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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전각 배치에 대한 풍수적 해석 -팔택론의 관점에서 본 북궐도형 분석을 중심으로-

Feng shui analysis on the Layout of the building in Gyeongbokgung Palace -Focus on the analysis of Bukgwoldohyeong in the Paltaekron's point of view-

  • 투고 : 2018.12.15
  • 심사 : 2019.05.30
  • 발행 : 2019.06.30

초록

This study analyzed "Bukgwol Dohyeong (Drawing Plans for the Northern Section of Gyeongbokgung Palace)", which is an important source material for the restoration of the palace, by applying Paltaekron, the geomantic principle of bearings, in order to clarify the building layout principle of Gyeongbokgung Palace. Gyeongbokgung Palace shows the typical geographical conditions that meet the principle of Baesan Imsu (mountain in the back and water in the front) which takes Baegaksan Mountain as the main mountain and the overall layout of the buildings that meet the principle of 'Jeonchak Hugwan (narrow in the front and broad toward inside)' by using the natural topography that meets the principle of 'Jeonjeo Hugo (low in the front and higher toward back).' It is estimated that this layout and arrangement must have been led by geomantic principle of bearings. The analysis of the building layout plan of Gyeongbokgung Palace in the late Joseon Dynasty Period suggests the application of two methods: one is to divide central area from Gwanghwamun Gate to Geoncheongung Hall into eight layers and the other is to apply the bearings of the Eight Trigrams based on the building that becomes the center. As a result, the gate, main hall, and kitchen of all major buildings where the royal family lived are located in the auspicious bearings according to the geomantic principle of bearings while the spaces where people other than the royal family such as those who served the royal family and the officials operated in the palace or the hall that enshrines the ancestors such as Taewonjeong Hall are located in the ominous bearings. Therefore, the buildings of Gyeongbokgung Palace are arranged based on the geomantic principle of bearings.

키워드

1. 서론

1-1. 연구의 배경과 목적

우리나라 궁궐의 입지는 주역과 같은 동양사상을 바탕으로 한 풍수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것은 건축물의 좌향이나 각 전각의 활용 방법 등에 있어서도 중심 논리로서 폭넓게 활용되었다. 풍수사상의 논리는 조선 왕조의 건국과 함께 한양 천도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적절한 명분으로 활용되기도 하였으며, 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이 주도했던 경복궁 중건에 있어서도 사상적 배경으로 뿌리 깊게 스며들었다. 특히 대원군이 주도한 경복궁 중건의 직접적인 기록으로 남겨진 『경복궁 영건일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경복궁의 입지환경이나 건축물 좌향 등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풍수사의 동참 행보1)가 있었으며 그 외에도 실질적인 영역에서 풍수사상이 다양하게 적용2)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경복궁의 건축물이 수리, 보수, 해체되면서 발견된 전각이나 문루의 각종 상량문 기록 등에서도 풍수사상의 논리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들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궁궐건축에 대한 건축학계의 연구는 주로 상징체계와 의례 행위의 규명, 목조 결구의 특성 파악, 수리와 복원을 위한 원형의 추정 등에 집중되어 왔으며 각 전각의 배치가 어떠한 이론적 근거에 의해 결정되었는지에 대한 건축계 획적인 측면의 연구는 미흡한 실정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기존의 건축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풍수사상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경복궁 전각의 배치계획에 관한 구체적인 문헌기록이 거의 전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게다가 지금까지 궁궐건축에 대한 풍수학계의 연구는 대부분 거시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전체적인 지형적 특징, 사신사의 형상과 상호 관계 등 형세적인 내용이 아니면 혈처의 위치 규명, 용맥의 흐름 파악과 같은 연구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또다른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풍수 사상이 혈처나 명당이외에도 전각을 중수하거나 심지어 수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고 하는 문헌 기록의 사실로 볼 때 전각의 배치 역시 풍수적 방위관에 의해 계획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현재 복원이 진행 중인 경복궁은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한 일환으로 중건된 당시의 상황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고종시기 중건이란 당대 최고의 기술과 자재를 동원하고 최고의 격식을 갖춤으로써 조선 왕조의 역량을 총체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수단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종시기 중건된 경복궁의 배치와 이후의 변화상을 반영하고 있는 북궐도형은 창건 당시 초기 공간 구조의 기반 위에 북쪽영역으로 새로운 전각을 구성하면서 형성된 궁궐 배치의 양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고종시기 중건된 경복궁은 새로운 형태의 궁궐 공간으로 해석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3)

본 논문은 지금까지 선행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팔택론의 관점에서 『북궐도형』을 분석하여 경복궁 전각의 배치계획이 풍수적 방위관에 의해 계획되었음을 논증하고 그 특징은 무엇인지 도출해 보고자 한다. 팔택론은 방위를 적용하는데 있어서 당시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되던 원리로서 궁중에서는 당연히 가장 보편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논리를 선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2. 연구 방법 및 선행연구 검토

우리나라에 전해진 양택서로는 음양이택설의 『황제택경』과 팔택론의『양택삼요』가 주를 이루고 있다. 양택의 방위를 계절에 따른 기운의 변화를 가지고 설명한『황제택경』은 현존하는 양택서 중 가장 오래된 저서로 알려져 있으며, 저술 시기는 당대(唐代)로 추정하고 있다. 『양택삼요』는 청대 조정동(趙廷棟: 1696-1785)에 의해 저술된 것이지만, 김혜정은 『양택삼요』의 내용이『팔택명경』에 동일하게 수록되었다는 내용을 제시함으로서 명대(明代) 이전의 이론4)임을 밝혀주었다. 또한 『팔택명경』 서문에 청대(淸代) 고오려(顧吾廬)가 전하는 내용에 의하면 당대(唐代) 양균송의 저서로서 약관도인(箬冠道人)으로부터 전수되었다고 하여 그 연원은 더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문헌에서 보여 지는 방위관은 모두 기(氣)의 조화를 중시하고 있으나, 팔택법은 주로 팔괘를 이용하여 구성론(九星論)과 연계되는 시기에 수용된 이론으로 양택 풍수의 중심이론이 되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풍수적 방위관의 관점으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배치5), 민택의 활용 가능성6), 현대 주택의 아파트 공간구성7)등 다양한 측면에서 접목해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궁궐건축에 적용한 연구 논문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그것은 오랜 복원 공사 등으로 인해 건축적 변화가 많았던 궁궐의 특수한 상황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건축물 변화에 따른 풍수론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뿐만 아니라 팔택법이 청대 이론으로 알려져 명대에 해당하는 경복궁 초기 궁궐의 영건 시점과 맞지 않는다는 점이 더 큰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팔택론은 청대 이전에 이미 형성된 논리이고 창건 경복궁의 기본적인 건물 배치는 중국 궁궐제도 특히 명대의 궁궐과 공통되고 있다는 연구 결과와 함께8), 조선 초기 궁궐의 방위는 물론 조선 전 시기에 걸쳐 팔택법이 중심 이론으로 자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박정해는 팔택론의 핵심원리가 상생과 상극의 이분법적인 논리 체계에 당대(唐代) 양균송의 구성론을 접목한 것으로 공간구성의 다양성이 존재함은 물론, 공간배치론의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적용의 범주를 더욱 확장 시켜주었다.

경복궁 각 전각의 배치 원리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은 각각 전각들이 어느 전각을 상대적인 중심으로 삼아 방위를 결정 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경복궁에 대한 선행연구자들의 논문, 관련 지도 및 사료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하였으며 현장 답사를 통해 이를 상호 비교해 보았다.

2. 팔택론에 관한 이론적 배경

풍수에서 건물의 이상적인 배치는 지세, 대지의 형태, 주변의 건물이나 도로와의 관계 등 제반사항에 의하여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방위에 관한 개념은 자연과 인간의 본질적인 관계를 주역(周易)에 바탕을 두고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비록 동일한 형태의 건물이라고 하더라도 건물과 대문의 방위에 따라서 그 건물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상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 공간을 구성하는 이 건물들의 방위가 풍수적 방위관에 부합하면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생활이 매우 순조롭게 발전하게 되고, 그 반대 의 경우는 발전의 속도가 느리며, 심지어 질병과 재산의 손실 및 인명의 피해 등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된다는 생각으로까지 발전되었다.

팔괘의 방위는 건(乾)·곤(坤)·간(艮)·손(巽)·감(坎)·리 (離)·진(震)·태(兌)이고, 양택풍수론에서 주택의 삼요(三要)는 문(門)·주(主)·조(灶)이다. 가상의 배치는 문을 기준으로 하는데 사길택(四吉宅)과 사흉택(四凶宅)으로 나눌 수 있다. 사길택은 생기, 연년, 천을, 복위(중길)이고, 사흉택은 화해, 절명, 오귀, 육살택이다. 즉 모든 주택의 좌향을 팔괘 방위의 좌향으로 구분하여 측정하 고 팔방위의 공간마다 구성(九星)을 배정한다. 그 결과 생기, 연년, 천을, 복위에 해당하는 방위에 대문이 있 으면 길문(吉門)이고, 화해, 절명, 오귀, 육살에 해당하는 방위에 대문이 있으면 흉문(凶門)으로 가택의 길흉을 판단하는 것이다.

팔택론에서는 주택의 종류를 정택, 동택, 변택, 화택으로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마당 하나에 독립된 집을 가리켜 정택이라 하고, 마당이나 건물이 다섯 겹까지를 동택이라 하고, 6-10겹까지이면 변택, 11-15까지는 화택이라 한다. 이러한 주택의 분류는 주택에서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관청이나 사당, 사원, 사찰, 공관, 점포는 물론 문묘 등에도 폭넓게 적용한다. 특히 관청은 백성을 다스리며 정사를 돌보는 곳으로 정청의 자 리는 “마땅히 높고 모양이 똑바르고 밝은 곳에 있어야 관장이 어진 정사를 베풀고 명쾌한 판결을 내릴 수 있다”9)고 하였다. 관청 중에서도 정청의 자리는 모두 탐랑, 연년, 천을과 같은 길성에 위치해야 함을 밝히고 있는데 양택이 여러 층(層)10)으로 나누어져 있을 때 각 층의 배치에 대해 기본이 되는 이론으로 오행의 상생관계에 의해 택(宅)의 배치가 이루어지며 번성11)은 정오행을 쓴다. 거문이 무곡을 생하고, 무곡이 문곡을 생하고, 문곡이 탐랑을 생하고, 탐랑이 염정을 생하고, 염정은 거문을 생하는 것이다. 이는 즉 오행의 상생의 관계를 설명한 것으로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가 이루어짐을 말한다. 팔괘의 경우 목·토·금이 모두 음양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수·화는 나누어져 있지 않으므로 변택의 경우 번성은 쌍금, 쌍목, 쌍토를 쓰는데 번성이 팔괘에 맞추어진 이유이다. 화택은 15겹에서 그치는데 5수, 10수가 모두 토의 숫자가 된다. 모든 만물은 토위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있는 모든 만물은 변화하는 것으로 화택이라고 하였다.12)

3. 팔택론으로 본 경복궁 전각의 배치 특성

경복궁은 남북으로 축을 이룬 정문과 정전, 편전, 침전 등 다른 궁궐에서 볼 수 없는 정궁으로서의 엄격함과 위상으로 궁궐 자체가 갖는 모습도 중요하지만 궁 궐각 전각의 위치가 갖는 상징성이 돋보이는 건축군(建築群)이다.

북궐도형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궁궐 전체 영역을 감싸고 있는 궁장(宮墻) 형상으로 앞면이 좁고 뒷면이 넓은 모습이다. 양택이론 중 “전착후관, 부귀여산, 전저후고, 세출영호(前窄後寬, 富貴如山, 前低後高, 世出英豪)”라고 하였다. 전착후관 하면 부귀가 산과 같이 많으며, 전저후고 하면 영웅호걸이 세상에 나온다는 말로 이렇게 입구가 좁고 뒤가 넓은 모양의 집터는 주로 크게 발복하거나 영웅호걸을 얻으므로 이러한 모양을 참조하여 집을 수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반면에 만약 이와 반대가 되면 빈곤하고 인재는 물론 수명이 짧아지고 후손이 끊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상은 장례에 사용하는 중국식 관(棺)의 모양과 같다고 해서 관재형이라고도 하는데 앞이 좁고 뒤가 넓은 사다리꼴의 모양의 터를 길하게 여기며 이것을 전착후관 하다고 한다. 또한 집터는 앞이 낮고 뒤가 높은 모양이어야 길한데 이것을 전저후고 하다고 하며 길한 집터의 조건은 반드시 전착후관 하고 전저후고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13) 경복궁은 남북축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전착후관 하며 철저한 좌우 대칭적인 배치구도라기 보다는 주로 근정전 일곽의 일부 구역에서만 대칭이 이루어졌을 뿐이며 정전의 뒷부분은 앞부분의 정렬된 모습에 비해 비정형화된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각 시기별로 상황에 따라 경복궁을 수리하고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궁궐의 모습이 변화해 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전착후관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변화되었을 가능성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경복궁은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중추적인 기관으로써 국왕의 정치 활동 및 왕족의 생활, 그리고 그들을 보조하는 사람들의 활동 등에 적합한 수많은 전각들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전각들은 사용 주체나 건립 목적과 용도, 건물의 형식 등의 관점에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경복궁의 방위는 계좌정향14)이다. 이는 자좌오향, 임좌병향과 더불어 팔괘의 방위로 모두 리문감주(離門坎 主)에 속한다. 그리고 경복궁 정문의 방위는 리방(離方)이므로 감궁(坎宮)에 대한 리성(離星)은 연년이 된다. 팔택론으로 볼 때 경복궁 배치에는 두 가지 방법이 적용되었다. 하나는 광화문을 기준으로 남북 종적으로 중심부를 나누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풍수의 혈처인 중심 전각을 기준으로 팔괘의 방위를 적용하는 방법이다. 이같은 방법에 따라 문과 마당의 위치, 전각의 기능을 고려하여 중심부의 공간을 8개 층으로 나누었으며 변택으로 분류하였다. 더불어 인간생활의 길흉화복에 연관되어 풍수적 방위관으로까지 발전된 주역의 상과 괘사의 의미를 함께 적용하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우선 경복궁 중심부를 이루는 전각의 배치에 따른 방위의 길흉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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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북궐도형 중심부의 팔택 공간 구성과 전착후관

먼저 팔택 공간의 구성을 살펴보면 제1층은 광화문에서 홍례문까지의 영역으로 연년에 속한다. 연년은 무곡성으로 무곡은 북두칠성의 제육성이며, 합양복덕궁(闔陽福德宮)으로 극귀지상(極貴之象)이다. 연년이 속한 방의 기운은 주로 법을 감독하거나 병권을 가진 영웅호걸이 나오는 방이다. 생기, 천을, 연년의 삼길성이 제자리에 있으면 능히 귀(貴)함과 부(富)함이 빨라지고 자손도 빨리 얻을 수 있다. 이 공간에는 건축물 이 하나도 들어서 있지 않지만 외부에서 들어오는 기운이 좋은 연년의 방으로 길한 방위에 궁궐의 정문을 놓았다. 주역의 괘로는 가인괘(家人卦)15)로 리(離)가 안에 있고 손(巽)이 밖에 있어 바람이 불에서 나오고 바람이 안에서 나오니 집에서 밖에 이르는 상이다.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뜻을 함유16)하고 있는 괘사에서 말해 주듯이 가정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정치적 염원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제2층은 홍례문에서 근정문까지의 영역으로 절명에 속한다. 절명은 금(金)에 속하고 악질과 요절하며, 대가 끊어지고, 외로운 과부에 재산이 흩어지는 대흉방이다. 이러한 흉성은 문·주·조 모두에 범하여서는 안되며 발복하기 어려운 자리이다. 풍수적으로 대흉방에 대한 가장 좋은 비보는 흉을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을 때 사용되는 방법으로는 문과 문을 만들어 빈 공간을 구획하는 것이다. 즉 흉방에는 전각을 구성하지 않고 문과 문을 놓아 흉방의 공간을 만들어 완충적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금천교 영역은 다른 전각의 구성없이 수로만으로 구성하였다. 풍수에서 물은 혈을 결지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경복궁의 수로는 혈처를 보호하고자 하는 역할로서 궁궐의 중심전각을 부드럽게 감싸 안은 형상으로 만들어 졌다. 그러나 물은 형상으로서 그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적인 요소로서도 의미가 있다. 즉, 궁중의 생활수로서 사상적으로 나쁜 기운 등 불결한 것들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역할을 전각이 놓이지 않는 흉방에서 물이 흘러 나가게 하였는데 이는 벽사 시설 등과 마찬가지로 풍수 비보의 한 방법17)으로 사용되었다.

이 방의 괘로는 동인괘(同人卦)18)이다. 하늘 아래에 불이 있다거나 불이 하늘 아래에 있다고 말하지 않고 “하늘과 불(天與火)”이라고 말한 것은 하늘이 위에 있고 불이 위로 향하니 둘은 이 점에서 서로 같다는 말이다. 이 괘는 하늘과 불이 위에 있고 위로 향하는 상을 취하여 동인이라 하였다.19) 여섯 효는 모두 괘의 뜻을 나타내지 못하였으므로 길함을 얻을 수 없고 다만 후회가 없을 뿐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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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북궐도형의 금천교 영역

제3층은 근정전의 영역으로 다른 전각의 구성이 없이 월대를 높이 쌓아 근정전만으로 구성하였다. 팔택의 구성으로는 흉성의 의미로 이 방위는 수(水)에 속하고 육살방으로 주로 음탕함과 재산이 흩어지는 흉방이다. 그러나 팔택의 구성에서 대당의 자리로 가장 큰 전각을 구성하여 권위와 위엄을 보이고자 하였다. 괘 로는 명이괘(明夷卦)20)로서 리(離)가 아래에 있고 곤(坤)이 위에 있어 밝음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이다. 정치적으로 군자에 대해서 말하면 암흑의 시대이다. 군자가 이러한 때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간정(利艱貞)’해야 하는데 이간정의 뜻은 어려운 처지에서 바르게 함이 이롭다21)는 것으로 안이 어려운데도 그 뜻을 바르게 하면 이로움이 따른다는 의미이다.

제4층은 사정전 영역으로 보필이다. 보필성은 정해진 것이 없으므로 주된 것이 길하면 길해지고 주된 것이 흉하면 흉하게 된다. 괘로는 리괘(離卦)이다. ‘리(離)는 바르게 하고 온순하게 하면 형통하고 길하다’22)고 하였다. 리괘에서는 일생의 찬란한 역정과 사회 속 에서의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의 문제를 말하였다. 리괘는  이다. 불의 성질은 위로 타오르니 중순하면 부딪치지 않는다.

리괘의 괘상과 효상에 근거하여 나타낸 사상은 매우 풍부하고 깊다. 리괘는 ‘중’을 더욱 강조 하는데 육이와 육오 두 효는 각각 상체와 하체의 가운데 있기 때문에 모두 길함을 얻는다. 리쾌는 특히 ‘유(柔)’, ‘중 (中)’, ‘정(正)’ 셋을 겸비한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는데, 괘를 이루는 주효로서 일체의 아름다운 품덕과 신상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23) 왕이 업무를 보는 편전으로 회의와 경연 등이 이곳에서 행해졌다. 왕의 마음은 중정을 지키고 사리에 밝게 해야 길함을 얻는다는 의미의 자리이다.

제5층은 강녕전과 교태전이 있는 침전영역으로 생기이다. 생기는 탐랑성과 같으며 목(木)에 속하고 진손감리궁(震巽坎離宮)에 있어야 제자리며 주로 인품이 고결하고 부귀하다. 집안이 번창하고 문예도 다양하게 뛰어나고 모든 일에 정통하고 전문적이며 막힘이 없는 길한 방이다. 괘로는 풍괘(豐卦)로 괘사로는 ‘풍은 형통하니 왕이어야 이르나니, 근심이 없게 하려면 마땅히 해가 중천에 비추듯이 해야 하니라’24)하였다. ‘풍’ 자의 기본의미는 크고(大) 많고(多), 차고(盈), 충분하다(足)는 것이다. 왕이어야 이른다는 것은 큰 자리에 있어야 무엇이든지 이루기가 쉽고 바르게 보아야 함을 말한다. 또한 근심이 없게 하려면 마땅히 해가 중천에 비추듯이 해야 한다는 의미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지키며 해가 모든 만물을 고르게 비추는 것과 같은 중정된 마음으로 비춰짐을 뜻한다. 리(離)가 아래에 있고 진(震)이 위에 있으며 진은 움직임이고 리는 밝음이다. 바른 행동이 형통함을 이룰 수 있음이다. 궁이라는 관청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들인 왕과 왕비가 생활하는 곳이다.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을 가장 중심에 놓았고, 왕의 마음은 바르고 밝게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치우침이 없이 마치 해가 중천에서 비추듯하는 중정의 마음을 가져야 길함을 얻을 수 있음을 자리로서도 강조한 것이다.

제6층은 함화당과 집경당의 영역으로 오귀이다. 오귀는 염정성과 같으며 오행으로는 화(火)에 속한다. 앙화(殃禍), 소송, 구설, 시비, 화적이 있는 방으로 조급하고 난폭하여 흉악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흉방이다. 이 영역은 내전에 속하는 영역으로 「경복궁배치도」 에서는 영훈당과 함께 보광당 춘희당이 거의 비슷한 크기로 나란히 정열되어 있었으나 북궐도형에서는 보광당과 춘희당이 있었던 자리에 함화당과 집경당이 들어서 있으며 아미산 북쪽으로 흥복전이 있다. 이 영역의 건물들은 대부분 침전으로 지여졌으나 어느 건물을 누가 사용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고 왕실 가족들의 형편에 따라 탄력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종은 이곳에서 자주 외교관들을 접견하거나 대신들을 만나 정사를 논하고 왕실의 행사를 치르는 등 전각의 용도를 특정하지 않고 다양하게 활용하였다. 고종 27년 흥복전에서는 대왕대비인 신정왕후가 승하하기도 하였으며, 고종 30년에는 양로연을 위한 내연을 열기도 하였다.

괘로는 혁괘(革卦)이다. 혁괘는 리(離)가 아래에 있고 태(兌)가 위에 있어 못 속에 불이 있으며, 불과 물은 서로가 서로를 없애는 것이나 지금은 함께 있으니 물이 불을 끄고 불이 물을 태워서 서로 변혁하는 상이다. 물의 성질은 아래로 내려가고 불의 성질은 위로 올라가서 둘은 서로 다가가서 상극(相剋)하고 서로 변 혁한다. 공자의 「단전」에서는 혁괘의 사상에 대해 깊은 이론적 해석을 하였다. “천지가 변혁하여 사계절이 이루어지며 탕무가 혁명하여 하늘을 따르고 사람에 응하니 혁괘의 때가 크다(天地革而四時成, 湯武革命, 順乎天而應乎人, 革之時大矣哉)”라는 구절은 매우 깊은 철학적 의미를 갖는데, 천지와 사계절의 변화나 변혁을 어떤 주재도 없는 자연운동으로 간주하고, 인류사회의 발전과 자연계의 운동이 객관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보았다. 또한 고대의 혁명과 개혁은 “통치계급 내부에서 진행된 것이다.”25)라고 하였다. 이방은 처음에는 후궁과 궁녀들의 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구성하였으나 전각의 활용은 실질적으로 왕의 정사를 보는 정무공간으로 변화시킨 것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의 대부분 전각은 용도가 정해져 있으며 누가 사용하였는지 기록이 남아 전해진다. 그러나 이 영역의 전각들은 특정되지 않고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전각의 활용측면에서 혁괘의 괘사와 어울리는 공간 활용이라고할 수 있다.

제7층은 향원정이 있는 누각으로 화해이다. 화해는 녹존성과 같으며 녹존성은 북두칠성의 제삼성이며, 천기절체궁(天機絶體宮)으로 병권지상(兵權之象)이다. 괘로는 비괘(賁卦)이다. 상으로는 리(離)가 아래에 있고 간(艮)이 위에 있는 것으로 불이 산 아래 있으니 밝음이 안에 있고 그침이 밖에 이른다. 사건을 처리하고 판결하는 것이 모두 신중해야 하고 경솔하게 처리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26) 즉 이익이 작으니 시간을 오래두고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 괘사로 설명된다. 향원정은 건청궁과 함께 지어진 정자로 왕족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세조 2년에 지어졌던 취로정이 있던 자리가 고종시기 향원정이 되었다. 경회루와 마찬가지로 누각은 길방에 놓이지 않았다.

경복궁 후원에 속하는 이 영역은 원래 논 두서너경(頃)을 개간하여 백성들의 농작27)을 살펴보기 위한 공 간이 있었다. 조선시대 환관들이 궁중 납품을 목적으로 채소를 재배하던 밭이나 관서에 해당하는 곳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왕과 왕비(兩殿)가 취로정에 나아가 관가(觀稼)하였다28)는 내용과 영의정 신숙주(申叔舟)등은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 후원의 농작을 구경하였다29)는 기록 등에서 확인이 된다. “내농작 (內農作)의 모든 기구를 후원에 배설하였는데, 왼편은 경회지 북쪽 첫 섬돌로부터 북쪽 담장 소문 안까지 이르렀고, 오른편은 충순당 앞 섬돌로부터 취로당 앞까지 이르렀다.”30)고 하는 기사의 내용과 후원공간에 위치하는 각 전각의 배치에 대한 추정도31)의 연구 결과로 보아 농작영역의 위치를 취로정과 충순당 사이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경복궁을 일단 중건(重建)하면 내 농포(內農圃), 남채전(藍菜田)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다.”32) 는 경복궁 중건 직전의 기사의 내용으로 경복궁 중건 계획단계에서부터 후원 영역의 변화 를 예견해 볼 수 있게 한다.

경복궁 후원의 농작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내농포 환관들의 횡포에 대한 여러 번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풍습33)이었으나 경복궁의 후원에 대한 확대 계획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향원정의 연지가 건청궁의 마당 크기에 맞추어 크게 사각으로 확장하여 조성된 것을 볼 수 있는데 풍수적 방위관으로도 하나의 영역구성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확보 되었으므로 팔층 건청궁의 길방을 고려한 계획된 공간구성의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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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경복궁 북쪽 후원지역의 각 전각의 추정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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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북궐도형 북쪽영역

제8층은 건청궁이 있는 영역으로 천을이다. 천을은 거문성이다. 거문성은 부두칠성의 제이성이며, 천선의 성(天旋醫星)으로 부귀지상(富貴之象)이다. 거문성의 천을은 천의와 같으며, 오행상으로는 토(土)에 속하고 건곤간태(乾坤艮兌)궁은 토와 금으로 서로 상생이 되 므로 주로 복록과 부귀를 관장하는 궁으로 길한 방이 다. 괘로는 기제괘(旣濟卦)이다. “기제는 형통할 것이 작은 것이니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 처음은 길하고 나 중은 어지러우니라”34)고 하였다. 기제괘는 64괘의 끝에서 두 번째 괘로 기제의 뜻은 험난함에서 벗어나서 어려움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천하의 만사만물이 이미 이루어져 구제된 것을 말한다. 이른바 옛 과정이 끝나 고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 이 괘의 구성을 보면, 리 (離)가 아래에 있고 상체가 감(坎)으로 물의 성질로 위 에 있지만 아래를 윤택하게 불은 아래에 있지만 위로 타오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물과 불이 서로 구제하 여 수화기제가 되는 것이다. 기제는 비록 환난의 때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환난은 반드시 기제의 뒤에 생기 는 것으로 군자는 기제괘의 상을 보고서 환난을 생각 하여 미리 방비할 줄 알아야 한다.35)고 하였다.

고종 당시에도 경복궁에서 건청궁은 꼭 필요한 전각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여러 대신들의 상소가 이어졌고, 당시의 재정상태도 그동안의 경복궁 중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일부 신하들은 건청궁이 지어지는지 조차도 모르게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에 의해 추진된 건청궁의 건립은 적당한 명분이 필요했다. 건청궁을 완성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선택한 방법은 ‘어진을 봉안하 는 곳’이었다. 조선은 예의를 가장 중요하게 신봉하던 사회이다. 당시 예를 목숨같이 여기던 조선 시대의 상황으로 보아 조상의 어진을 더 잘 모시려고 한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막을 수 없는 충분히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흥선대원군이 탁지부가 아닌 내탕전을 쓰면서 까지 건청궁을 지어야 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고종 10년 8월의 좌의정 강로가 건청궁 공사비용을 절약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대로합하(大老閤下)의 말씀을 듣고 나서 어진을 봉안하 는 곳으로서 칸수가 매우 적고 그 규모가 화려하지 않을 뿐더러 또한 공한길지이므로 대로 합하께서 조치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신들은 모두 사체(事體)로 보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멀리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그 내막을 모르고 틀림없이 10년간 토목공사를 하다가 또 이 공사를 벌리고 있으니 공사가 끝날 날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36)

위의 내용을 보면 ‘공한길지이므로 대로합하께서 조치하신 일’이라고 하여 흥선대원군은 건천궁을 길지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이 자신의 뜻37)으로 건청궁을 짓는 것이라 하고 있으나 우의정 강노는 대원군의 조치이며 대원군으로부터 들은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대원군이 깊게 관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신들도 일의 진행과정이나 명분으로도 충분히 설득되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보인다. 다만, 오랜 공역으로 인해 공사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건청궁이 지어질 당시는 고종이 그동안의 수렴청정과 흥선대원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서서히 자신의 역량을 키워가던 시기이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위상과 영향력이 퇴조하고 있는 상황38)이라 하더라도 건청궁은 여전히 흥선대원 군의 영향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음을 판단해 볼 수 있 다. 중건 당시부터 좋은 방위로 인식하고 있었던 흥선대원군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재정이 어려웠어도 건청 궁의 건립을 끝까지 추진할 수밖에 없었으며 건청궁의 방위를 수화기제의 대길방으로 완성하였다.

표 1. 리문감주팔층아서도(離門坎主八層衙署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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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서 중심부를 벗어난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지는 영역은 층이 아닌 방위의 개념인 방(方)으로 구분하였다. 제5층의 탐랑 목(木)을 고대라고 하였는데 방위의 중심기준이 되는 방으로 삼았다. 경복궁은 리문감주(離門坎主)로 동사택에 해당한다. 동사택에 해당하는 길방은 남, 북, 동, 남동의 4방위이고, 서사택 방 위에 해당하는 방위는 흉방에 해당하는데 서, 남서, 북 서, 북동의 4방위이다. 광화문을 기준으로 팔괘의 방위와 가택 구성의 방위를 적용시켜보면, 남쪽은 기두로 복위에 해당하고 남동쪽은 천을방, 동쪽은 생기방, 북 동쪽은 화해방, 북쪽은 연년방, 북서쪽은 절명방, 서쪽 은 오귀방, 남서쪽은 육살방으로 나누어진다. 목(木)이 리문(離文)의 화(火)를 생하는 수목상생이고 목화통명의 대길한 궁궐이며, 승진전보에 가장 유리한 관청의 자리이다.

동부 남동쪽 철을방으로는 동궁을 배치하였다. 천을 은 천의라고도 하며 8층과 같은 거문성의 방향이다. 거문성은 양토(陽土)로 사람과 재산이 다 불어나고 공명을 삼교39)에 떨치며 의술과 복술에도 총명함을 나타내는 길방이다. 왕세자가 머무는 동궁은 왕족의 미래 이다. 왕권을 이어갈 세자가 안전하고 건강해야 했으므로 길방의 배치는 당연한 이치이다.

동부 동쪽 생기방은 주방이 배치되었다. 주방은 팔택이론에서 문주와 함께 중요하게 인식되었는데 만약 주방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집안에 질병이 많고 불안하여 이롭지 못하다고 하였다. 부엌은 생명을 양육하는 근본의 자리로 만병이 모두 음식에 따라 생기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천을방인 진손사(辰巽巳)방위, 생기방인 갑묘을(甲卯乙)방위, 연년방인 임자계(壬子癸) 방위가 함께 길하지만 손진(巽震) 방위가 상길이고 감 (坎)방은 차길이다. 록은 곧 부엌이요 음식은 곧 식록의 뜻40)으로 경복궁은 부엌을 가장 좋은 방위인 진방 즉 생기방에 배치하였다.

동부 북동쪽 화해방에 자경전이 놓였다. 중심부의 7 층과 같은 방으로 녹존성에 해당한다. 왕족이라고 해서 모두 좋은 방위에 들어갈 수 없었다. 길방과 흉방은 정해진 것이고 왕족 내에서도 철저하게 중요도와 서열이 정해진다. 왕과 왕비는 중심전각에서 가장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동궁은 왕권의 미래라면, 자경전은 왕의 모후나 조모 등이 사용하는 전각으로 현 권력 에서 한발 뒤로 물러선 세력이 된다. 즉 모후는 다음 세대에게 권력을 넘긴 그 다음 서열이 되는 것이다. 또한 궁궐은 왕족뿐만 아니라 그들을 보조하기 위한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한데 궁궐에서 왕족이 아닌 상궁 이나 나인들이 머무는 공간은 왕족에 비해 그 중요성이 떨어진다. 내전은 외전에 비해 거주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으므로 그에 따른 다양한 성격의 부속 건물들이 복잡하게 지어졌으며, 그들을 위한 공간이 이 방위에 배치되었다.

서부 남서쪽 육살방에는 수정전과 궐내각사가 위치 한다. 중심부 제3층의 문곡성과 같은 방에 해당한다. 이곳은 외전에 속하는 공간으로 궁에서 근무하는 관리들이 머무는 관청이 있던 자리이며 또 궁을 지키는 군사들이 머무는 건물들이 있던 곳이다. 이곳 또한 왕족이 직접 생활하는 공간이 아니고 왕족의 안위를 지키는 방으로 왕족을 위해 군사가 주둔하였다는 것은 육살이라는 흉액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 왕족의 입 장에서 방위에 맞게 적절하게 적용배치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서부 서쪽 오귀방에는 경회루가 위치한다. 중심부 제6층의 염정성과 같은 방에 해당한다. 오귀는 중앙이 높고 큰 것을 염정이라고 하였다. 팔괘의 괘상으로 보면 그 방위는 태(☱)방으로 연못을 나타내는 문자 부호41)이다. 경회루는 조선에서 가장 크게 지어진 누각으로 연못 위에 지어졌다. 대개 관청에서 크게 흉하고 예측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오귀를 범하는 것인데 흉에 이르지 않는 방법으로 길방에 위치해야 하는 것은 길방에 놓고 흉방에 놓여야 하는 것은 흉방에 놓이는 것이다. 팔택법에서 길방에 놓여야 하는 것은 대문 안방 부엌이라면 흉방에 놓여야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 화장실이다. 즉 문·주·조 이외의 것들은 화해 방과 절명방·육살방에 위치해야 한다. 예를 들어 화장실이 길방에 있으면 병이 많고, 흉방에 있으면 병을 물리친다고 하였다. 경회루는 사람이 항시 머무는 곳 이 아니라 연회를 열거나 사신의 접대 등 필요한 시간에만 사용되던 곳으로 방위적으로 길방에 놓여질 필요가 있는 전각은 아니었다. 풍수적으로 연못을 나타내는 방위에 누각을 조성하고 오귀방에 물을 이용하여 귀신을 물리치기위한 방법은 풍수적 비보로서 아주 적절한 배치가 되었다. 서원이나 향교 등에 남아있는 연못이나 정자·나무·비각 등으로 비보를 하였다는 그동안의 연구 결과42)에서도 보여지듯이 이러한 궁궐건축의 풍수적 비보의 방법은 경관적으도 수용하기 좋은 방법으로서 권위와 명분을 중시하던 조선 사대부들에게는 궁궐건축에서의 비보형태가 좋은 본보기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해 볼 수 있다.

서부 북서쪽 절명방에는 태원전을 비롯한 문경전, 회안전 등 왕실의 상장례를 위한 전각이 있었다. 중심부 2층의 파군성과 같은 방에 해당한다. 절명이라는 말에서 나타내고 있듯이 사람의 목숨이 끊어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정도의 아주 무서운 흉방이다. 이 영역은 영전(靈殿), 빈전(殯殿), 혼전(魂殿)으로 쓰였던 공간이다. 영전은 조상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고, 빈전은 왕실가족이 돌아가셨을 때 산릉에 모셔지기 전까지 관에 모셔 보관하는 곳이며, 혼전은 종묘로 모셔지기 전까지 산릉의 장이 끝난 후에 삼 년상을 다 치를 때까지 위패를 모시며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다.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은 모두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라면 죽은 자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진 곳이 태원전 영역이다. 위치로 보아도 궁궐 내 에서 서북쪽 가장 후미진 이곳이 산사람과의 경계를 짓는데 아주 적절하였으며, 풍수적 방위관으로 절명방 이 되니 서북쪽에서도 가장 서쪽의 자리에 죽은 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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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경복궁 배치와 팔택구성

경복궁의 영건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해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는 태조가 풍수를 보아 자리를 잡았던 시기에서 세종에 의해 서서히 법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 동부와 서부로 필요한 전각들이 추가적으로 지어지기는 하였으나 중심전각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금씩 그 영역이 넓어졌을 뿐 중심부의 뒷쪽으로 크게 확장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후기는 고종에 의해 새롭게 궁궐 북쪽으로 영역을 넓히게 되면서 궁궐의 중심이 변화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경복궁 초기 완성된 건물의 칸수가 390여 칸이고 북궐도형에 서의 칸수가 7,480여 칸으로 변화된 것을 비교해보면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경복궁은 북궐도형에 근거하여 복원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으로 중심부의 배치는 8층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변택으로 구분하고 분석되었다.

고종대 이전에 그려진 「경복궁전도」와 이후의 「북궐도형」을 비교해 보면 초기 경복궁에 적용된 배 치 계획은 8층이 아닌 5층 동택(금→수→목→화→토) 으로 자리를 잡았다가 후기 고종에 의해 대대적으로 영건이 되면서 8층 변택(금·금→수→목·목→화→토·토) 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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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경복궁전도의 동택 구성도 (삼성출판 박물관소장)

조선 초기 풍수가 반영된 경복궁의 모습과 조선 후기 북궐도형으로 바라본 궁궐의 모습은 많은 차이가 있다. 초기 계획의 구성에서는 목(木)의 자리인 근정전이 길방에 위치하여 계획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사정전은 화(火)의 방으로 염정에 해당되어 흉방에 놓이는 데 이때 변택과 동택의 길흉 구성이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조선 500년 동안의 오랜 역사에서 생활공간의 확대와 실제 공간 활용의 변화로 발생되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초기 형세를 중시했던 풍수관이 후기 향법을 선호하는 풍수관으로 변화하는 것과도 함께 연결해 볼 수 있으며, 그 결과 경복궁의 배치가 시대의 흐름에 맞게 계획 변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4. 맺음말

이상은 경복궁의 전각 배치 원리에 대하여 풍수적 방위관인 팔택론을 적용하여 보았다. 팔택론은 당대 (唐代) 양균송의 이론으로 우리나라의 초기 궁궐제도 는 물론 조선 말기의 건축에 이르기까지 충분이 수용 되어 양택 풍수의 중심이론으로 폭넓게 활용되었을 가 능성이 매우 높다.

경복궁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전착후관’으로 변화된 모습이다. 입구가 좁고 뒤가 넓어지는 모양으로 과거의 경복궁 전도와 비교해 볼 때 그 변화가 확연하다. 또한 경복궁은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는 전형적인 배산 임수의 자연적인 형상을 갖춘 곳으로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전저후고’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조건은 양택이나 관청의 입지를 고르는데 가장 좋은 형상으로 경복궁의 모습은 풍수적 방위관에 맞춰서 의도적으로 변화되었음을 반증해 준다. 특히 제2층의 금천교 영역을 빈 공간으로 두어 흉방에 대응하고, 제7층 향원정의 연지는 건청궁 마당의 크기에 맞춰 조성했으며, 재정적 어려움과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건청궁을 끝까지 완성할 수밖에 없었던 대원군의 길지 인식에 대한 기사 등 일련의 상황들은 풍수적 방위관이 매우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의 배치는 리문감주, 팔층변택, 동사택으로 분석되었다. 중심부의 팔층은 오행과 팔괘의 구성으로 금-금-수-목-목-화-토-토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 으며 크게 보면 상생관계인 금생수, 수생목,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으로 연결된다.

변택의 원리는 쌍금, 쌍목, 쌍토가 있는데 이중 어떤 구성을 먼저 배치하는가를 정하는 방법으로 볼 수 있 다. 구성(九星)은 역(易)의 원리를 수용하였는데 인간의 생활이 공간에 영향을 미친다는 철학적 사고 체계 와 결합되었으며, 팔택론은 이러한 공간적 의미를 문·주·조에 두었다. 문·주·조는 인간이 매일 사용하는 장소이고 가장 오래 머물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편안하고 좋은 것을 보장받기 위한 생명의 장소로도 인식하였다. 이러한 원리에 의한 경복궁 중심부 전각에서의 길방은 광화문· 사정전· 강녕전과 교태전· 건청궁 이고, 흉방으로는 금천교· 근정전· 함화당과 집경당· 향원정이다. 동부에서의 길방은 동궁· 주방이고, 흉방은 자경전이다. 서부는 모두 흉방으로 수정전과 궐내 각사·경회루·태원전 등이 위치한다.

이러한 결과를 볼 때, 왕실가족들이 생활하는 주요 공간으로 보여지는 전각은 모두 문·주·조에 해당하는 길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왕실가족이 아닌 그들을 보조하거나, 대신들이 직무를 보는 공간, 또는 조상을 모시는 전각인 태원전 같은 전각들은 모두 흉방에 배치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상의 분석 내용을 종 합해보면 경복궁은 형세를 고려하여 자리를 잡은 터에 풍수적 방위관인 팔택론이 적용되어 전각의 배치가 이 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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