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緖論
1938년 오운육기의학보감이 출판된 지 벌써 8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이 책은 운기이론을 임 상과 결합한 운기처방의 결정판으로써 조선시대 말 기에 출판된 方藥合編에 비견될 만한 운기처방집 으로, 출판이후 대중들과 임상가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아 근래에 이르기까지 근 20여종에 이르는 관련 서적들이 출간되었다.1)
이 책은 크게 운기이론과 운기방약 그리고 부족 한 내용을 보충한 「五運六氣醫學寶鑑追增釋義」로 나 뉘어진다.
운기이론은 일반적인 운기이론과 의학이론들이 실려 있지만 가장 중요한 특징은 출생일을 통해 환 자의 入胎日을 계산하여 入胎日의 客運 客氣를 통해 환자의 체질적인 특징을 파악하여 用藥을 하는 것이다.
운기방약은 甲子年부터 癸亥年까지 60갑자를 나 누고 매해마다 객운과 객기의 순서가 일치하는 해의 통치방인 天干藥과 5개의 처방 그리고 객운과 객기 의 순서가 일치하지 않는 해의 통치방인 中元藥과 5개의 처방을 나열하여 매해마다 12개의 처방을 제 시하여 모두 12×60=720개의 처방을 소개하고 있다.
이어서 「別錄」이 있는데 이상의 방법과 처방을 가지고 치료를 했지만 효과가 없을 때 먹을 수 있는 약과 驚風, 모든 瘡腫에 통용할 수 있는 6개의 처방 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頭, 面, 眼, 耳, 鼻, 口舌, 牙 齒, 咽喉, 背, 胸, 乳, 腹, 臍, 腰, 脇, 皮, 手, 足의 처방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운기치료의 부족한 면 을 보충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오운육기의학보감추증석의」는 오운육기의학보 감의 운기이론의 내용을 보충설명하면서 빠진 내용 을 증보한 이론보충부분과 甲生에서부터 癸生까지의 10개의 통치방과 六氣司天時의 6개의 통치방을 기 술하고 있는데 이는 동의보감에 있는 내용들이다. 이어서 오장육부의 補瀉溫涼藥을 소개하고 五行運氣 隨用藥條를 두어 生年과 生月만 알 때의 처방활용법을 제시하고 있다.
論者는 20여 년 전부터 이 책의 저자인 趙元熙의 행적을 수소문하였지만 서문과 발문에 있는 神穹哲 學醫藥博士, 軍籍典醫 등의 단편적인 행적 외에는 알 수가 없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제적부를 뗄 수가 있었고 후손들을 만나 생애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가 있었다. 이에 족보, 제적부의 기록, 후손들에게서 전해들은 내용, 승정원일기에서 검색한 자료, 일 제강점기의생총목록등의 내용을 종합하여 오운육 기의학보감의 저자 趙元熙에 관하여 연구하여 학계 에 보고하는 바이다.
2. 家系
楊州趙氏 족보와 호적을 통해 조원희의 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趙元熙는 楊州趙氏 시조로부터 21세 孫이 된다. 시조 趙岑은 고려시대 때 戶長 判中樞院事의 증직을 받았고 2세 仁弼은 高麗朝에서 左右衛保勝長을 역 임했다. 3세 誼는 고려조에서 書雲觀正을 역임했고 4세는 末生으로 朝鮮朝에서 領中樞院事兼兵曹判書 · 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고 文剛의 시호를 받았다. 5 세는 瑾, 6세는 參校公 仲輝, 7세는 光震, 8세는 鍵, 9세는 大男이고 10세는 正郎公 峻이다. 11세 慶俊, 12세 始重, 13세 昌錫, 14세 泰珏, 15세 廷彬, 16 세 榮振, 17세 宗逵, 18세 鎭述, 19세 恒淳을 지나 20세 秉寅에 이르니 趙元熙의 부친이 된다. 秉寅은 본래 19세 大淳의 5子로 恒淳이 無子하여 8寸兄의 아들을 養子로 입적한 것이다. 秉寅(호적에는 秉筵 으로 되어 있다.)은 吳氏와 결혼하여 石熙 琯熙 元 熙의 三子를 두었다. 長男 石熙(1857~1923)의 字는 正瑞이고 號는 春崗이며 英陵參奉을 지냈고 묘소는 高山 雲州面 庚川上에 있다고 하였다. 次男 琯熙 (1861~1930)의 字는 俊瑞이고 묘소는 益山 八峰面 에 있다고 하였다.2)
조원희는 양주조씨 文剛公派中에서 參校公派內의 正郎公派의 후손이 된다.
3. 生涯
1) 小科급제와 성균관진사
족보와 제적부 그리고 2018년 12월 5일 손자인 泳鎬, 孫婦인 尹南云으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이야기 와 그 외 가족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 음과 같이 정리해본다.
趙元熙는 1874년 5월 8일에 태어났다. 호적에는 開國 482년 8월 20일생이라고 되어있고 또다른 호 적에는 檀紀 4206년 8월 20일생으로 되어있다. 개 국 482년은 1873년이 되고 단기 4206년도 1873년 이 되나 묘소의 비석과 족보에 모두 1874년 5월 8 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정확하다고 할 것이다
Fig. 1 Cho wonhui’s family register
본적은 제적부를 보면 전라북도 전주군 上關面 大聖里 691번지로 되어 있다.(1983년 행정구역 변 경으로 지금은 전주시 대성동) 가족들의 증언에 의 하면 조선시대 때 마지막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성균 관에 진사로 들어갔다고 한 것을 보면 고향에서 漢 文을 수학하고 1894년, 그의 나이 21세 때 小科인 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족보를 보면 成均進士 다음에 字 鳳瑞라 하였 는데 삼형제가 瑞字돌림으로 正瑞, 俊瑞, 鳳瑞라는 字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큰 형의 호가 春崗인 데 자신의 호를 秋崗이라 하였으니 이도 형제간의 관계 속에서 作號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때 과거는 3년의 간격을 두고 子, 午, 卯, 酉년 마다 실시하였는데 1894년 甲午年에 마지 막 과거가 시행되었다. 제적부를 보면 分家로 因하 여 檀紀 4234년(다른 곳에서는 光武 5년 또 明治 34년으로 되어 있다.) 1월 10일 戶主가 되었다고 하였고 본적이 전라북도 完州郡 龍進面 龍興里 861 번지로 바뀌게 된다.
단기 4234년, 光武 5년, 명치 34년은 모두 1901 년이 된다.
분가를 했다는 것은 이 때에 결혼을 했다는 것이 다. 제적부를 보면 조원희의 첫 번째 부인은 姜大玉 으로 開國 494년(1885년) 1월 12일생으로 되어 있 으니 이때에 17살이 된다.
조원희와 강대옥 사이에 大正 8년(1919년) 1월 20일 重植이라는 아들이 태어나는데 가족들은 이 아들이 어릴 때 열병에 걸려 손쓸틈도 없이 죽게 되 자 이를 계기로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조원희가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보다 휠씬 빠른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승정원일기 고종 39년 임인(1902)
10월 20일(양력 11월 19일) “趙元熙를 徽陵參奉 에 임용한다.”3)고 하였고 고종 39년 임인(1902) 10 월 21일(양력 11월 20일) “휘릉참봉 趙元熙의 본관 을 의원면직하였다”4)라고 하였다. 휘릉은 조선 제 16대 왕 인조의 계비 莊烈王后 趙氏(1624~1688)의 무덤으로 九里市에 있는 東九陵 중의 하나이다. 위 의 기록을 보면 조원희가 휘릉참봉의 벼슬에 있었던 기간은 하루에 불과하다. 참봉은 종 9품의 벼슬로 아마 그를 예우하기 위해 이러한 벼슬을 내렸다가 즉시 거두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白南喆의 五運六 氣學을 보면 조원희를 趙參奉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를 보더라도 조원희가 참봉벼슬을 받았던 것은 확실한 듯하다.
Fig. 2 A picture taken after awarding a decoration from the emperor of Dae Han empire
2) 의학공부와 嘉仁親王 치료 및 의생 면허 취득
가족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조원희와 고종황제와 의 각별했던 관계를 이야기한다. 조원희가 성균관진 사로 있을 때, 고종과 겸상까지 했으며 고종과 의학 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고종이 의 학에 관심이 많아 중국에 가서 의학을 공부해 오라 고 하자 조원희는 고종의 명을 받고 중국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귀국할 때 대량의 의서를 구입하여 조선에 와서 전라도에 있는 절에 들어가서 3년 동안 의학을 연구했다고 한다. 두 번째 부인인 潭陽鞠氏가 절을 찾아가서 보니 방 안에 책을 쌓아 놓고 머리는 귀신같이 하고 의서에만 몰두했었다고 한다. 그가 의학공부를 시작한 것이 1905년 전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덤의 비석을 보면 담양 국씨는 1895년 음력 7월 2일생으로 되어있고 제적 부를 보면 1906년(단기 4239년) 2월 7일 趙元熙 와 鞠順玉이 혼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운육 기의학보감의 跋文을 보면 그는 “奢年 이래로 의학 에 專力하여 명성이 드날려 軍籍典醫로 천거되어 선 발되었다”5)고 하였다. 대한제국 군대가 1907년 8월 1일에 해산되었으므로 그가 의학을 공부하고 의술 로써 명성을 날리고 군적전의로 발탁되고 하는 모든 과정은 1907년 이전의 일이 되어야 한다. 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조원희가 다리를 절었는데 군에 있을 때 낙마하여 다리를 다친 적이 있다고 하였다. 이때 를 즈음하여 嘉仁親王(일본의 제123대 천황 嘉仁, 1879~1926, 재위기간 1912~1926, 연호 大正.)을 치료한 다음과 같은 증언도 있다.
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가인친왕이 병약하고 죽 을 병에 걸려 明治天皇이 자기 아들의 병을 치료하 기 위해 고종에게 명의를 추천해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고종이 조원희를 추천하였고 조원희가 嘉仁의 入胎日을 계산하여 약을 지어 일본에 보내 이를 먹 고 병이 많이 호전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의 황 위 계승자에게 환자를 보지도 않고 약을 지어보냈고 일본황실에서 이를 먹였다는 것은 상식으로 받아들 이기가 어렵다. 論者의 추측으로는 실지로 嘉仁은 몹시 病弱하였고 1907년 대한제국을 방문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 10월 16일 (양력) 1907년 대한 隆熙 1년 조에 다음과 같은 기 록이 있다. “일본국(日本國)의 황태자 요시히도친왕 〔嘉仁親王〕이 방문차 왔으므로 인천항(仁川港)에 거둥하여 만나보았다. 황태자가 따라가서 만나보았 으며, 동반하여 서울로 돌아왔다.”6) 아마 이 때 조 원희가 순종의 추천으로 직접 진찰을 하고 약을 지어서 먹게 한 듯하고 이제까지의 어떤 약보다도 크 게 효과를 본 듯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본 의 황태자가 대한제국을 떠나기 2일 전인 10월 18 일 순종은 황태자를 수행한 모든 일본 사람들에게 勳章을 서훈하였는데 앞의 조원희가 훈장을 받은 사 진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후손들은 이 훈장을 고종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하 나 고종에서 순종으로의 양위가 1907년 7월 하순에 이루어졌으므로 순종에게서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사료된다. 嘉仁이 이 때 한국을 방문한 이후 평생 한국어를 배웠다고 하는데 역시 이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가족들의 증언은 계속 이어진다. 嘉仁의 병 이 호전되자 명치가 조원희를 일본으로 불러 일본에 들어갔고 이때 명치가 神穹哲學醫藥博士라는 명칭을 직접 내려주었다고 한다.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神 穹은 지명이 아니고 신령스런 의술이 하늘에 까지 통했다는 뜻으로 명칭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이후 일본사람들에게 의학을 가르치게 하고 이를 배운 사 람들은 모두 개업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고 한다. 조원희가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석사, 박사 과정을 밟지 않았는데 柳春馨이 오운육기의학보감의 서문 에 당당하게 의약박사라는 명칭을 언급한 것을 보면 일본천황이 박사학위를 준 것은 확실한 듯하다.
그는 1901년 분가하여 완주군 용진면 용흥리 861번지에서 살다가 다시 전주로 잠깐 이사하였던 듯하다. 호적을 보면 大正 12년(1923년) 6월 10일 전라북도 전주군 전주면 高士町 433번지로 移居하 였다고 하였고 다시 昭和 2년(1927년) 2월 24일 전 라북도 전주군 용진면 용흥리 811번지로 入籍하였 다고 하였다.
1923년 그는 醫生면허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 다. 일제강점기의생총목록 2에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조원희 趙元熙 住所 : 全北 全州郡 龍進面 1923.4.5. 醫生免許 登錄 6980番 1923.4.5. 免許期限(-1926.4.4.) 免許地域 : 龍進面 一圓7)
일제강점기 의생목록 은 모두 3권으로 되어 있 는데 1은 永年醫生(갱신이 필요 없는 영구면허를 받 은 의생)목록이고 2,3은 限年醫生(5년 이내의 갱신 기한을 정하여 면허를 받은 의생)목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조원희는 의생목록2에 기록되어 있고 면허 기간이 1923.4.5. ~ 1926.4.4.까지 만 3년이었다. 증언에 의하면 이후 익산과 담양에서도 한약방을 했다고 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호적을 보면 용진에서 거창으로 이주한 것이 나온다. 제적 부에 昭和 2년(1927년) 9월 22일 경상남도 居昌郡 南上面 屯洞里 435번지로 이주를 한 것으로 되어있 다. 이후 晉州로 이사를 가서 남강댐과 진양호가 있 는 인근에서 개원을 하였다.
Fig. 3 A preface of Ounyukgi Uihakbogam
3) 진주에서 개원과 오운육기의학보감 간행
조원희가 거창에서 언제 진주로 이사를 하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제적부를 보면 조원희와 국순옥 사이의 아들인 重轍이 1932년 11월 29일 生인데 晉州市 東城洞 156번지에서 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1932년 이전에 진주로 이사를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진주에 있을 때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하 며 특기할만한 사항은 임시정부요원들에게 많은 약 을 지어서 보냈고 또 약을 받기 위하여 임정요원들 이 진주의 만성각에 와서 자주 머물렀다고 한다. 그 리하여 약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이름을 써서 감사 장을 보내주었는데 집에서 전해오다가 6·25때 집이 폭격을 당해 이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진주에서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昭和 13년(1938 년) 오운육기의학보감의 간행이다. 서문은 소화 11년(1936년) 4월 8일 晦宇 柳春馨이 썼는데 조원 희를 神穹哲學醫藥博士라 칭하였고 의학을 30년 동 안 연구하였다고 하였다. 조원희가 오운육기에 관심 을 가진 것에 대해 가족들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궁중에서 환자의 손에 실을 묶고 실로써 맥을 잡는 것이 정확하지 않다고 여겨 생년월일로 체질을 구별하여 약을 짓는 것이 정확하다고 여겼기 때문이 라고 하며 환자에게서 왕진 요청을 받고 말을 타고 급히 달려 가더라도 구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므 로 미리 체질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 이라고 한다.
오운육기의학보감은 昭和 13년(1938년) 3월 15일에 인쇄를 하고 4월 25일에 발행하였다. 發行 所는 경상남도 南海郡 南海面 北邊洞 121번지에 있 는 南鮮藥業株式會社이다. 오운육기의학보감의 서 문은 昭和 11년(1936년) 4월 8일 晦宇 柳春馨이 썼 고 跋文은 昭和 11년(1936년) 4월 15일 조원희 자 신이 썼는데 醫學士라고 稱하였다. 醫學寶鑑追增釋 義說은 昭和 11년(1936년) 10월 3일 晦宇 柳春馨 이 썼고 醫學寶鑑追增釋義后小叙는 昭和 11년(1936 년) 10월 5일 조원희 본인이 썼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이 책은 진주로 이사한 1932년부터 1936년 사이에 집필하여 1938년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집 중적으로 집필한 시기는 1935, 1936년인 것으로 추 측된다. 그런데 조원희는 왜 그의 책을 시골인 남해에서 출판을 하였을까. 이에 대해서 조원희의 외손 자(장녀 重吉의 아들)인 이철호(1956년생, 남해치과 원장)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Fig. 4 A copyright page of Ounyukgi-Uihakbogam
1935년경 이철호의 祖父인 이춘환은 향교일로 성내에 자주 출입을 하셨고 이때 고종의 典醫를 지 냈던 의약박사 조원희를 만났다고 한다. 그 해 조원 희는 지인들과 함께 남해면 北邊里에 南鮮藥業株式 會社를 설립하여 약업활동을 하셨고 이러한 인연으 로 1938년 남해면 西邊里에 소재한 남해인쇄소에서 오운육기의학보감을 간행하였다고 한다. 1938년 간행 당시 외할아버지가 원고를 붓으로 써서 가져왔 고 이철호 원장의 아버지 李相宗(1916~卒)이 조선 총독부에 가서 출판허가를 받아와서 남해에서 이 책 이 간행되었다고 한다.
두 집안의 인연에 대해 조금 더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1939년 조원희가 가족들을 데리고 일본의 오사카로 떠나자 이상종은 남선약업주식회사를 눈여겨보 고 또 틈틈이 약업일도 돕다가 일본의 오사카로 건 너가 오사카 치전에 입학하여 졸업을 하고 1943년 귀국하여 1943년에 치러진 치과의사 국가고시 1회 에 응시하여 치과의사 면허번호 41번을 취득하여 남해로 내려와 남해치과를 개원하고 이후 조원희의 장녀 重吉은 오사카에서 약전을 졸업하여 가족과 함 께 귀국하여 진주에 정착한 후 이상종과 결혼을 하 였다고 한다.
4) 일본 移住와 귀국
조원희는 1939년 경에 가족들을 데리고 일본의 오사카로 이주하여 在日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진료 를 하였는데 동경 고베 큐슈 등지에서 한인들이 많 이 찾아왔고 淸心丸, 奇龍丸 등의 환약을 많이 만들 어 보내주었다고 한다. 약은 入胎日을 기준으로 운 기를 따져 환자를 上器(임신기간이 306일인 자와 296일인 자), 中器(임신기간이 286일인 者, 276일 인 者, 266일인 者), 下器(256일인 者, 246일인 者) 로 나누어 치료하였는데 上器의 사람은 건강하고 약 효도 빠르다고 하였다.(四女 重甲증언)
일본에서 5년 정도를 보내면서 많은 돈을 벌었고 1944년 2월경 귀국을 하여 진주시 진양호 근처에서 개업을 하여 6·25 전쟁 때까지 많은 환자를 보았다. 이때 가족들이 밤을 새워가며 우황청심환을 만들었 고 진짜 금가루를 써서 금박을 입혔다고 한다. 이때 의 특기할 만한 내용으로는 시골의 한 부인이 암에 걸려 위중하여 병원에서도 수술을 할 수가 없어 포 기한 상황이었는데 조원희가 특수고약을 만들어 암 덩어리를 녹여내어서 사람을 살려 인근의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또 1948년 정 부가 수립되고나서 이기붕을 비롯한 정부의 요인들 이 진주의 만월여관에 머물면서 약을 지어갔고 壯筋 丸을 많이 지어 보내 좋은 효과를 보아 감사장까지 받았다고 한다. 壯筋丸은 오운육기의학보감의 添 付別方에 첫 번째 소개된 처방으로 38種의 약재로 구성되어 있고 광물성 약재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조원희의 중요 비방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6·25전쟁 때 하동군 옥종면으로 피란을 갔는데 그 곳의 부자가 조원희의 치료를 받고 병이 치료되 어 그를 모셔 갔다고 한다.
5) 부산이주와 別世
조원희는 6·25 당시 진주의 한약방이 폭격으로 무너져 내리자 부산의 초량으로 가서 한의원을 개설 하였다. 지금의 한의사제도는 1951년 ‘국민의료법’ 이 제정되면서 새롭게 정착하였는데 조원희도 이때 새롭게 한의사 면허를 취득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天運堂韓醫院이란 이름으로 개원을 하여 1963년 초 까지 환자를 진료하였다. 이때 조중훈 한진그룹회장 이 자주 다녀갔다고 한다. 1963년 초에 노환으로 몸이 안 좋아 진주에 있는 판문동 별장으로 옮겨 5 개월 정도 요양을 하다가 그 해 7월 4일 이곳에서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돌아가시기 전 날 목 욕재계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풍수에도 조예가 있어 당신의 묻을 곳을 지정하고 돌아가셨다고 한 다. 조원희는 평생에 걸쳐 식사 3끼를 드신 뒤에도 검은 콩죽이나 검은 콩으로 만든 간식을 서너번 드 셨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가 90세까지 장수한 비결 이 아닌가 한다. 그 뒤 묘지를 쓴 곳이 팔려 1988 년 경에 1971년 부산에서 돌아가신 후 그곳에 모셨 던 담양국씨와 함께 이장을 하여 지금은 경남 진주 시 내동면 유수리에 있는 진주내동공원묘지 4묘원 2블럭에 두 분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Fig. 5 Couple tombs buried together with wife
6) 白南喆의 五運六氣學에 있는 조원희 의 일화
오운육기학책 속에 조원희가 환자를 치료한 일 화가 기술되어 있다. 비록 조원희를 趙石熙로 기록 하는 등 약간의 오류도 있지만 운기로 환자를 치료 한 예화이고 그의 탁월한 의술을 엿볼 수 있으므로 이에 소개한다.
舊韓末에서 日政初期에 걸쳐 三南에 趙石熙 趙參 奉이라면 세 살짜리도 알을만큼 이름난 名醫였다. 門前成市에 사인교, 가마, 말들이 며칠씩 차례를 기 다리고 못박혀 있는 형편이다. 또 그만큼 「쇳소리」나게 죽을 사람을 살려 놓았 다. 이분의 法이 바로, 이분의 秘藏의 寶刀가 바로 여기에 펼친 正統 五運 六氣學.
이분이 밟았던 醫學공부 방식은 이러했다. 醫學 入門의 「臟腑總論」, 그다음으로 傷寒纂要, 그리 고 運氣總論과 經穴起止······이 모두를 외우는 정도는 물론, 每日日課로 한번씩은 꼭 외우는 것. 그래서 누가 病論을 시작하면 벌써 무슨 病에 어 떤 藥, 여기에 五運六氣를 보아 體質에 맞춰 投藥. 그 以上은 모르겠다. 이같은 基礎위에 그 어떤 醫書인들 涉獵치 아니했겠으며 어떤 臨床經驗은 못 했었을까. 요령있는 공부방식에 뼈를 꺾는 노력! 거기에 비 로소 그 方面에 一人者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새삼스 러운 論理는 아니다. 그분이 引用하는 醫書名들, 지금 市中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한마디, 五運六氣를 모르고 어떻게······ 하는 한숨이었다.
들은 이야기 하나 적어 본다. 오래된 이야기고 보니 무슨 病이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안남지만 하여튼 趙石熙 趙參奉의 運氣솜씨에 대해서 는 病魔神이 있다면 그 이름만 들어도 三十六計 줄 행랑쳐버릴 정도로 무서웠었다고 한다. 지금은 豫防 醫學과 抗生劑 發達로 웬만하면 그 리 어려운 病이 아니게 되었지만 전에는 소위 염병 이라고 하는 腸티브스는 그야말로 可恐할 病이었다. 筆者 國民學校 때만해도 당시 班長이었던 李某君이 一週日 사이에 父母를 한꺼번에 여의어야 했고 한 동네를 쑥밭으로 만들고 지나가기란 如飯事였던 큰 病魔였다. 이른바 傷寒病의 하나인데, 이 傷寒을 잘 다루느냐에 따라 그 醫者의 聲價가 左右되는 때였 다. 傷寒은 別稱이 「運氣」라고도 하는데, 이는 五運 六氣의 十干化氣 天運 流行과 十二支神 氣化 所在에 의해 일어난다는 생각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이 「運氣病」은 五運六氣 즉 運氣를 「익달하게」 다루 지 못하면 못 고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趙參奉 손에 걸린 이 病患者는 시키는 대로만 治 療를 받으면 그야말로 「萬無一失」이었다.
「風邪가 入於 腠理하여 陰陽이 未分」한 즉 感氣 初期에 섯불리 六經 經病藥을 投劑하면 도리어 病을 깊이 끌어 들이는 愚를 저지르는 결과가 된다고 하 면서 治病은 마땅히 五運六氣로 辯臟腑하고 「標本을 須明 後先」해야 함에도 덮어놓고 쉬운 냥금으로 病 에 臨하는 時醫들의 人命 經視 風潮를 개탄해 왔다. 時醫를 그렇게 만든 건 東醫寶鑑과 方藥合編 에게 있다고 趙參奉은 화살을 돌린다. 이 두 名著는 「索引式」으로 되어 있다. 웬만한 漢文 知識만 있어도 무슨 病에 무슨 藥이란 處方을 손쉽게 찾아낼 수 있다. (近來 東醫寶鑑은 버스 안에서까지 파는 冊이 된 程度였다.) 基礎가 잘 다듬어진 醫者가 處方을 고르고, 또 處方은 알지만 藥材와 重量이 잘 기억되지 않을 때 의 索引用으로는 더없이 便利한 책인데, 時醫 들은 착실한 기초공부를 닦지 않고, 여기에만 의존하는 것이라 하여 罪를 묻는다고도 했다.
공부하는 방법은 거의 一定하다. 單語를 외우고, 文節의 뜻을 파고, 文段의 核心을 캐고, 그리고나서 한 文章의 大意를 파악하는 것이 공부의 ABC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學校공부에도 參考書를 못보게 하는 學父 母도 있다. 趙參奉은 東醫寶鑑이나 方藥含編을 그 參考書格으로 비유하는 생각을 갖는 것같았다. 공부는 敎科書爲主로 해야 信力이 붙고 敎科書는 무조건 외워야 내 것이 된다는 그 공부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을 게다. 이야기가 좀 옆길로 나간 것 같다. 제자리로 돌 아 와서 趙參奉이 修學中인 젊은 시절의 어느 때 일 이라고 했다. 한 病家의 招致를 받아 요즈음 말로 往診을 갔었 다. 中年 婦人인데 食飮을 全廢하고 누워있는데, 百 方이 效力없이 高熱로 呻吟, 그야말로 命在 頃刻이 었다. 보니 「水水」臟腑인데 虛熱의 上衝, 附子로서 熱을 陰經으로 끌어 내려야 산다. 附子理中湯. 저 高熱에 附子를 쓴다고 해보자. 큰일날 소리. 主人이 알면은 펄쩍 뛸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附子가 아 니고는 저 熱病의 魔手는 患者의 生命을 내일 하루 를 넘게 해 주지 않을 것이 뻔한 일. 所信이 섰다. 自身이 스스로 藥貼을 꾸려가지고 와서 다리게 했다.
患者가 藥을 마셨다. 물만 마셔도 똥물까지 吐했 는데, 이게 웬일, 藥그릇을 얌전히 비운다. 물론 趙參奉은 그럴줄 알고 있었지만, 사랑에 나 와서 기별을 기다린다. 誤診하여 藥이 잘못 들어갔 으면 卽死할 것이고, 아니면 蘇生, 양단간에 기별이 있을 것. 착잡한 심경으로 호롱불을 마주한 一刻이 三秋같 은 순간과 순간이 흘렀다. 얼마쯤 흘렀는지 모른다. 왔다. 안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신발 끄는 소리, 이윽고 문밖에서 잠 깐 들어오십사 하는 전갈인데, 우선 곡성이 안 났고, 그 목소리에 어딘지 모르게 생기가 엿보여, 마음 속 으로 그러면 그렇지 무릎을 치며 따라 들어갔다. 굴신도 못하고 昏迷中 에 누워있던 아낙네가 일 어나 앉아 있다. 이제 살았다며 물 좀 달란다.
醫者의 기쁨이 바로 여기에 있다. 醫는 仁術, 널리 은혜를 입혀 주는 使命, 그 마음은 사람(仁者 人也)을 사랑하고 사람을 도웁는 것이 아니겠는가. 醫療는 技術이고, 技術인 以上은 各人의 能力 限界가 있는 것은 할 수 없다. 그러나 醫者는 단순 한 技術者일 수는 없다. 그걸 超越하기 위하여 高潔 한 人格과 不斷의 修養이 必要하다. 유명한 히포크라테스의 말이 아닌가. 여기에서 醫道德을 論하려는 것은 아니다. 五運 六氣學을 연구하게 되면, 東洋醫學의 精髓를 알게 됨은 勿論 宇宙의 哲理까지를 터득하게 될 것이다. 東洋醫學의 바탕이 바로 또 이 宇宙의 哲理가 아닌 가. 舊韓末의 그 어지러웠던 世波 속에서 오직 仁術 로서 名聲이 있었어도 교만한지 아니했고, 많은 蒼 生을 건져 놓고 他界한 趙參奉과 그의 首弟子, 어쩌 면 五運六氣學에서 배운 哲學이 그들의 人格을 그렇 게 만들었는지 모른다.8)
4. 子孫
조원희는 1901년 첫째부인인 姜大玉과 결혼하여 1919년 重植이란 아들을 나았는데 열병에 걸려 일 찍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1906년 鞠順玉(제적부에 는 鞠小玉)과 결혼하여 重吉(1921~卒. 夫李相宗, 족 보와 조원희 묘비에는 李聖培로 되어있다.), 重順 (1926~卒. 夫郭周甲), 重大(1928~卒. 夫金永活), 重 澈(1932~1961년 실종, 제적부에는 重轍로 되어 있 다.) 重甲(1934~생존. 夫李曰馥), 重善(1941~생존. 夫朴占龍)의 1남 5녀를 두었다. 重澈은 河順女 (1931~생존)와 결혼하여 泳鎬(1956~생존) 一男을 두었고 泳鎬는 1985년 尹南云과 결혼하여 슬하에 陸曽(1986~ ), 源顥(1988~ ), 은아(1991~ )의 2남 1녀를 두었다.
5. 結論
오운육기의학보감의 저자 趙元熙에 관하여 연 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조원희는 양주조씨 시조 趙岑의 21세손으로 1874년 5월 8일 전라북도 전주군 상관면 대성리(지 금의 전주시 대성동) 691번지에서 夫 秉寅과 母 吳 氏와의 사이에 三男으로 태어났다. 字는 鳳瑞이고 號는 秋崗이며 어려서 漢學을 공 부하여 21세 때인 1894년 조선시대 때 마지막으로 치러진 과거시험인 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 학하였다. 1901년 첫 번째 부인인 姜大玉과 결혼하 여 전라북도 完州郡 龍進面 龍興里로 분가하였다. 고종황제와 겸상을 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던 그는 1902년 徽陵參奉을 除授받았고 이후 고종의 권유로 중국에 들어가 의학공부를 시작하였으며 귀국할 때 대량의 의서를 구입하여 1905년 전후 전라도에 있 는 절에 들어가 3년 동안 의학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뒤 의술이 뛰어나 軍籍典醫로 천거되어 복무 를 하였고 1907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훗날 大正天 皇이 되는 嘉仁을 치료하여 명성을 날렸고 이를 계 기로 일본에 초빙되어 明治天皇으로부터 神穹哲學醫 藥博士라는 학위를 제수받았다. 이는 그의 신령스런 의술이 하늘에까지 통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923년 醫生면허시험에 합격하여 전주군 용진면 일 원에서 진료할 수 있는 限地醫生면허를 취득하여 3 년 간 이곳에서 환자를 보았다. 이후 1927년 거창 군 南上面을 거쳐 1932년 전에 진주로 이사하였다. 남강댐과 진양호가 있는 인근에서 개원을 하였고 이 때 임시정부의 사람들이 많이 와서 그가 지은 약을 받아갔다고 한다. 1935년, 1936년에 걸쳐 오운육 기의학보감을 집필하여 1938년 경남 남해에 있는 南鮮藥業株式會社에서 출판하였다. 이 책은 운기방 약합편의 성격을 띄고 있는데 입태일의 객운 객기를 추산하여 환자의 체질을 확정하고 이에 의거하여 용 약을 하는데 매해마다 12개의 처방으로 구성되어 60년에 걸쳐 모두 720개의 처방을 소개하고 있다. 오운육기의학보감의 영향력은 지대하여 해방이후 지금까지 이와 관련된 서적들이 20여권 정도가 출 판되었다.
1939년경 조원희는 가족들을 데리고 일본의 오 사카로 이주하여 환자를 진료하게 된다. 이것은 1907년 또는 1908년 명치천황의 부름을 받고 일본 을 다녀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단을 내 린 듯하다. 이곳에서 5년 정도를 지내고 1944년 2 월경 귀국을 하였고 역시 진주에서 개원을 하여 수 많은 환자를 진료하였다. 6·25때 폭격으로 집이 허 물어지자 부산 초량으로 이주를 하여 天運堂韓醫院 을 개원하여 환자를 진료하였고 1963년 노환으로 진주의 판문동으로 옮겨 5개월 정도 요양을 하다가 그해 7월 4일 이곳에서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 다. 묘소는 부인 담양국씨와 나란히 진주내동공원묘 지에 자리하고 있다. 자식은 첫째부인 강대옥과의 사이에 重植을 두었으나 일찍 사망하였고 둘째부인 국순옥과의 사이에 重吉, 重順, 重大, 重澈(男), 重 甲, 重善의 一男 五女를 두었다.
감사의 글
이 논문은 2018학년도 대전대학교 교내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해 연구되었음.
This research was supported by the Daejeon University Research Grants(2018)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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