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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es in the Religious Topography of the Great Gwanghaegun: Policies towards Buddhism and the Affected Buddhist Community

광해군 대(代)의 종교지형 변동 -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양상을 중심으로 -

  • Received : 2020.09.11
  • Accepted : 2020.12.08
  • Published : 2020.12.31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view the representative Buddhist policies enforced during the reign of Gwanghaegun (光海君), the 15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aspects of the Buddhist community affected by them. Through this, the influence and dynamism of Buddhism during the reign of Gwanghaegun will be revealed. Some of the findings will run contrary to what is popularly known about Joseon Buddhism and the policy of Sungyueokbul (崇儒抑佛), 'Revering Confucianism and Supressing Buddhism.' During the Joseon Dynasty, Neo-Confucianism was taken as an ideological background, and consequently, Buddhism was ostracized by the ruling class who advocated the exclusion of heretical views. This also characterized King Gwanghaegun's reign during the Mid-Joseon Dynasty. In reality though, the ruling class held mixed opinions about Buddhism, and this influenced the Buddhist community in the Gwanghaegun Period. The military might of Japan demonstrat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led the ruling class to recognize Buddhism, and as a result, the status of Buddhism rose to a certain extent. Based on its elevated status and the aftermath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the Buddhist community engaged in social welfare activities inspired by the notion of requiting favors, and the Buddhist community gained recognition for providing relief services. As a result, the number of monks increased, and the economic situation improved as land ownership was granted to temples and monks. This is the means by which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fluenced the Buddhist policies of the Gwanghaegun Period and changed the religious topography of Buddhism. During the reign of King Gwanghaegun, the ruling class regarded Buddhism as heretical, but offered posthumous titles to monks who engaged in meritorious service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Favorable and/or preferential treatment was also granted to some Buddhist monks. In addition, monks began to perform labor projects that demanded organizational and physical strength, such as those which related to national defense and architecture. However, throughout the Gwanghaegun Period, the monks were paid a certain amount of compensation for their labor, and the monks' responsibility for labor increased. This can be understood as a partial reconciliation with Buddhism or an acceptance of Buddhism rather than the suppression of Buddhism often presented by historians. As for policies which affected Buddhism, the Buddhist community showed signs of cooperation with the ruling class, the creation and reconstruction of temples, and the production of Buddhist art. Through close ties with the ruling class, Buddhism during the Gwanghaegun Period saw the Buddhist community actively responded policies that impacted Buddhism, and this allowed their religious orders to be maintained. In this way, it was also confirmed that the monk, Buhyu Seonsu (浮休 善修) and his disciple Byeogam Gakseong (碧巖 覺性), took up leadership roles in their Buddhist community. The Buddhist-aimed policies of Gwanghaegun were implemented against the backdrop of the Buddhist community, wherein the ruling class held mixed opinions regarding Buddhism. As such, both improvements and set backs for Buddhism could be observed during that time period. The ruling class actively utilized the organizational power of Buddhism for national defense and civil engineering after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Out of gratitude, they implemented appropriate compensation for the Buddhists involved. The Buddhist community also responded to policies that affected them through exchanges with the ruling class. They succeeded in securing funds and support to repair and produce Buddhist temples and artworks. A thoughtful inspection of the policies towards and responses to Buddhism during the Gwanghaegun Period, shows that Buddhism actually enjoyed considerable organizational power and influence. This flies in the face of the general description of Joseon Buddhism as "Sungyueokbul (revering Confucianism and supressing Buddhism)."

본 논문의 목적은 광해군 대(代)의 불교정책과 이것의 영향을 받는 불교계의 양상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통해 조선불교를 "숭유억불"이라고 규정지음으로 인해 드러나지 않았던 광해군 대의 불교가 가진 나름의 영향력과 역동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았던 조선 시대에 불교는 성리학의 벽이단을 내세운 지배층에 의하여 배척되어야 했고, 이것은 광해군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배층이 이중적 불교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지배층의 이중적 불교관은 광해군 대의 불교계의 상황에 영향을 끼쳤다. 임진왜란에서의 전공으로 지배층은 불교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조선에서 불교의 위상이 일정부분 상승했다. 상승한 위상과 임진왜란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불교계는 보사(報謝)와 구호 활동에 종사했다. 그 결과, 승려의 수는 증가했고, 사찰과 승려의 토지 소유가 허가됨으로써 경제적 상황도 좋아졌다.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은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을 좌우하고 불교지형을 변동시킨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광해군 대에 지배층은 불교를 이단으로 간주하면서도, 임진왜란에 공이 있는 승려들에게 시호를 하사했고, 승려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등 일부 승려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또한, 승려들은 국방, 건축 등 조직력과 물리적 힘을 요구하는 역을 부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광해군 대까지는 승려들이 부담하는 역에 대하여 일정 부분 보상해서, 승려가 역을 부담하는 것이 불교에 대한 탄압의 면보다는 불교에 대한 용인의 측면이 강했다. 불교정책에 대하여 불교계는 지배층과의 유착과 사찰의 창·재건, 그리고 불교 예술품 제작이라는 양상을 보인다. 지배층과의 유착을 통해 불교계는 광해군 대 불교정책에 적극 호응했고, 이것을 통해 교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모습 속에서 부휴 선수(浮休 善修)와 제자인 벽암 각성(碧巖 覺性)의 부휴계가 불교계에서 주도권을 가지기 시작했음도 확인된다.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은 지배층의 이중적 불교관과 좋아진 측면과 악화된 측면이 공존하는 불교계의 상황을 배경으로 시행되었다. 지배층은 불교의 조직력을 전후(戰後) 복구와 국방, 토목 공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이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시행했다. 불교계 역시 지배층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불교정책에 호응하였고, 사찰과 예술품을 보수하고 제작하였다.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과 대응을 살펴보면, 조선 불교에 대한 일반적 묘사인 "숭유억불"로 설명할 수 없는 불교의 조직력과 영향력이 확인된다.

Key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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