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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logical Approach on Chungnyeollok for Kim Eung-ha

김응하 『충렬록(忠烈錄)』 판본 변개 과정과 그 의미

  • 이송희 (고려대학교)
  • Published : 20190000

Abstract

Kim Eung-ha, who died in the Battle of Sarhū, was a symbolic figure of loyalty to Ming Dynasty in late Chosŏn Korea. Chungneyllok which was a memorial for Kim had published four times from from 1621-1796. This study reviews existing copies of Chungyellok, categorizes them in four groups, and speculates its publishing date and analyzes the differences of each edition. As a result, Chungnyellok seems published several times based on its first edition till late 17th Century, regardless of the fact that the book contains writings and poems of "traitors" of King Injo's Restoration (仁祖反正). Compared to the former editions, the last edition published in 1796 is much more sophisticated and completed one and removed the works of the politically problematic figures from its main text. By reviewing those copies, we can find out that the first edition had to published in the diplomatic situation after the Battle of Sarhū to enhance its relationship with Ming Dynasty because two other Chosŏn generals chose to surrender to Manchurians. But the 18th Century edition shows the tendency of changing identity of Chosŏn as "little China (小中華)" after the fall of Ming Dynasty. Kim Eung-ha was also repainted as a loyal subject of Ming, rather than a guardian of Chosŏn.

김응하(金應河, 1580-1619)는 오늘날에는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으나, 심하전투에서 항전하다 장렬히 전사한 까닭에 전사 직후부터 조선 후기까지 대명의리의 상징과도같은 인물이었다. 김응하를 기념하기 위한 『충렬록』 간행 역시 광해조부터 정조조까지무려 네 차례나 이루어졌으며, 현재까지도 여러 판본들이 전해지고 있다. 본고에서는 먼저 간행년도가 확실한 정조 22년의 『중간충렬록』을 제외하고 서발문을비롯 완전한 체재를 갖춘 판본들을 A 계열로, 박희현의 「김장군전」과 유몽인·이염영의후서(後敍), 그리고 김응하 만시들로만 이루어진 판본들을 B 계열로 분류하고, 이후 자체나 내용상의 차이에 따라 A'와 B'로 판본의 계열을 세분화했다. 그 결과 그간 학계에서 초간본으로 여겨지던 규장각본(규장각 古貴 923.55-G417c)은 A' 계열에 속하며, 대신 고려대 화산문고본 등 A 계열의 판본이 이보다 앞선 판본으로 보인다는 점을 밝혔다. 한편초간본(신유본)에는 이이첨을 비롯 인조반정으로 숙청된 인물들의 글이 상당수 수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종 연간까지 별다른 산삭 없이 수차례 간행되었음도 확인할 수있었다. 반면 정조 22년 발간된 『중간충렬록』에서는 보다 방대해지고 체계적이 된 체재와 함께 북인계열에 속하는 인물들의 글을 「시문별집」으로 따로 분류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판본들간의 차이를 통해 우리는 김응하에 대한 현양사업이 초간 당시에는 대명외교의 맥락에서, 정조 때에는 '중화회복'에서 '중화계승'으로 변화해간 조선 대명의식의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김응하에게서 북인의 색채를 탈색시키고 대신 노론계의 춘추의리 담론으로 포섭하는 일련의 시도가 포착된다.

Keywo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