전개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기록 및 당시 통일신라시대의 과학수준과 학문의 국제교류, 그리고 발굴된 유물 등을 종합하여 연구하는 새로운 해석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본 논문의 새로운 연구 방법은 역사자료를 근거로 창건유래의 관점에서 일반적인 사실 위주의 논법과 추론을 통해 태극 도형의 기하학적 의미를 밝혀 당시의 과학 수준을 가늠할 뿐 아니라 호국정신의 감은사 창건의 깊은 뜻을 올바르게 드러내고자 한다.

그동안 감은사 석재의 문양이 주목을 받아온 이유는 대체로 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문양 때문이다. 일반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태극은 경주 감은사 석재에 새겨진 태극문양이다. 이는 송나라 때 나온 중국의 태극문양과는 다른 우리나라 태극문양의 원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문양을 태극 도형이라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더군다나 선형문의 태극문양은 고대의 여러 민족들도 널리 사용하고 있었고 발견되는 지역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시대까지 나타나는 태극은 완전한 태극 형태라기보다는 파상문, 혹은 선형문에 가까운 모양을 띄고 있다.

그런데 감은사 석재에 새겨진 태극문양을 현장에서 살펴본 결과, 신라의 왕관에 쓰던 곡옥의 형태와 같은 태극문양과 더불어 톱니 같은 이등변삼각형 32개(태극문양을 중심으로 좌우 각각 16개)가 새겨져 있다. 이 중 태극문양을 이태극문으로 볼지 사태극문으로 볼지는 논란이 될 수 있지만 서로 꼬리를 물고 회전하는 바람개비 형태의 태극문양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본다.

본 논문에서는 첫째, 감은사 유래와 시대적, 지리적 특성 및 건축 구조적 특성을 역사 사료를 통해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중국수학서인 구장산술, 주비산경 등에 포함된 圓方원리, 圓積문제 등을 통해 감은사 석재 태극문양의 기하학적 특성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셋째, 기하학적 분석을 통해 감은사 석재의 태극 및 삼각형 문양의 의미를 해석하여 감은사 창건 유래와 역사적 史實과의 상관성을 밝히고자 한다.

CCTHCV_2021_v21n6_435_f0001.png 이미지

그림 1. 2009년 복암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목간

CCTHCV_2021_v21n6_435_f0009.png 이미지

그림 2. 감은사지 석재문양(*감은사 발굴시 사진임)

Ⅱ. 감은사 연혁과 연관성

1. 창건 유래와 역사

문무왕의 호국 호법 대원과 감은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상세히 적혀 있다. 『삼국유사』 문호왕법민조에 “문무왕이 사후 호국대룡이 되어 나라와 불법을 지키겠다”(朕身後願爲護國大龍 崇奉佛法 守護邦 家)[2]는 구절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21 년조에도 “7월1일 왕이 죽자 시호를 문무라 하고 군신이 유언에 따라 동해구의 대석위에 장사하였고, 俗傳에왕이 변하여 용이 되었다 하니 이에 그 돌을 가리켜 대왕암이라 한다.”(秋七月一日王薨諡曰文武 群臣以遺言葬東海 中大石上俗傳王化爲龍仍指其石爲大王石)[3]라고 적혀 있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는 “제31대 신문대왕이 부왕인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 해변에 감은사를 지었다. 절 기록(사중기)에 이르기를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하여 처음 이 절을 짓다가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으며,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682년에 끝마쳤다. 그의 아들 신문왕이 이때 건립된 금당 섬돌 아래에 용이 들어와 서리고 있게 하기 위한 구멍 하나를 동쪽으로 두었고, 대개 왕의 유조로써 문무왕의 유골을 묻은 곳을 ‘대왕암’이라 하였고 사찰의 이름을 ‘감은사’라고 하였다. 뒤에 용의 현황을 본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爲聖考文武大王, 創感恩寺於東海邊(寺中記云) 文武王 欲鎭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其子神文立開耀二年畢 排金堂砌下東向開一穴乃龍之入寺旋繞之備蓋遺詔之藏骨處 名 大王岩 寺名感恩寺 後見龍現形處 名利見臺)[4]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현유가해화엄조에는 “대덕 법해가 신력으로 동해의 바닷물을 넘치게 하였다는 고사에는, 바닷물이 넘쳐 감은사의 불전 섬돌 앞까지 이르렀다가 저녁 무렵 물이 빠졌다고 전한다.”(海水漲溢至佛殿階前晡時而 還)”[5]는 구절과 고려시대 또 다른 기록으로 이숭인의 「초옥자전」에 “동해를 바라보며 감응사에서 놀며 용혈을 들여다보았다.”(上佛國寺之東峯望扶桑游感應寺窺龍穴登 利見臺舟至大王亦東海之奇觀)[6]는 구절이 있어 그 당시까지 감은사와 용혈이 역사적 사실로서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감은사는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30 대 문무대왕이 죽어 용이 되어서라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서린 곳이며 삼국통일의 기념물이라 더욱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기념비적인 건축물(탑과 불상)은 창건목적에 중점을 두어 살펴봐야 석재에 새겨진 문양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속돤 기념물의 경우 창건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건축물과 상징도형들은 역사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지역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龍 池 복원 운동협의회가 결성되어 있다. 이들은 양북면 용당리 용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龍자와 神자를 먹으로 쓴 목간 등이 발굴되었고, 문화재청 홈피의 감은사지 설명에 “금당의 지하에는 배수시설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죽은 문무왕이 바다용이 되어 이 시설을 통해 왕래하였다고 전해진다.”[7] 고 하면서 복원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있다.

2. 지리적, 건축 구조적 연관성

감은사지는 지리적으로 동해가 만나는 東海口며, 이곳은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양북면을 가로질러 동해로 흘러드는 대종천의 하류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대종천의 흐름을 700m 정도 따라 가면 동해변에 이르는데,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경주 문무대 왕릉(사적 제158 호)’이 있다. 또 사지에서 산자락을 따라 남동방향으로 600m 가량 이동하면, 신문왕대에 박숙청이 용을 친견하고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고사와 관련이 있는 ‘경주 이견대(사적 제159호)’가 있다. 감은사지는 동해와 직접 연결된 대종천의 하류에 있어, 과거에는 대종천이 범람하면 물이 바로 감은사 아래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왜구로부터 신라를 지키기 위하여 용이 된 문무왕이 머무를 수 있도록 감은사를 지었다는 유래와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8].

감은사 건축물의 특성의 경우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은 감은사지 금당 앞에 나란히 서 있으며, 높이는 동탑 13.3m, 서탑 13.7m이다. 두 탑은 각 부의 수치와 결구방식까지 동일한 의장을 갖추고 있다. 우선 기단은 이중기단[9]인데, 감은사지 석탑에 이중기단이 출현하게 된 원인이 금당기단과 비례하여 급격하게 높아진 탑 기단의 미적 불균형과 구조적 불합리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금당 기단에 지하공간을 마련한 감은사 금당의 특수성에서 유래하였다고 유추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석탑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방식이다.

중문의 남쪽에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龍潭 이라 부르는데, 감은사가 대종천변에 세워졌고 역사 기록대로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어 있고 또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금당지 앞의 석재 중에는 태극과 삼각형 문양이 새겨진 것이 좌우로 두 곳 있는데, 이 문양의 의미를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의 과제이다.

CCTHCV_2021_v21n6_435_f0002.png 이미지

그림 3. 1959년 1차 발굴 때 발견된 동편(右)과 1979년 2차 발굴 때 발견된 서편 태극 장대석(직접 촬영)

CCTHCV_2021_v21n6_435_f0003.png 이미지

그림 4. 선명한 태극과 이등변삼각형,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2011.8.19)

금당의 구조로는 금당 아래에서는 특이하게 지하 공간을 이룬 石造遺構가 조사되었다. 윗면에 남북으로 홈을 둔 사각형의 돌을 정면 6열, 측면 4열로 놓고 이 홈들에 장대석을 끼워 연결하고, 그 위에 동·서 방향으로 장대석들을 마루널처럼 잇대어 깔아 약 60㎝ 높이의 지하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이 공간 유물은 동해의 해룡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용혈을 내었다는『삼국유사』 만파식적 조의 기록과 부합된다.

CCTHCV_2021_v21n6_435_f0004.png 이미지

그림 5. 1959년 1차 발굴 때 발견된 금당터 유구,

출처 : 경주이야기http://gjstory.com/

Ⅲ. 석재 태극문양의 기하학적 해석

1. 시대적 배경과 기하학적 이론

우리나라 수학은 중국 수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중국 고대의 수학 책『九章算術』은 삼국시대 이후부터 줄곧 영향을 끼쳐 왔다. 동양의 수학은 실생활에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활용되었는데, 농업사회에서 토지의 넓이를 재고 수확량을 계산하는데 사용되었다. 더 나아가 수학은 각종 건축물을 짓는데 널리 사용되었다. 통일신라의 서원경 지방의 네 개 마을에 있었던 재산목록이 적힌「신라장적」에는 마을의 둘레, 호수 넓이, 논과 밭의 넓이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산사(수학하는 사람)가 필요하고 이들을 교육하는 교육기관도 필요하였고 이러한 수학지식을 담은 교육과목의 중심에『구장산술』이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이 책이 널리 알려지고 활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권제38 잡지제7에 “국학은 예부에 속하였는데 신문왕 2년(서기 682)에 설치하였고 경덕왕 때 그 명칭을 태학감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교수하는 방법은『주역』, 『상서)』, 『모시』, 『예기』, 『춘추좌씨전』, 『문선』으로 구분하여 과정을 삼았으며 박사와 조교 1명이『예기』, 『주역』, 『논어』, 『효경』을 가르치거나 혹은『춘추좌전』, 『모시』, 『논어』, 『효경』을 가르치거나 혹은『상서』, 『논어』, 『효경』, 『문선』을 가르쳤다. 모든 학생들이 독서함에 있어서 3품 출신으로서『춘추좌씨전』을 읽고『예기』나『문선』의 뜻을 통달하고, 동시에『논어』, 『효경』에 밝은 자는 상급이 되고『곡례』, 『논어』, 『효경』을 읽은 자는 중급이 되었으며, 『곡례』, 『효경』 만을 읽은 자는 하급이 되었다. 5경 3사 제자백가서를 전부 통달한 자는 등급에 관계하지 않고 발탁하였다. 산학박사와 조교 1명으로 하여금『철경』, 『삼개』, 『구장』, 『육장』을 가르치게도 하였다.”(國學屬禮部神文王二年置景 德王改爲大學監 惠恭王復故···敎授之法以周易尙書毛詩禮記春 秋左氏傳文選分而爲之業博士若助敎一人 或以禮記周易論語孝 經或以春秋左傳毛詩論語孝經或以尙書論語孝經文選敎授之諸 生讀書以三品出身讀春秋左氏傳若禮記若文選 而能通其義兼明 論語孝經者爲上讀曲禮論語孝經者爲中讀曲禮孝經者爲下若能 兼通五經三史諸子百家書者超擢用之或差算學博士若助敎一人 以綴經三開九章六章敎授之)[10]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구장산술』에서 본 논문과 관련된 것은 농지의 면적을 다루는 제1장 ‘방전’중 圓田이다. 원 모양의 밭을 원전이라고 했는데, 원의 넓이를 구할 때 원주율이 문제가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에 가장 많이 사용된 원주율은 π=3이었다. 구장산술에서도 일관되게 π=3을 택하고 있다. 아래 그림은 구장산술의 원리를 나타내며 아래 그림을 보면 위의 설명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CCTHCV_2021_v21n6_435_f0005.png 이미지

그림 6. 원 면적 구하는 법,

출처 : watermelonbaby.tistory.com

다음 장에서 고찰할 태극과 이등변삼각형 문양 연구에 필요한 두 번째 과제인 天圓地方을 동양수학의 원전인『周髀算經』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동양 수학의 기본도형은 圓과 方이었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천원지방이라 하여 하늘은 둥그런 원과 양을 상징하고, 땅은 네모난 방과 음을 상징한다고 여겨 왔다. 『주비산경』권상5 에 “네모는 땅에 속하고, 원은 하늘에 속한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方屬地圓屬天天圓地方)고 했고, 또한 주공이 “수가 어디에서 나왔는가?”하고 묻자, 이에 대해 상고가 卷上2에서 “수의 법은 원과 방에서 나온다. 원은 방에서 나오고, 방은 구에서 나오며, 구는 구구 팔십일에서 나온다.”고 대답한다(數之法出于圓方 圓出 于方方出于矩矩出于九九八十一)[11].

위의 문장들은 본 논문이 규명하고자 하는 석재의 태극과 이등변삼각형의 문양을 해석하는데 필요하다. 먼저 圓出於方의 개념 또한『주비산경』에 나오는 “구를 돌려서 원을 만든다(環矩以為圓)”는 내용과도 통한다. 矩 란 앞서 말했듯이 수직을 재고 그리는 ‘ㄱ자 모양의 공구인 曲尺이다. 矩는 비록 직각과 네모를 그리는데 사용하지만, 그 ’ㄱ‘자 모양은 사실 세 점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이다. 고로 矩를 돌린다는 것은 삼각형을 돌려서 그 이어지는 선들로 원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다음으로『주비산경』에서는 “구를 합하여 방을 만든다. (合矩以爲方)”는 말도 나온다. 이 문장에서 矩를 삼각형으로 해석하면 삼각형 둘을 합해서 사각형을 만든다는 뜻이 된다. 이제 “원은 방에서 나오고, 방은 구에서 나오며 구는 구구팔십일에서 나온다”의 문장의 의미가 확실해진다. 여기서 ‘九九’ (伏羲作九九之術)[12]는 그것이 도형으로 나타날 때는 바둑판과 같은 격자 모양으로 나타난다. 이 격자(구구단)가 모여서 矩가 되고, 구가 모여서 네모를 이루어 方이 되며, 이 방의 절반으로 된 삼각형의 구를 돌리면 圓이 된다는 말이다.

또 『주비산경』권상2에 句股정리가 있다. “구를 잘라서 밑변(句)의 길이를 3으로 하고, 높이를 4로 하며, 빗변을 5로 만든다.”(故折矩以為句廣三股修四徑隅五)이 때 句는 삼각형의 밑변으로 3이고, 股는 삼각형의 높이로 4가 되며 弦은 삼각형의 빗변으로 5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왜 각각 3, 4, 5로 했는지는 바로 원과 방의 이치 때문이다. 원의 지름이 1일 때 원의 둘레는 3이 되는데, 이것은 원주율(π)을 3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원의 둘레 값 3을 구(3)로 보았기 때문이다. 방(정사각형) 경우는 한 변의 길이를 1이면 둘레는 4가 되어 이를 고 (4)라 했다. 이는 수학의 기본 도형을 원과 방으로 보았고, 원과 방이 의미하는 천지가 만물의 근원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天은 원으로, 양으로, 홀수로 나타나며 하늘은 둥글어서 3을 얻으므로 원을 대표하는 숫자가 바로 ‘3’이란 의미이고 3은 역에서 모든 수의 기본이 되는 핵심적인 수가 된다. 역학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복희팔괘가 3효로 이뤄졌다는 사실과, 筮法에서 하나의 효를 결정하는데 세 번을 거쳐야 하는 것도 그 증거가 된다[13]. 이와 관련『주역』설괘전에도 “하늘을 셋으로 하고 땅을 둘로 해서 이것으로 수가 성립되었다.”(參天兩地而倚數)고 했는데, 이를 주자는『주역본의』에서 “양을 대표하는 하늘은 둥글고 음을 대표하는 땅은 네모난데, 원은 지름이 1이라 하면 주위의 길이는 3이고 주위가 3인 경우는 1 로서 1을 삼기 때문에 하늘을 셋으로 하여 3이 되고, 네모는 지름이 1이라 하면 주위 길이가 4이고 주위가 4인 경우 2로서 1을 삼기 때문에 땅을 둘로 하여 2가 되었는데 수는 이것으로 성립되었다.”(天圓地方圓者一 而圍三三各一奇故參天而爲三方者一而圍四四合二偶故兩 地而爲二數皆倚此而起)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하늘과 땅으로 상징되는 원과 네모는 동양 철학에서 음양을 대표하는 도형으로, 원은 하늘(天)의 무한함과 동적인 속성을 상징하고 네모는 땅(地)의 유한함과 정적인 속성을 상징한다. 『회남자』천문훈에서는이를 “하늘의 도(순환운행)는 둥글고 땅의 도는 네모나다."(天道曰圓地道曰方)라고 하였다. 이는 ‘동태적인 작용면’에서 바라 본 천도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원은 ‘둥글다·돌다·둘레·완전하다’라는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데, 『說文』에서 圓을 ‘全也’, 『玉篇口部』에서도 圓을 ‘周’라고 한 것을 보면 원으로 상징되는 천도는 무한 순환 운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태극과 이등변삼각형(鋸齒) 문양

본 논문의 목적은 금당지 석재에 태극과 이등변삼각형 문양이 새겨진 것이 좌, 우로 두 곳 있는데 이 문양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선행논문들을 분석하였지만 대부분 건축물(석탑, 불상, 사리)과 금당 구조, 그리고 감은사 창건 고사 등에 관련된 것이고 수학자들에 의해 ‘일월의 운행을 계산하는 천문학의 상징체계’ 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었다.

본 논문에서는 특히 금당의 구조에 주목하였는데, 『삼국유사』기이 제2 만파식적의 기록에 있는 용혈처럼 실재로\ 금당 아래에 약 60㎝ 높이의 지하공간인 석조 유구가 확인되었다. 감은사지가 동해와 직접 연결된 대종천의 하류에 위치해 있고 대종천이 범람시 바닷물이 바로 감은사 아래까지 들어왔다는 점과 결부하면 창건 유래와 깊은 상관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금당지 석재의 태극문양과 태극의 좌우로 톱날과 같은 원적의 장방형 같은 문양을 태극과 이등변삼각형(鋸 齒), 神과 圓, 그리고 조화의 상징인 龍의 상징 및 이들 간의 연관성을 동·서양 기하학 지식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는 문양들이 “문무왕이 죽어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했고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듯으로 감은사라 하였고, 법당 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는 창건 유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기하학도형에서는 기원전부터 원주율과 관련된 圓積문제[15]가 대두되는데, 그리스의 아낙사고라4 스가 기하학문제를 만든 것이 바로 “원과 같은 넓이를 가진 정방형을 작도하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세계 3대 난문의 하나인데 바로 감은사 석재의 문양을 해석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금당 석재의 태극문양은 그 모양이 일정한 여백을 사이에 두고 음양의 양의가 서로 꼬리를 물고 회전하는 바람개비 형태로 되어 있어, 송대 주돈이의 태극도와 그 이후의 여러 태극 도형과는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주돈이의 태극도설 이전에 나온 사찰건물에 보이는 태극문양은 유가의 음양원리나 태극 도형과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 민족의 우주관과 생명관을 상징하는 정신문화 소산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들 태극문양은 사찰뿐만 아니라 보검, 보관 등에도 장식되었는데, 신라 미추왕릉에서 출토된 금제감장보검의 3태극문양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주돈이의 태극도와 달리 송나라 때 조휘겸이 전했다는 ‘천지자연지도’와 명초 조중전의 도학정종에 실린 ‘고태극도’가 있는데, 이 두 그림은 오히려 우리나라 태극기의 태극도형과 유사하면서도 3태극의 세 가지 요소(음·양·중, 음·양·생기)를 포함하고 있다[15].

그림 8. 한동석, 『宇宙 變化의 原理』, p.373 : 古太極圖

출처: 明初 趙仲全의 道學正宗, 淸代 胡渭의 易圖明辨 등

결론적으로 중국 송나라 이전에는 3태극이 보편적이었고 문양도 삼파문 무늬의 3태극문양이 대부분이었는데, 주자의 형이상학적인 ‘理’개념이 도입되면서 2태극화 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삼태극의 의미 고찰을 시도한 김명희는 삼태극은 도가와 불교에서 발달한 ‘氣’ 본위의 사상을 그 근원으로 삼는데, 비실체성인 ‘理’ 사상을 정립한 주자의 성리학 등장 이후 태극의 표현은 3원이 점점 2원화 되어 갔다는 것이다.[16]

그럼 감은사지 금당 석재에 유가나 도교에서 주로 사용되어 온 태극도형이 무슨 이유로 각인되어 있을까? 『삼국유사』 기이 제2 만파식적에 “금당 돌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두었으니, 곧 용이 절로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려고 마련한 것이다.”와 연관이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태극의 문양과 용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인지, 이를 위해 태극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더 고찰해보기로 하자. 태극은 유교사상의 핵심으로 동양 우주론 및 본체론의 중심 개념이 된다. 동양 사상에서 ‘태극’이라는 개념이 처음 나타난 것은 『계사전』 상 11장의 “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를 낳고 양의는 사상을 사상은 팔괘를 낳는다.”(易有太極是生兩儀 兩儀生四象四象生八卦)인데, 태극은 의미상으로는 선진유학의 天 개념과 도가의 道 본질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도덕경』 42장에 “도는 하나를, 하나는 둘을, 둘을 셋을,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陰을 지고 陽을 안으며 冲氣로 和한다.”(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萬 物萬物負陰而抱陽沖氣以爲和)고 했는데, 여기서 ‘負陰而 抱陽’이 태극의 형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계사전』상 5장에 “한번은 음으로 작용하고 한번은 양으로 작용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一陰一陽之謂道)고 하고, 『태극도설』에서는 “하늘의 도를 세워서 음과 양이라고 한다.”(立天之道曰陰與陽)고 하여, 음양원리가 天 道의 운행원리임을 말하고 있다. 이상을 종합하여 체계화한 송대 성리학의 대표인 주자는 천도로서 원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는데, 『역학계몽』에서 “양의 상은 둥그니 둥근 것은 일을 가지고 삼을 두른 것이며, 음의 상은 모나니 일을 가지고 사를 두른 것이다. 삼을 두른다는 것은 하나를 가지고 하나를 만드는 것이다. 일양을 세 번 했으니 삼이 된다.”(陽之象圓圓者徑一而 圍三陰之象方方者徑一而圍四圍三者以一爲一 故參其一陽而爲 三)는 같은 내용이 있다. 또『후한서』율력지에 “양은 원으로 형을 이루며 그 성질이 동적이고, 음은 방(네모)로마디를 이루며 그 성질이 정적이다.”(陽以圓爲形其性動 陰以方爲節其性靜)라고 하였고, 원과 방의 특성을 “동적인 것은 수가 3이고, 정적인 것은 수가 2이다.”(動者數 三靜者數二)라고 숫자로도 표현하여 천도의 ‘작용적’인면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태극이 동해 음양의 조화가 일어나는데 이 조화의 상징은 ‘太極, 神, , 龍’으로 표현할 수 있다. 『계사 전』상 제5장에 “음과 양의 변화가 헤아릴 수 없도록 무궁한 것을 신이라 이른다.”(陰陽不測之謂神)고 했고, 『계사 전』상 제11장에 “하늘의 덕은 둥글고 신명하고 괘의 덕은 방정으로써 알려주고 지혜로움이니”(蓍之德圓而神 卦之德方以知)라고 하였는데, 이는 ‘蓍德=천도, 卦德=지도’로서 하늘의 뜻을 사람의 생각으로는 예측할 수 없고 64괘 중 괘 하나를 통해 드러나 결정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천도를 상징하는 원과 신을 함께 논해 음양 조화의 이치를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감은사의 모티브인 문무왕은 죽어 해룡이 되었는데, 태극은 바로 신이자 음양조화의 극치 그 자체로 불가사의한 “음양불측지위신”의 상징인 것이다. 이러한 무궁무진한 음양 조화로서의 상징인 神과 龍의 대응으로서 음양조화의 이치를 담고 있는 태극의 신비로운 도형을 사용했다는 것은 천지 이치와 부합하는 일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음과 양, 그리고 음양의 조화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태극 도형 밖에 없기 때문이고, 용으로 상징되는 음양 조화의 극치는 태극의 동정으로 천지만물을 화생하는 이치와 상통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용하다’라는 우리말이 있다. 이는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어려운 과정을 통해 결국 성사시킬 경우를 빗대어 사용되는데, 바로 음양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을 통해 감은사 석재 태극문형은 우리민족이 용을 음양조화의 상징으로 보는 한편 이에 대응한 음양 조화 도형으로서 태극문양을 사용하여 신성시해 왔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감은사 창건 유래에 기록되어 있듯이, 해룡이 금당 안으로 들어오는 음양조화 (神, 龍)의 문을 상징하기 위해 금당 석재에 태극문양을 새긴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아울러 이등변삼각형은 태극의 다른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圓方의 원리에 다름아님을 알 수 있다.

3. 석재 문양의 기하학적 특징

다음으로 태극과 함께 좌우로 톱날(鋸齒)과 같은 圓積 의 이등변삼각형 문양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겠다. 본 논문에서는 이 문양을 기하학의 원리로 원적의 문제, 그리고 연관되어 원주율과 더 나아가 천도(圓)인 우주만유의 순환불궁의 이치와 결부된 것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이 문양들이 태극문양과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태극도형을 원적으로서 다시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앞 장에서 언급했지만 감은사 문양의 비밀을 푸는 실마리는 금당지 앞의 석재 전면에 새겨진 완연한 태극문양과 태극의 좌우로 톱날과 같은 이등변삼각형 문양 분석을 통해 태극과 이등변삼각형(鋸齒), 龍과 神, 圓方의 이치 및 이들 간의 연관성을 파악하는데 있다. 먼저 기하학에서 원주율과 관련된 원적문제가 대두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원과 같은 넓이를 가진 정방형(정사각형)을 작도하라”는 서양의 3대 난제 중 하나가 바로 석재 문양을 해석하는 실마리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동양에서도 263년유휘의『구장산술 주』에는 서양보다 더 정확히 원주율을 계산하는 방법인 割圓術이 기록되어 있다.

CCTHCV_2021_v21n6_435_f0007.png 이미지

그림 9. 割圓術 이미지, 출처 : 구글

한편 석재 문양 중 톱날(鋸齒) 모양의 이등변삼각형 문양을 자세히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원의 넓이를 S라고 하고 반지름이 r이라고 하면 S=πrr라고 나타낼 수 있는데, 이 원의 넓이를 구하는 방식이 바로 할원술로원의 반경을 삼각형으로 균등하게 분할하면 되는데, 감은사 석재 문양에는 태극문양과 더불어 톱니 같은 이등변삼각형 32개(태극문양을 중심으로 좌우 각각 16개) 가 새겨져 있다. 논문 “감은사지 태극 장대석의 수리 천문학적 의미”에서는 동편 석재(좌우 16, 15개) 서편 석재(좌우 15, 15개)로 보지만, 현장확인 결과 이 숫자가 불분명하고 할원술 원리로 보면 홀수가 나올 수 없고 동·서편이 서로 다를 수 없다. 이것을 끝없이 세분해 나가면 도형은 점점 높이가 반경(r), 가로가 반원주의 길이와 같은 방형에 근접하게 된다. 따라서 원의 면적 S 는 이 장방형의 S=πr2이 되는 것이다.

CCTHCV_2021_v21n6_435_f0008.png 이미지

그림 10. 감은사 석재의 기하학적 태극문양 圓 및 삼각형 方

출처 : 경주 감은사지 - Wikiwand

이것은 동서양에 걸쳐 공통된 산술 방식이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는 “원의 면적은 원의 반지름을 높이로 하고 원주를 밑변으로 하는 삼각형을 만들면 이것이 원의 넓이와 같다.”고 했는데 삼각형의 넓이= 밑변×높이×½이므로 반지름 r인 원의 넓이S는 \(\mathrm{r} \times 2 \pi \mathrm{r} \times 1 / 2=\pi \mathrm{r}^{2}\)이 된다. 동양의 유휘 또한 “원의 면적은 원주의 반과 지름의 반(半徑)을 곱해서 구한다.”고 했다. 기하학에서 원은 가장 완전한 도형이며 단순한 곡선 이상의 존재이다. 지름에 따라 크기만 달라질 뿐 모양은 항상 둥글다. 그 반지름과 원주는 결코 동시에 비슷한 단위로 측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원은 서로 간의 관계가 π=3.141592…라는 무리수(초월수)의 값으로 매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학에서 원주율(π)은 무한히 계속되는 순환하지 않는 비순환 무한소수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리수 이자 초월 수이며, 어떤 특정한 규칙이 없는 신비 그 자체이다. 원주율의 이런 특성이야말로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음양 조화, 용의 조화 등의 특성을 잘 표현한다. 神은 원이라는 도형을 만들 때 원주율(π)을 사용하였는데, 바로 이 원주율은 무한히 지속되는 무리수로서 바로 본 논문의 주제인 석재문양 해석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역사기록에 언급된 내용에 근거하여 볼 때, 금당사지 석재의 문양은 해룡이 되어 국가 수호신이 된 문무왕의 대원을 이루기 위해 신문왕이 심혈을 기울여 건축물에 각인한 상징도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기하학의 원방의 이치를 기본으로 원 적의 도형원리를 사용하여 우리 민족 조화의 상징인 용에 상응하는 신비로운 상징인 태극무늬를 통해 음양 조화의 정신을 해룡이 된 문무왕의 호국, 호법 정신을 이루겠다는 염원이 담긴 상징으로 담았다고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일부 연구자들은 감은사의 태극도형과 그 좌우편으로 8개의 수직 일자 홈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새겨져 있는 것을 두고 양편 8개의 수직선은 ‘八卦’ 를 뜻하는 것이라는 색다른 해석[17]을 하고 있는데, 본 논문에서는 이를 소개하는 것에 그치고 그 자세한 것은 논외로 한다.

Ⅴ. 맺음말

본 논문에서는 감은사 석재 태극문양을 감은사 창건 유래에 대한 역사적 자료 근거와 당시 통일신라 시대의 과학 수준과 수학 학문의 국제교류, 그리고 발굴된 유물 등을 종합적으로 참고하여 역사적 기록과 배경을 바탕으로 한 실증적 해석을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동안의 논문은 고고학적 건축물과 석탑 및 창건 고사 등의 내용이 그 주류를 차지하였는데, 최근 수학자들에 의해 책력 및 위도와 관련된 천문학적 도형으로 해석한 시도는 신선한 면도 있지만 창건유래가 반영되지 않은 연구는 큰의미가 없어, 본 논문에서는 역사적 기록이나 창건 유래와 발굴된 유적 등을 중심으로 석재문양 해석을 시도하였다.

즉 본 연구의 전개는 역사기록을 근거로 동양의 역과 서양의 기하학적 원리를 도구로 태극 및 삼각형(鋸齒) 의 기하학적 의미를 규명하였다. 그리하여 감은사 석재 태극 도형이 의미하는 기하학적 해석을 통하여 당시의 과학 수준을 가늠할 뿐 아니라 호국정신이 서린 감은사 창건의 깊은 뜻이 역사적 기록과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감은사의 창건 배경과 문무왕의 호국 대원이 서린 창건 유래, 그리고 동해 인근에 위치한 지리적 위치, 특히나 당시 최고 교육기관인 국학에서 고대 중국 수학의 바이블격인 『구장산술』을 주요 교육과목으로 한 점과『구장산술』과『주비산경』등의 수학 지식들이 당시 농업산업뿐만 아니라 건축,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준 점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발굴된 금당의 구조가『삼국유사』 만파식적조의 “금당 계단 아래에 동쪽으로 구멍을 내었으니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듯이 금당 아래에서는 특이하게 지하공간을 이룬 약 60㎝ 높이의 석조 유구가 존재하고, 감은사가 동해와 직접 연결된 대종천의 하류에 위치해 있어 대종천이 범람시 바닷물이 감은사 아래까지 들어오는 ‘문무대왕 수중릉→용지(龍 池)→용당(龍塘)’으로 이어지는 용수로의 흔적과 역사적 기록, 그리고 이를 복원하려는 지역단체의 활동 등을감안하면 이를 전설이나 고사로 치부하기보다는 해룡으로 변한 문무왕이 머무를 수 있도록 감은사를 창건했다는 유래와 깊은 상관성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창건 유래와 시대적, 유물적 연관성을 바탕으로 석재 전면에 새겨진 태극문양과 태극의 좌우로 톱날과 같은 삼각형문양 해석을 동양의 易과 원방 이치, 서양의 원주율과 관련된 원적문제에서 실마리를 찾았고, 그리고 태극과 이등변삼각형(鋸齒), 음양조화의 상징인 龍과 神, 그리고 원주율과 이들 상호간의 연관성을 동· 서양 역과 기하학 원리를 통하여 살펴본 결과 석재의 문양은 역사기록에 언급된 내용과 부합하며, 해룡이 되어 국가 수호신이 된 문무왕의 대원을 이루기 위해 신문왕이 심혈을 기울여 건축물에 각인한 상징 도형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신비로운 조화의 상징인 용에 음양 조화의 상징인 태극문양를 상응시켜 해룡이 된 문무왕의 호국, 호법 정신을 이루겠다는 염원을 나타낸 상징이었던 것이다. 즉 음양조화의 관점에서 음양의 근원인 태극과 신의 작용으로 표현되는 무궁무진한 음양 조화로서의 상징인 龍의 대응은 형이상학적으로는 그 음양 조화의 이치가 부합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무궁무진한 음양조화로서의 상징인 神(龍)의 대응으로서 음양 조화의 태극 도형을 사용한 것은 음양 조화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태극 도형밖에 없으며, 이는 음양조화의 극치인 우리 민족의 용의 특성이자 태극의 동정으로 천지만물을 화생하는 이치와 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극과 함께 좌우로 다시 톱날(鋸齒)과 같은 圓積의 이등변삼각형 문양을 좌우 16개로 강조한 것은 별도로 태극 문양과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로운 태극 도형을 원적으로 재차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이는 통일신라 당시 건축 등 모든 분야에 활용되었던『구장산술』같은 수학지식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을 통해 감은사 석재의 태극문양은 우리 민족이 신비로운 동물인 용을 음양조화의 상징으로 보았고 이에 대응한 음양조화 도형으로서 음양의 근원이 되는 태극 문양을 사용하여 신성시해 왔으며, 감은사 창건 유래에 기록되어 있듯이 해룡이 금당 안으로 들어오는 음양 조화(太極, 神, 龍)의 문을 상징하기 위해 금당 석재에 태극문양을 새긴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References

  1. 백인수, 김태식, "감은사지 태극 장대석의 수리천문학적 의미,"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제11권, 제3호, pp.460-466, 2011. https://doi.org/10.5392/JKCA.2011.11.3.460
  2. 三國遺事, 卷2, 紀異2, 文虎王法敏.
  3. 三國史記, 卷7, 新羅本紀第7, 文武王21년.
  4. 三國遺事, 卷2, 紀異2, 萬波息笛.
  5. 三國遺事, 卷4, 義解5, 賢瑜伽海華嚴.
  6. 李崇仁, 東文選, 卷101傳, 草屋子傳」.
  7. 호국전설'龍池'전면 발굴 길 열리나, 경북매일 https://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290775, 2013.06.24
  8. 한국의 사지 현황조사보고서 上, 감은사지, 불교문화재연구소, pp.94-100, 2015.
  9. 한국의 사지 현황조사보고서 上, 감은사지, 불교문화재연구소, p.101, 2015.
  10. 三國史記, 卷三十八, 雜志第七.
  11. 周髀算經, 卷上2.
  12. 九章算術, 序文.
  13. 최영진, 이기동, 만화로 보는 주역上, 동아출판사, pp.73-75, 1994.
  14. 호리바 요시카즈 지음, 한명수 옮김, 원주율 π의 불가사의, 전파과학사, 1993.
  15. 김명희, "삼태극의 의미 고찰," 문화재, 제45권, 제1호, pp.11-12, 2012.
  16. 김명희, "삼태극의 의미 고찰," 문화재, 제45권, 제1호, pp.13-14, 2012.
  17. 대한민국 국기-태극기, https://blog.naver.com/bhjang3/140022200070, 200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