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I QR코드

DOI QR Code

1874년 만동묘(萬東廟) 중건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Reconstruction of Mandongmyo in 1874

  • 송혜영 (부산대학교 생산기술연구소)
  • 투고 : 2019.04.14
  • 심사 : 2019.05.22
  • 발행 : 2019.06.30

초록

Mandongmyo(萬東廟) was a shrine built for two emperors of the Ming Dynasty in Huoyangri, Cheongju. Since the 17th century, the classical scholars of the Joseon Dynasty had valued Mandongmyo Shrine as a place for the so-called Jonjudaeui(尊周大義). In 1865, however, the shrine was demolished and ruined, afterward rebuilt by King Gojong(高宗) in 1874. King Gojong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construction plan for the new shrine, which he adjusted the layout of the building and named it. Unlike in the past, the reconstructed shrine was thoroughly led by the government, and its architectural character was greatly transformed. The reconstructed Mandongmyo was respected as the national shrine, but subjected to oppression by the Japanese imperialism. The 68 years after it was rebuilt, the shrine was destroyed on the charge of inciting the sense of national consciousness.

키워드

1. 서론

만동묘(萬東廟)는 현재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에 위치하며, 명나라 신종(神宗)황제의 제사를 위해 숙종 29년(1703)에 창건된 사당이다. 건립 이후 일명 황묘(皇廟)라고도 불리었고, 정조 즉위년(1777) 임금이 친히 어필(御筆)로 편액(扁額)을 써서 하사하였다.

조선후기 사대부 사회는 존주대의(尊周大義)를 철저히 추종하고 있었다. 특히 집권세력인 노론(老論)을 중심으로 만동묘를 중시하는 기류가 조성되면서 종묘에 비견될 만큼의 위상과 권위를 가질 정도에 이른다.

그러나 고종 2년(1865) 수렴청정 중이던 조대비(趙大妃, 神貞王后)의 하교에 의해 만동묘의 제사는 중단되었고 건물은 철거되었다. 정조가 내려준 편액을 비롯하여 모든 소장 물품이 예조에 의해 회수되어 대보단(大報壇)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겨졌다. 사당으로 서 그 기능이 이때에 이르러 종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철거 된지 9년 후인 고종 11년(1874)에 만동묘는 중건 형식으로 복원되었다. 친정(親政)을 하게 된 고종(高宗)의 명에 의해 재설(再設)이 이루어졌지만 그 위상은 철저히 달라졌다. 만동묘의 창설이 사림세력의 주도로 이루어져 추진되고 운영된데 반해, 재설의 경우에 조정 중심으로 고종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특징을 갖는다. 이는 1874년 중건된 만동묘의 위상과 성격이 과거에 비해 크게 달랐음을 의미한다.

명나라 최후의 황제 의종이 죽은 지 갑자(甲子, 60주년)가 되던 1704년에 시작된 만동묘의 성격은 기존의 연구 성과로 널리 알려져 있다.1) 조선후기 송시열을 중심으로 노론계 사림의 주도로 이루어진 예제(禮制) 관련 건축에 있어서, 만동묘는 빠질 수 없는 건축물로서 그 위상과 의미는 대단했기 때문이다.

창설 당시의 모습은 화양지(華陽誌)와 화양고사(華陽故事) 등과 같은 직접적인 기록물에 남아 있다. 특히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1840년 간행)에는 저자 생전에 화양동을 방문하고 남겼던 기록을 수록했는데 만동묘의 건물배치를 새긴 도판까지 함께 첨부되었다. 이러한 사료들을 통해 건축물의 규모와 배치가 대략적으로 확인된다.

그렇지만 흥선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왕명(王命)으로 중건된 1874년의 만동묘와 관련하여 여러 사료의 기록과 증언까지 남아있지만 건축사적 관점에서 살필 수 있는 사료는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날 만동묘는 1999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되면서 2001∼2004년의 복원공사를 통해 일부 건물이 세워졌다. 이는 1982년의 유적지 발굴조사와 성해응의 기록과 도판 등을 통해 축적된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최근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번역 결과물이 대중에 제공됨에 따라 미공개 사료가 많이 소개되었다. 이중 방대한 분량의 각사등록(各司謄錄)도 공개되었는데 1874년 만동묘의 중건을 기록한 충청감영계록(忠淸監營啓錄)이 포함되었다. 이 보고서에는 묘우간가(廟宇間架)와 감동인질(監董人秩)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중건 공사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1874년 왕명에 의해 진행된 충청감영의 만동묘 중건 공사에 대한 공사 절차와 공역 그리고 건축물 규모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만동묘의 중건을 통해 존주대의의 명분하에서 과거 왕권과 신권의 대척점이 되었던 건축물의 위상을 재정립하려는 고종의 역할이 공사 기획과 국고 지원, 건물의 재배치 및 건물 명칭의 하사 등에까지 영향을 끼쳤음을 밝히려 한다. 또한 중건된 만동묘가 민족의식의 유발을 우려한 일제(日帝)의 탄압으로 철폐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이러한 고찰은 만동묘를 둘러싼 당시 정계(政界) 실상을 이해하는 데 유익할 뿐만 아니라 중건 공사의 공역 실상을 밝히는 건축사적 의의를 갖는다.

2. 정치적 성지로서의 성쇠(盛衰) 과정

2-1. 존주대의(尊周大義)에 기반한 위상과 규모

17세기 조선 사회는 급속하게 숭명반청(崇明反淸)을 기반으로 하는 존주대의(尊周大義)의 명분 속으로 경도되었다. 현종 즉위(1659년) 이후 전개된 이른바 예송(禮訟)의 시대는 예제(禮制)에 기반을 둔 정치주도권 쟁탈의 산물이었다. 또한 효종의 북벌론(北伐論)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던 존주대의로 인해 중화(中華)를 명나라로, 이적(夷賊)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히려는 것은 사회지배의 통념이 되었다.

예제의 강화는 곧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이어졌고 훗날 잦은 환국(換局)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이 죽은 지 갑자(60주년)가 되던 1704년에 조선 사회를 지배하던 존주대의 의 정신이 두 개의 건축물로 구현되었다. 이른바 조선의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는 묘(廟)와 단(壇) 두 가지로 나타났는데 송시열(宋時烈)의 유명(遺命)으로 건립되었던 만동묘와 숙종(肅宗)의 왕명(王命)에 의해 창덕궁의 금원에 설치된 대보단(大報壇)이 그것이다.

두 시설에 대해 주목되는 점은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낸다는 하나의 목적을 두고, 신권이 주도해 건립했던 묘(廟) 형식과 왕권에 의해 설치된 단(壇) 형식이 공존했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의 목적을 위해 존재했던 두 곳의 제사 시설은 예제적인 명분론에 의해 어떤 형태로든 향후 합쳐져야 될 운명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만동묘는 갑술환국 이후 정국을 주도한 집권세력인 서인계 노론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다. 만동묘 창설의 표면에는 제사의 실현을 유언으로 남긴 송시열이 있었지만, 신종황제의 글씨를 갖고 온 민정중(閔鼎重)과 ‘우암을 위해 제환장암이라는 시를 지어 부치다(爲尤齋寄題煥章菴)’란 시를 지어 장소에 기억을 남긴 김수항(金壽恒)도 핵심적인 역할에 담당했다.2)

영조 4년(1728)의 무신란(戊申亂) 이후 정계는 노론의 일당독재로 경도되었다. 노론의 핵심 네 가문이 중심이 되어3) 세운 만동묘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정치적 성지로 변모하였다. 특히 세도정치가 전성기를 누릴 때 만동묘의 위상은 극치에 달했고,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만동묘의 악명(惡名)은 이 무렵에 성립되었다.

만동묘의 실질적인 창건은 1703년이었지만 명나라 멸망의 갑자(甲子)를 기다려 그 다음해인 1704년에 사당으로서 첫 제사를 지내게 된다. 관련된 여러 사료가 남아있어 초창기 모습은 기록을 통해 파악된다. <그림1>은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의 화양동지(華陽洞誌)에 수록된 만동묘를 그린 도판(圖版)으로 상부에는 만동 묘가 그리고 좌측에는 화양서원이 서로 인접하여 배치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 연경재전집에서 만동묘

이 도판에 의해 창설 당시 만동묘 일곽에는 정전(正殿)과 성공문(星拱門) 그리고 전사청(奠祀廳)과 증반청(蒸飯廳)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만동묘와 화양서원 일곽에 진입하는 입구에는 진덕문(進德門)이 하마비와 함께 있었다.

도판 이외에도 창설 당시의 모습은 화양고사나 만동묘전장기, 화양지를 통해 묘내의 건물 규모를 상세히 살필 수 있다. 이들 사료를 통해 파악되는 건물규모는 <표 1>과 같이 정리된다.4) 초창기 만동묘 일곽은 3∼4개의 건물과 20여 칸 전후의 규모를 갖춘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표 내용 중 초석지(礎石址)는 1982년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했던 유적지 발굴조사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5)

표 1. 만동묘의 건축형식과 규모

명나라 멸망 60주년이 되던 1704년 명나라 신종황제의 제사를 위해 창건된 만동묘는 의종황제를 추가로 배향하면서 존주대의를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던 노론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이 덕분에 국가로부터 다양한 혜택이 제공되었는데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영조 21년(1745)에 만동묘의 중수(重修) 공사가 국가적으로 시행되었다.6) 당시 사원이 퇴락하여 풍우(風雨)를 가리지 못한다는 주청에 따라 영조는 충청감사에게 중수를 도와주고 면세전(免稅田)을 떼어주라 명했다. 아마도 이때의 중수 공사는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 9년(1785)에도 만동묘의 중수 공사는 이어졌다. 이 무렵의 공사는 성균관 유생인 태학생(太學生)이 주도했으며 상주(尙州)의 승도(僧徒)들을 징발(徵發)하여 공역에 동원했다.7)  충청도에 위치한 만동묘 공사를 위해 경상도 상주와 함창 부근의 사찰 승도가 징발됨에 따라 이른바 불법적인 민정징발 문제로 확대되었고, 결국 공사감독이던 재임(齋任)이 서원현감(西原縣監)에 의해 옥에 갇히는 사건으로 이어졌다.8) 이것은 당파간의 논쟁으로 이어졌고 성균관 유생들의 권당(捲堂)으로 확대되어 정치적인 사건으로 발전했지만, 결국 정조(正祖)의 개입으로 사건은 정리되었다. 만동묘의 존립이나 성격과 관련해 당파간의 시각차가 확연히 드러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순조 9년(1809) 만동묘의 대문이 화재에 의해 소실되었지만 재력이 없어 개건(改建)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는데, 이조판서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국고(國庫)가 지원되었다.9) 아마도 이때 개건된 대문이 진덕문(進德門)으로 추정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송시열의 후손 송치규(宋穉圭, 1759∼1838)가 남긴 시가 있어 누각을 갖춘 외대문임을 짐작하게 한다.10)

이처럼 만동묘는 조선후기 존주대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중시되었다. 특히 서인계 노론의 정치적 성지로 간주되면서 국가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았다. 창건 당시 규모는 총 20여 칸 내외로 그리 크지 않았지만 거듭되는 중수(重修) 공사를 통해 일정 규모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2-2. 사전의 불일치에 대한 비판과 강제훼철

조선시대 사전(祀典)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행하는 각종 제사에 관한 규범이나 규정을 뜻하며, 건국 이래 사전의 정비는 국가적인 사안이었다. 사전의 규정과 시행은 국가의 고유권한이었는데 사림에 의한 만동묘의 건립은 사전의 전례에 어긋난 행위였다.11)

영조 33년(1757)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청주목 관아의 동쪽 80리 화양동에 있으며 초가집에서 소왕을 제사 지내려는 뜻에 따라 지패(紙牌)를 만들어 봄·가을로 신종과 의종 두 황제를 제사한다’라고 만동묘를 기록하였다. 만동묘의 건립 의도에는 정강(靜江)에서 우제(虞帝)에게 제사를 올리고 모옥(茅屋)에서 소왕(昭王)을 제사 지냈던 중국의 선례(先例)를13) 모방한 것에서 비롯했지만, 현실적으로 일개 변방의 사대부가 사사로이 중국황제의 사당을 지은 것은 사전의 전례에 어긋나는 행위라 비판의 빌미를 반대편에 제공했다.

나라 안에 동일한 목적으로 두 곳의 시설이 설치된 상태라 만동묘와 대보단은 항시 비교되었다. 이 또한 노론의 반대편에서는 비판의 근거로 삼았다. 예를 들면 명나라 신종황제의 은의(恩義)를 추모하기 위해 숙종이 대보단을 세울 무렵 이미 송시열의 유명(遺命)에 의해 노론 주도로 만동묘가 세워진 상태였다. 또한 대보단은 1년 중 2월에 한번 제사를 드리는데 반해, 만동묘는 처음 1월과 7월에 행하다가 대보단보다 일찍 시작할 수 없어 3월과 9월로 변경하였다. 이와 같이 명나라 황제의 제사라는 하나의 목적 하에 대보단이 왕권(王權)의 상징으로 여겨질 때 만동묘는 노론으로 대표되는 신권(臣權)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만동묘가 노론 중심의 사림 세력이 사사로이 세운 사당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무신란(戊申亂)을 거치면서 영조의 왕위계승 정통성을 그나마 지지해 주는 정치세력이 오직 노론뿐 이라는 정치현실 때문이었다. 이러한 공감대는 영조에 의한 면세전(免稅田)의 하사라는14) 재정지원과 정조의 어필 편액 하사15)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만동묘에 대한 비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태생적 결함은 지속적인 비판으로 이어졌지만 영조와 정조에 의한 비호는 지속되었다. 특히 무신란 이후 노론의 일당체제가 완비된 시점에서 송시열을 핍박하는 것은 곧 효종을 무함하는 것과 비견될 정도였는데 이는 정조의 처분을 통해 드러난다. 정조 즉위년(1776) 노론에 의한 효종의 만동묘 배향문제를 두고 상소로서 비판했던 이명휘(李明徽)에 대해 정조는 친국(親鞫)을 통해 가혹하게 처벌하였다.16) 송시열의 유명으로 남긴 만동묘를 배척하는 행위는 곧 효종의 북벌론까지 소급하여 배격하는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만동묘의 기능이 대보단의 그것과 중첩됨에 대한 비판이 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더 이상의 이론( 論)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처리하였다. 아마도 당대 궁극적 가치로 여기던 존주대의가 비판의 빌미로 훼손되는 것은 정조가 추구했던 왕권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의 처분 이후 만동묘의 위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헌종 10년(1844) 영의정 조인영(趙寅永)의 건의에 따라 대보단의 전례에 의거해 만동묘의 제사 때 충청도관찰사가 한 차례 봉심(奉審) 하도록 정했고, 심지어 도내 수령 가운데에서 유사(有司) 두 사람을 따로 정하여 보필토록 하였다.17) 만동묘의 위상은 황단(皇壇)이라 불리던 대보단과 동급으로 대우받았고 종국에는 황묘(皇廟)라 불리게 될 정도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위상의 극에 달한 만동묘는 고종의 즉위 이후 적폐의 근원으로 지목되면서 철거되기에 이른다.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 중인 조대비의 명에 따라 고종 2년(1865) 만동묘는 훼철되었다.18) 만동묘의 철거 과정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만동묘의 훼철에 있어서 이러한 사실을 조보(朝報)에 내지 말도록 했는데, 이를 통해 널리 알려지면 철거반대 세력이 한꺼번에 대궐로 몰려들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만동묘 철폐에 있어서도 절차적 예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만동묘 어필 편액의 운송에 있어 판돈녕부사나 예조판서가 거론되었지만 실제로 서원현 감(西原縣監) 김익정(金益鼎)이 그 임무를 수행했다.19) 그리고 남겨진 건물은 관리되지 않았고 그대로 헐거나 혹은 그 재목을 가져다 마굿간을 지었다.20) 정조의 편액 이송 이후 만동묘는 바로 철거된 것이다.

이처럼 만동묘는 ‘사전의 불일치’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으나 집권세력의 정치적 성지로 간주되면서 존주대의의 기치 아래 신권의 상징적 건물로 변모했다. 그러나 왕권에 의한 대보단의 설치로 중첩된 기능에 의해 잦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무신란 이후 정치현실이 고려되면서 국가와 왕실의 비호까지 받을 수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집정기에 이르러 적폐의 근원으로 지목되면서 강제 철거되었다.

3. 중건 공사의 주체와 내용

3-1. 고종이 기획한 영건사업

수많은 만동묘 복설(復設) 상소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의 집정기 동안에 만동묘는 철저히 잊혀졌다. 그러나 고종의 친정(親政)이라는 정세 변화 속에서 만동묘는 다시 중건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애초 만동묘의 창건 이념은 의리(義理)와 정도(正道)에 기반을 두었다.21) 임진왜란을 맞아 우방국에 대해 원군(援軍)을 파병했던 신종의 의리와 국망(國亡)의 기점에서 자결을 선택해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던 의종의 정도는 장래의 사표(師表)로 보았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보다는, 사람으로서 행하였던 의리와 정도에 대해 그 태도를 평가하고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의리와 정도는 유교주의 군주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통치의 덕목이 아닐 수 없었다. 통치술에 있어서 인의(仁義)에 입각한 정도(正道)의 실현은 군주가 항시 추구하는 이상이기도 했다.

고종 11년(1874) 2월 만동묘는 철거 9년 만에 왕명에 의해 다시 중건되기에 이른다.22) 과거 만동묘는 사림(士林)에 의해 세워졌지만 이번 중건 공사는 충청감영에서 관장하도록 하여 이른바 국가주도의 영건사업으로 시행토록 조치한 것이다. 그리고 주목되는 점은 고종(高宗)의 역할이었다. 고종은 중건 공사의 기본설계인 도식(圖式)의 선택에서 공역(工役)의 재원조달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여하였다.

중건의 명령이 시달 된 이후 중건을 위한 기본 도식의 작성은 철저히 충청도관찰사 성이호(成彛鎬)가 맡았고, 그가 조정에 올린 도식은 총 3본(本)이었다. 그런데 고종에게 올라간 도식의 내용과 건물 규모는 옛 것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23)

고종은 충청감영에서 올린 도식을 접한 이후 주도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며 영건사업에 적극 개입했다. 도식 3본 중에서 제3안을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도식 내용의 변경까지 주문했다. 일례로 정면 지대에 있지 않고 한쪽 모퉁이에 서 있던 외대문(外大門)에 대해 진덕문(進德門)이란 명칭이 서원(書院)의 진수(進修)에서 따온 것 같으니 차라리 대보단(大報壇)의 열천문(冽泉門) 명칭과24) 동일하게 쓸 것을 명했고, 기존의 문지(門址)에서 이건토록 하며 2층 문루(門樓)의 건립 계획에 대해 일체 종묘와 사직의 대문 제도에 의거해 짓도록 하였다.25) 계획 도면의 변경에 있어서 건물 배치와 명칭 변경까지 개입했던 것이다.

또한 고종은 기존 만동묘의 현판 글씨가 지나치게 크다는 지적과 함께 묘우는 10칸으로 정할 것도 주문하였다.26) 이른바 도식의 변경뿐만 아니라 묘우의 규모에 있어서도 직접 간여했던 것이다. 도식 제3안에 따르면 정전의 계획 규모는 5칸이었다. 그런데 고종은 두 황위(皇位)를 5칸 규모에 봉안할 수 없으니 10칸으로 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자 우의정 박규수(朴珪壽)는 제3안이 예경(禮經)의 궁실 제도와 부합된다고 답변했지만, 고종은 도리어 정침(正寢)의 협실을 반드시 종묘와 좌우 협실의 제도와 같이 하도록 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27) 고종은 만동묘 중건 공사의 규모나 형식 자체에 대해 예경과의 부합 여부보다는 기존의 종묘와 대보단을 표본의 선례로 중시하면서 이들을 답습 하도록 의도했던 것이다.

또한 고종이 도식 중 제3안을 선택했던 이유는 옛 것을 근거로 했으나 도식 내용이 현실을 잘 참작하면서도 매우 자세하게 그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1865년 철폐 이전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여 준용하기 보다는 종묘나 대보단과 같은 기존의 것을 잘 참작한 도식을 선호한 것이다. 일례로 고종이 묘우를 수호하는 수복(守僕)들의 간가(間架)까지 상세히 마련됨을 칭찬하는 대목이 있는데28) 수복청(守僕廳)의 설립을 언급한 것이다. 수복청은 일반적으로 묘(廟)ㆍ사(社)ㆍ능(陵)ㆍ원(園)ㆍ서원(書院) 등에 흔히 설치되는 시설이었으나 초창기 만동묘에는 마련되지 않았다.

그리고 고종은 계획 초기 옮겨서 지어질 외대문의 명칭과 관련하여 대보단에서 차용해 열천문으로 하려했지만 재차 친히 ‘양추문(陽秋門)’이라 명명하면서29) 현판을 친필로 써서 내렸다.30) 이는 1776년 정조의 편액 하사 선례를 참조하여 이루어진 처분으로 보이며, 향후 중건될 만동묘에 대해 왕권의 위엄을 입구 정면에서부터 보이려는 의도로 여겨진다.

이처럼 1874년의 중건 공사는 계획단계부터 초창기 만동묘의 건립 때와는 성격이 전혀 달랐음을 보여준다. 즉 공사에 있어서 장소는 동일한 부지였다 하더라도, 공사의 계획과 주체가 달라짐에 따라 향후 운영에 있어서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도 변화했음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3-2. 충청감영이 주도한 영건공사

1874년의 중건 공사는 초창기와는 달리 철저히 조정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고종에 의해 기본 계획이 결정된 후 공역책임자로 충청도관찰사 성이호가 임명되었지만 공역에 있어서 실질적인 책임자는 청주목사 조병로(趙秉老)였다. 그리고 공사비용 1만 냥은 국고(國庫)에서 지급되었고31) 공사는 2월에 기획되어 3월에 대부분의 계획안이 완성되었고 7월에 공사가 준공됨에 따라 관계자 시상(施賞)이 전례대로 시행되었다.32)

중건 공사와 관련하여 충청감영에서 올린 장계(狀啓)가 충청감영계록(忠淸監營啓錄)33)에 수록되어 있어 영건공사의 전말을 살필 수 있다. 우선 중건에 있어서 기본 도면은 고종이 선택했던 이른바 ‘옛것을 따르면서도 현재의 좋은 점을 참작한[準古酌今] 제3본(第三本)’을 준용(遵用)하였고, 사역(事役)에 드는 경비 1만 냥은 경사(京司)에 상납하는 비용에서 충당하였다. 그리고 실질적인 공사감독은 관찰사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청주목사(淸州牧使)였고 간가의 도식(圖式) 및 물력을 구획(區劃)한 후 운목(運木)ㆍ번와(燔瓦)ㆍ개기(開基)ㆍ정초(定礎) 등의 절차를 거쳐 동역(董役)한 지 3개월 만에 준공하였다.

준공된 건물 규모는 제3도본(第三圖本)에 따라 정전(正殿) 10칸, 내삼문(內三門) 5칸, 외삼문(外三門) 6칸을 조성하였다. 여기서 삼문의 제양(制樣)은 종묘(宗廟)의 대문을 본 따 만들었다. 그리고 재실(齋室) 6칸, 증반소(蒸飯所) 4칸, 전사청(典祀廳) 4칸, 제관소(祭官所) 6칸이 결정된 도식에 따라 이루어졌고 장원(墻垣) 172파(把)는 돌로 쌓고 기와로 위를 덮었으며 담 겉면에는 회를 발랐다.

또한 내삼문의 전계석(前階石)은 9층이었고, 그 아래 보계석(補階石)은 한 곳에 5층(層) 및 두 곳에 각 1층씩 두었다. 외삼문 밖 보계석의 경우에는 한 곳에 5층, 그 아래는 1층으로 모두 정석(釘石)으로 쌓았다. 정전의 기지(基址)는 산 아래에 있는데 후면이 가팔라서 흙이 무너질 것이 염려되므로 큰 돌로 4층을 보축(補築)하였다.

그리고 수복청(守僕廳)이 4.5칸이었고 고직청(庫直廳)이 7칸이었다. 이들 부지는 1865년 초창기 만동묘가훼철(毁撤)될 때 동민배(洞民輩)가 멋대로 은닉(隱匿)하고 여염집이라고 칭하면서 그대로 처소로 만들었던 전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중건 공사가 시작되면서 옛 고직청 건물의 경우에 도로 관(官)으로 추입(推入)하여 기와만 고쳤다. 민가로 은닉된 고직청만이 중건 공사에서 유일하게 신축이 아닌 중수된 건물이었다.

마지막으로 공사재원은 조정에서 획하(劃下)해 준 1만 냥이었고 이중 9,894냥 7전 5푼을 사용하고 잔고로 105냥 2전 5푼을 남겼다. 당시 청주목사가 공사내역을 성책(成冊)하여 관찰사에게 제출했다고 전하나 그 기록물은 현재 살필 수 없다. 다만 감동(監董)ㆍ간역( 役)ㆍ패장(牌將) 등의 직역과 성명은 고례(考例)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한 장계 기록에 남아 있어 조영활동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한편으로 실내 계획에 있어서 묘내(廟內)에 쓰이는 포진(鋪陳)ㆍ제기(祭器)ㆍ제복(祭服)ㆍ제반의물(諸般儀物) 등은 새로이 구입하였고, 경내 유지를 위한 수복(守僕)ㆍ고직(庫直) 등에 대한 삭료(朔料)는 해당 목사와 상의해 마련하는 것으로 공사는 일단락되었다.

준공 이후 고종의 친필 현판이 내려졌고 9월 초7일 청주목사 조병로가 겸묘령(兼廟令)이자 헌관(獻官)의 자격으로 중건 후 첫 제향(祭享)을 거행하였다.34) 조병로에 의한 첫 제향은 큰 의미를 지닌다. 과거 송시열의 유명(遺命)에 따라 은진송씨(恩津宋氏), 안동김씨(安東金氏), 여흥민씨(驪興閔氏), 전주이씨(全州李氏) 등 노론계 사림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던 만동묘의 제향이 이때 이르러 지역 관원(官員)에 의해 장악되었기 때문이다. 향후 만동묘 운영에 있어서 조정(朝廷)의 의중이 작용할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3-3. 충청감영계록을 통해 본 조영내역

충청감영의 감독 하에 3개월의 공역을 끝으로 만동묘는 중건되었다. 공사 집행에 있어서 철저히 충청감영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충청감영계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공사 기획과 재원 등 세부계획에 있어서 고종의 의중이 담겨진 도식에 따라 집행되었지만, 감동, 간역 등의 공사 인력은 충청도에서 충당하였다.

<표 2>는 충청감영계록에 기록된 묘우간가(廟宇間架)의 내용을 표로 정리한 것이다. 내역에 따르면 중건된 만동묘의 총 규모는 53.5칸이며 경내를 수호하는 172파의 장원(牆垣)이 설치되었다.

표 2. 묘우가간 내역

묘우간가의 내용을 살펴보면 묘우는 삼포(三包)의 10칸 규모로서 정전 좌우에 담으로 둘렀고 담에는 각기 일각문(一角門) 하나씩 설치되었다. 내·외삼문은 각각 5칸 및 6칸이며 단청(丹靑)을 갖추었다. 재실과 수복청, 고직청에는 각기 일각문(一角門)을 갖추고 있어 나름 독자적인 구역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대문(中大門) 1칸이 있는데 왕래의 편의를 위해 이 문을 따로 세웠고, 장원은 172파로35) 모두 돌로 쌓아 기와로 위를 덮었으며 겉면에는 회를 발랐다. 1703년 사림에 의해 창설된 만동묘와 1874년 고종의 의중이 반영되어 충청감영에서 중건된 만동묘의 시설을 비교하면 <표 3>과 같이 정리된다.

표 3. 1703년과 1874년 만동묘 시설간의 비교

1703년에 초창된 만동묘 관련 사료에서 하옥(廈屋)으로 표현되는 정전(正殿) 즉 묘우는 5칸이었으나 중건 공사 때 고종의 명에 따라 10칸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성공문(星拱門)으로 불리던 내문은 3칸에서 5칸으로, 하마비와 가깝게 설치되었던 외대문인 진덕문(進德門)은 초기 2층 문루를 갖춘 3칸이었으나 정면으로 자리를 옮겨 양추문(陽秋門)으로 명칭을 고쳐 6칸이 되었다. 그리고 증반소와 전사청은 그대로 존치되었지만 확장·중건되었다. 재실과 제관소, 수복청, 중대문은 1703년의 창건 때는 없었으나 1874년의 중건 때 신설되었다. 7칸의 고직청은 유일하게 1865년의 훼철 때 남겨졌다가 수즙(修葺) 과정을 거쳐 그대로 복원되었다. 장원(墻垣)의 경우에 화양동지에 수록된 만동묘 도판에서 확인되므로, 옛 것을 그대로 고쳐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1874년의 중건을 통해 만동묘는 초창기보다 더 크게 확장되었음을 의 비교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조선후기 일반적인 능원(陵園)이나 서원(書院) 등의 제도에서 흔히 나타나는 수복청과 같은 시설들이 추가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표 4>는 충청감영계록에 수록된 감동인질(監董人秩)을 정리한 것이다. 공사의 주요 인력을 살펴보면 도감동(都監董)은 전참봉(前參奉) 조병정(趙秉定)이었고 도간역(都看役)은 출신(出身) 윤원구(尹元求) 그리고 패장(牌將)은 출신(出身) 최명익(崔明翼)이었다.

표 4. 감동인질 내역

중건 공사의 도감동이었던 조병정(趙秉定)은 한산(韓山)에 거주하던 사족(士族)으로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했고 음직으로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을 지낸 인물이었다.36) 그리고 감동은 총 6인이었는데 이중 김명희(金明熙)는 규장각검서관(奎章閣檢書官)을 지낸 인물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현직(現職)을 갖지 못한 출신과 한량이었다. 그러나 중건 공사 이후 논공행상에 따라 노익동(盧翼東)37)과 민영증(閔泳曾)38), 조함희(趙咸煕)39)는 모두 오위장(五衛將)이 되었고 손양문(孫亮文)40)은 가덕첨사(加德僉使)의 직책을 받았다.

도간역(都看役)은 출신 윤원구(尹元求)였고 간역은 총 7인이었는데 이중 김유규(金儒逵)는 경희궁위장(慶熙宮衛將)을 지낸 인물이었다. 간역 중에는 훗날 논공행상에 따라 현직을 받은 이가 나타났는데 전첨지 이규석(李圭錫)은 오위장(五衛將), 출신 이재하(李在夏)42)는 순창원수봉관(順昌園守奉官), 한량 조화용(趙和鎔)43)은 서천첨사(舒川僉使)가 되었다.

그리고 패장(牌將)은 총 4인이었는데 출신 최명익(崔明翼)은 고종 10년(1873)에 시행된 각도군기공해수선(各道軍器公廨修繕)에서 전라감영(全羅監營)의 간역(看役)으로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은 전력(前歷)을44) 갖고 있었는데 중건 공사 이후 노고를 인정받아 오위장이 되었다.45) 그리고 한량 김문종(金汶鍾)46)도 훗날 현직으로 창덕장(昌德將)에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감동인질을 통해 파악되는 점은 도감동의 경우에 지역 유지였던 사족을 임명했으며, 공사실무를 담당했던 감동과 간역, 패장의 직책은 무과(武科) 출신들이 맡아서 공사 준공 이후 논공행상에 따라 현직(現職)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비록 공역이 충청감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논공행상을 통해 출신과 한량에 불과했던 실무를 맡았던 공역종사자들은 논공행상에 따라 현직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4. 중건 공사 이후 변화 추이

4-1. 일제에 의한 사전(祀典) 기능의 상실

고종에 의해 만동묘가 중건된 이후 모든 의례는 철저히 대보단의 그것과 동일하게 변모했다. 제사를 지내는 횟수와 시기 그리고 행사집행관(行事執事官)의 임명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에서 관여했다.47) 이는 과거 만동묘의 운영 행태와는 확연히 달랐는데, 건물의 배치 과정에서부터 의례의 세부사항까지 사림 주도의 옛 모습에서 조정 주도의 공간으로 철저히 바꾸려는 의도에서 비롯했다. 즉 사림 세력의 전형적인 공간이었던 만동묘는 중건 이후 왕실 사전(祀典)의 하나로서 철저히 조정에 예속되었던 것이다.

중건 이후 만동묘는 왕실 사전의 하나로서 사림세력의 간섭을 용인하지 않았다. 중건 이후 만동묘는 재정에서 운영에 이르기까지 관내 수령들의 관리 하에 있었다. 고종 30년(1893) 사림은 사적으로 제사조차 드릴 수 없는 만동묘의 운영에 대해 불만을 품고 각도 유생들의 합동 상소를 통해 과거처럼 사림이 만동묘를 운영하게 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48)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화양서원의 복설 요청과 함께 철저히 무시되었다.

왕실 사전의 하나로 종속된 만동묘는 1896년 원구단(圜丘壇)의 건립과 대한제국의 선포에 앞서 일체의 제사규정이 정리될 때 대보단은 대사(大祀)로 분류된데 반해 소사(小祀)로서 충청도가 관장하는 제사로 분류되었다.49) 그리고 1908년 통감부에 의해 향사이정(享祀釐正)의 명목으로 제사 제도가 개정될 때 만동묘는 폐지되었으며 그 관리권은 해당 지역 관청에 이양되었다.50) 이로서 중건된 만동묘는 왕실 사전으로 그 기능을 최종적으로 상실하게 된다.

중건 이후 만동묘의 모습은 일제강점기 촬영되었다는 사진으로 확인되며 <그림 2>는 1964년의 경향신문 지면에 실린 것으로51) 정면을 배경으로 외대문에 ‘양추문’이란 고종의 친필 현판이 보인다.

그림 2. 일제강점기 만동묘의 모습 (경향신문, 1964년 기사)

통감부에 의한 사전의 폐지 이후에도 만동묘의 건물들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이는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된 중수기(重修記)를 통해 살필 수 있는데 1913년 유림이 중심이 되어 만동묘를 중수하고 이를 현판(懸板) 형식으로 남겼기 때문이다.52) 비록 통감부에 의해 왕실 사전의 지위는 상실했지만 지역사회에 의해 지속적인 관리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4-2. 일제의 탄압에 따른 철폐과정

만동묘의 존치가 민족의식의 유발로 이어진다고 여긴 일제(日帝)에 의해서 각종 사회적 규제를 통해 철폐의 빌미가 갖추어졌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일제에 의한 만동묘 탄압에 호응한 조선인도 존재했다는 것이다. 1920년대 말부터 문명개화론자(文明開化論者)로 자처하던 사회진화론의 신봉자는 잡지 기고를 통해 만동묘의 정체성과 중국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로 송시열을 비난하면서 만동묘의 존립 자체를 비웃었다.53) 그러더니 이후 열렬한 내선일체론자(內鮮一體論者)로 변신하면서 한학(漢學)을 중국 유교문명으로 규정하며 조선인을 사대주의와 존주주의로 몰아간 원흉으로 간주하였고 더 나아가 조선총독부에 의한 향교재산 몰수를 대영단(大英斷)이라 하며 치켜세웠다.54)

1920년대 말부터 만동묘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각종 사찰과 검열을 통해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檢査局) 문서에는 출판물 검열과 관련하여 ‘차압삭제(差押削除) 및 불허가출판물(不許可出版物)’로서 만동묘지(萬東廟誌)를 꼽았다.55) 일제의 입장에서 서적에 기록된 임진왜란에 구원병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의 행위는 매우 불경하게 보았고, 설립 정신으로 의리와 정도를 내세우는 점이 향후 민족의식의 유발로 이어질 것을 염려해 거부감을 드러낸 것이다.

일제의 탄압은 1937년부터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탄압의 첫 과정은 만동묘의 제향에 참여한 유생(儒生)에 대해 단발(斷髮)로서 단죄하면서 시작되었다.56) 한말 단발령에도 불구하고 전통 복식과 의관을 고수 하면서 제향에 참가한 유생들을 범죄자로 몰아 석방의 조건으로 단발 시행을 약속하는 서약서를 제출토록 해 기세를 꺾은 것이다. 그리고 만동묘의 제단(祭壇)을 해체시키고 계(契)를 해산한 후 그 돈을 국방헌금으로 귀속시키면서 유생을 ‘미몽(迷夢)에서 깨어난 신민(臣民)’으로 표현해 그들을 갱생시켰다고 홍보하였다.57)

민족의식을 유발한다는 빌미로 시작된 일제의 탄압은 만동묘 제전집행 관계자들을 구속·취조한 후 제구(祭具)와 신위(神位)를 소각했고 재산의 헌납으로 귀결했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1918년 6월 이후부터 만동묘의 제사와 묘옥(廟屋)의 수리를 금지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7년 10월 16일 오후 11시 50분경 유생 15인이 비밀리 만동묘에 들어가 제전(祭典)을 집행하려 했으므로 그 죄를 물어 화양계(華陽契)를 해산시켰고 그 소속 재산 300냥을 국가에 헌납하도록 처분했던 것이다.58)

중건된 만동묘는 1942년 일제에 의해 최종적으로 철거되었다. 보관되던 위패와 제구 등이 모조리 제거되었고 건물은 해체되었으며, 철거된 부재(部材) 일부는 괴산경찰서 청천면 주재소(駐在所)의 건축자재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만동묘의 묘정비(廟庭碑)까지 철정(鐵釘)으로 글자를 읽지 못하게 쪼아서 묻어버려 만동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려했다. 이처럼 중건된 지 68년 만에 만동묘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다시 훼철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5. 결론

이상과 같이 본 연구를 통해 1874년의 만동묘 중건과 관련하여 살펴본 바를 중건 공사의 배경과 목적, 공사내역과 훼철과정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만동묘 중건은 고종의 친정(親政)에 있어서 유교주의 군주의 이상 실현 일환으로 의리와 정도의 구현이라는 존주대의의 시대상을 반영했던 영건사업이었다. 이는 왕권 강화를 포석으로 종묘와 대보단과 더불어 노론으로 대변하는 신권을 제압하고 왕실의 권위를 표출시켜 정국을 주도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이와 동시에 군주의 위엄은 사림의 충성을 기대하면서 만동묘의 중건에 대한 기여로 구현되었다.

둘째, 중건 공사의 과정에서 기획과 재원은 철저히 국가주도로 마련되었고 공사 조직과 시행까지 충청감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과거 사림이 주도했던 창건 공사에 비해 국가가 주도하면서 만동묘의 성격을 변모시키는데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셋째, 중건 이후 왕실 사전의 하나로 운영되었으나 통감부에 의해 폐지되면서 위상은 변질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각종 사찰과 검열, 그리고 사회적 규제로 철폐의 빌미가 만들어질 때 민족의식을 유발한다는 명목 하에 각종 탄압을 받았고 최종적으로 철거되었다. 특히 일제에 의해 건물이 해체되고 주재소 건축자재로 활용되는 수모까지 겪게 됨은 위상과 존재 의의를 밝히는데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본 연구는 사료 속에 묻혀 있던 만동묘의 중건 공사를 사료간의 비교·고찰로 밝힘으로써 당시 고종의 영건사업 기획을 계기로 변화된 사회상을 이해하고, 동시에 충청감영계록에 기록된 공사내역을 통해 역사적 배경을 규명할 수 있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1.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2.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3. 승정원일기, http://sjw.history.go.kr
  4.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6. 정기철,17세기 사림의 '묘침제' 인식과 서원 영건,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1999
  7. 국립청주박물관, 화양서원과 만동묘,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