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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ring to The Stupa of Master ChengGuang, Reconsideration of the History of Buddhist Monks' Octagonal Tempietto Shaped Stupa

승광선사탑(乘廣禪師塔)를 통한 팔각정형(八角亭形) 승탑사(僧塔史)의 재고(再考)

  • Received : 2018.12.06
  • Accepted : 2019.02.07
  • Published : 2019.02.28

Abstract

"Stupa of Buddhist Monk, YeomGeo"(844) is known as the earliest Seon-stupa relic remains in Korean peninsula, from which, during late Silla and ealy Goryeo period, there were more than 30 of stupa was built on such canon. and became the well-known material culture in Seon Buddhism in late Silla period. In $9^{th}$ century, with the JeonDeong(delivering the light of Seon)from Tang to Silla, the culture of "GeonTapIpBi(building the pagoda and erecting stele)" was also moved in. And it was right after the style of monk's stupa had been methodically changed in china, from having the room in stupa for the corpse, named as "QuanShenSheLi", to the lessened stupa that contain the cremated. Analyzing the "Master ChengGuang's stupa"(807)and its stele, it can be found the correspondences of octagonal plan and the subjects of ornamentation to that of Stupas built in Silla, reveals they were made by the same canon. By the document in the stele, surmising the historical cause of alteration in Chan stupa, there was the most famous zen master ShenHui at the time, who has the most important role of making the NanZongChan to get the authenticity in Chan Buddhism. His reliqury was the first ${\acute{s}}ar{\bar{i}}ra$ casket discovered among Chan monks' relics, consequentially it was to influence to Chan cuture and size the monks 'stupa for his ${\acute{s}}ar{\bar{i}}ra$. The stupa of master ChengGuang, by its shape and geological location, is the lost piece in the Puzzle of Chan stupa culture between Silla and Tang.

Keywords

1. 八角亭形1) 僧塔 樣式史의 失片

중국 강서 萍乡市上栗县의 乘廣禪師塔은 2013년 중국 제7기 國家文物單位로 최근에 지정되었다. 이미 50년대에 성급 문물2)로 지정되었지만, 중원 중심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시된 편벽한 강서 지역의 문물인 까닭에 뒤늦게 국가 문물 단위로 지정되었다. 필자는 신라 구법승들과 관련된 강서 지방의 관련된 선종사찰들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는 도중에, 楊岐普通寺의 경우 統一新羅 時期 초기 禪宗 僧侶들이 거쳐 갔을 가능성은 있으나 文獻 및 碑文 등 文字資料에 실제로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기에 연구 대상에서 제외 하였었다. 그러나 羅末麗初 시기에 僧塔의 주류를 차지한 팔각 선종 승탑들의 起源에 관한 의견3)들이 분분한 가운데보다 이른 시기의 동일한 刑制의 승탑과의 우연한 조우는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선종을 한반도에 전해온 것은 佛敎 初傳 시기의 外來 法師들이나 使臣들이 아니라 渡唐求法僧들 스스로에 의함이었고 관련된物質文化들 역시 그들의 중국에서 行蹟 중 영향 받으며 의도적으로 선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시대와 지리적 조건상 승광선사탑은 더욱 특별하고 중요하게 다루어질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9세기 이후 북방에서 보여진 큰 규모의 선종승탑들과 달리 강서지역에서는 소규모의 승탑이 등장하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신라에서도 선종 사찰에서 승탑이 불교 문화의 주류로 등장 한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赣湘4)지방을 중심으로 한 南宗禪과에 관한 佛敎史에 대한 깊은 조사와 실제적 文物 對照가 필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 후기 安祿山의 亂 이후 남종의 정통화가 완료되어 가는 과정에서 실제 자료와 物質文化들이 남종이 정통 법맥이라고 공인된 이후 지어진 조당집이나 각종傳燈錄類들과 나타나는 불일치5), 또한 당시 불교 종파의 형성과 사원의 건립의 실제 상황에 대한 무지가 걸림돌이 되었다. 6조 혜능의 실존문제와 그와 관련된 6조 논쟁과 관련하여 벌여진 8세기 중국 불교사의 사실에 관해 여러 역사학자들이 논의 하긴 하였지만, 건축사 및 미술사 분야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통일 신라 시기에 선종이 장보고 세력과 함께 전남 장흥 지방 중심으로 새롭게 퍼져 나가는 것과 관련하여 한국 팔각정형 탑의 祖型을 찾고 남종화에 따른 승탑의 형제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 논의하는 것은 한국 선종 성립사의 남종선 계보로의 발전과 선종사찰들의 등장에 대한 當時에 실제적 현상에 일 보다가선 시각으로 불교 건축 문화의 교류에 대한 이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安史之亂 이후 남종이 정통화가 이뤄지고 변화되는 선종의 물질문화들의 영향을 받은 흔적을 시공의 격리를 통해 그대로 유지했던 신라의 승탑들과 상대적으로 부단히 변화된 중국 선종 승탑의 原貌를 역으로 추측하여 9세기 선종 문화의 맞춰진 퍼즐그림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2. 宗谱와 祖師塔

大中12년(858) 唐宣宗의 명에 의해 전국 사찰들의 조사탑의 수리가 진행된다.6) 이 칙령은 武宗废佛를 회복하기 위함으로 당시에 이미 각 사원들의 조사탑이 이미 보편화 되었고 이를 중시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불교의 종파화를 통해 종단이 사원 속에서 단일 공간을 가지는 것은 당 후기 이후에 형성되었다7). 그리고 그에 따라 종파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조사를 기리고 조사탑이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불교에서 宗谱를 만드는 것은 종파의 정통성과 宗势에 특별히 관련되었으며, 더욱이 선종에서는 정통 계승권에 관련하여 격렬한 투쟁이 있었다. 하지만, 袈裟를 통한 繼承8)는 6조 논쟁이 있기 전에 실제로 없었으며,神会가 이끄는 혜능문파가 正宗으로 천하의공인을 받으며 지금과 같이 여겨지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寶林傳을 시작으로 宗谱,즉 ‘传燈錄類’의 传世文献들이 이에 관한 관습을 보급하였고, 그 계보의 물질적 증거를 남기기 위해 더욱 조사탑을 건립하고 당대 명문가의 글로 탑비를 세우는데 열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당 후기가 되어 갑자기 증가하게 되는 승탑의 종류와 수량은 교학 불교에서 종파 불교화 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 것이며, 중국 본토화 과정에서 기존의 정통성과 丧葬文化 등이 영향을 미쳤다.

2-1. 선종 종파화의 물질문화, 조사탑

알려진 公案 중 하나인 “丹霞烧佛”9)을 통해서 선종의 불교의 물질문화에 대한 태도로, “空”에 상대적인 “有”에 대한 의식을 볼 수 있다. 불상조차 물질적 대상으로 인식하나, 사원에서는 여전히 필요에 의하여 法堂, 僧宇과 같은 구성 요소들이 존재 한다10). 기존의 기타 불교 사원의 배치와 장엄과 비교하면, 비록 선종이 简朴하고 实利의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종파 형성특성에 있어서는 선종만의 고유한 물질문화를 가지고 있다. “祖师禅”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心印”을 통해 “傳燈” 하는 师资相承이 중시되어 건축 배치에 있어서 조사당과 방장, 동시에 사원 밖 공간에는 조사탑과 탑비를 세우게 된다11). 한편, “佛”은 즉 Budha 觉悟者를 뜻하므로, 불탑과 동일하게 승탑은 중시 되어, 이름난 큰 규모의 선종 사원의 구성 중 불탑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조사탑과 경장12)은 세워졌다. 불교의 탑은 주지하듯이 인도의 stūpa에서 그 기원하는데, 본디 사후 분묘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인도 본토의 丧葬傳統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불교와 함께 전파된 탑을 만들어 埋葬하는 장례 역시 天竺의 文化에 依據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 대륙에 다다른 불교에 있어서 舍利信仰과 轉輪聖王 사상과 함께 국가적 차원의 造塔이 확산되었으나 분묘 기능으로서의 불탑은 불교의 中國土着化13)와 함께 종단 형성 후에 이르러 등장하게 되었다. 본래 중국이 지니고 있는 喪葬禮制가 덧붙여져 탑을 건립하고 함께 石碑를 심고 銘文을 새겨 묘주를 기리는 문화가 생겨났으며, 唐 後期에는 僧侶, 居士 등 신분을 막론하고 일반 불도가 죽은 이후에도 탑형의 묘를 짓게 되었다.

李谷乔14)는 이러한 塔碑들에 새겨진 铭文들이 古典을 중시하는 중국의 人文文化 속에서 文人과 所藏家들에서 지속된 관심을 받으며 탑과 탑비는 사라졌지만, 그와 관련된 자료들은 적지 않게 남아 각종 唐·五代시기의 문헌에서 400여편의 塔铭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당 후기 造塔立碑 문화가 보편화 되고, 宋代 이후 사찰의 塔林15) 형성 풍토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짐작 하게 해준다. 또한, 당대 특히 선종에서 보이는 승려들의 袈裟世襲과 树塔立碑의 새로운 형태의 문화는 불교가 중국의 本土文化과 융합하며 형성한 獨自적인 것으로 선종의 중국 自生論에 대한 물질적 증거가 된다.

2-2. 長安 지역의 初期 僧塔

중국 西安 지역에는 方形의 高層 塼塔 형태의 祖師塔들이 아직 몇 基 남아 있으며, 고승의 묘탑 혹은 종파의 조사탑으로 초기 승탑들이 존재하며, 이미 여러 승탑 관련 논문들에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唐代와 비교할 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승탑의 수량은 그리 많지 않다. 최근 중국의 불교 復興으로 많은 수의 사찰들이 再建되고 있지만 名僧들의 墓塔들이 제대로 된 고증 없이 새롭게 지어지거나 수리되고, 심한 경우엔 淸代 승탑을 가져와 唐塔이라 假稱하는 경우도 있으며, 양식상 후대 탑으로 보이나 역시 당탑이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16). 송대 이후 佛敎界의 주도세력이 선종이 된 후, 遼金·南宋 병립 시기엔 남엔 선종이 북엔 밀교가 번성하여 그에 따른 불교 문화를 꽃 피웠다. 남송시기 선종 번영 배경 아래 남방의 사원들에 수많은 승탑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 불교 중심지 또한 江南으로 이동 되어 가는데, 그 전 승탑들의 초기 유형을 살펴보기 위해서 장안 및 낙양 兩都의 승탑들을 주목해 볼 수 있다.

한편, 僧塔史에 있어서 佛光寺 祖師塔이 이른 예로 많이 언급되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지금의 조사탑은 8세기 상반에 조성된 것17)으로, 장례법과 형태에 있어서 南北朝 시대의 것으로 여기기엔 격차가 있어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장안 지역에 남아 있는 唐前期의 승탑들을 본다면 대부분 高層의 樓閣式 塼塔이 主流로 唐高宗总章2年(669) 兴教寺18)에 지어진 玄奘塔과 그 부근의 終南山 일대의 승탑들이 이 類에 해당된다. 이를 慈恩寺塔系统이라 명칭하고 그 유형의 공통된 형태를 살펴보면, 방형의 평면에 일정한 감률을 지니는 입면 비례로 매층 마다 층층이 뻗어 쌓은 벽돌로 처마를 내고 장식이 없는 벽돌을 쌓아 올려 기둥과 포작을 표현하여 목조 樓閣塔을 모방하여 표현하고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표 1. 장안 지역의 초기 승탑 (사진: 본인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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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中國式 葬禮 傳統과 單層 禪宗 墓塔

구체적인 선종의 초기 장례 관습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禪宗史書19)를 살펴보면 인도의 화장 문화를 따르지 않고 중국 전통 장례 세습처럼 육신을 그대로 관에 넣어 탑에 入葬하는 예들을 볼 수 있다. 특히 東土 즉, 중국의 조사들에서부터 명확히 구분이 되며 塔墓와 함께 塔號가 지어지는데 남천축의 外來僧이었던 菩提達磨조차 東土 1代祖로 인도식이 아닌 중국 본토의 방법으로 모셔짐을 볼 수 있다.  [祖堂集] 卷2 菩提達磨條20)에 “묘탑을 열어보니 신발 한 짝만이 보였다”하고, 4祖 道信大師條21)에서 “탑문이 저절로 열리니 선사의 모습이 단정해 보이는 것이 평상시와 다름없어 보였다” 는 내용에서 墓塔이 塔心室의 空簡이 있고 眞身舍利를 모셨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남종선의 중요한 六祖慧能의 “来取吾首22)” 고사에서도 당시의 선종 장례법이 茶毗를 하지 않고 탑을 만들어 全身舍利(肉身)를 그대로 두어 조사의 尊影을 볼 수 있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고승이 寂滅후에 다비를 행하지 않고 육신을 그대로 장례 치르는 것은 일찍이 隨나라의 天台山의 고승 智顗의 예가 알려져 있다.23) 사후 그의 마른 뼈가 특이하게 세워져 단정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았다고 한다. 고고학적 사례들로 唐代에 불교의 중심지였던 龍門石窟에서 발견된 40여 瘗窟 안에는 遗骨이나 葬灰가 안치된 94 개의 瘗穴 있다. 대부분이 당대의 것으로 盛唐 이후에 瘗葬洞窟의 수량이 대폭 증가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24). 이렇듯 全身舍利를 모시는 靈龕(혹은 禪龕)이 보편화된 배경 속에서 묘의 기능을 지닌 탑을 세울 때 尸身를 모시는 실내 공간이 필요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승려들의 장례법에서는 당연히 다비 후 사용되는 舍利器나 莊嚴에 관련된 것들이 존재하지 않음을 유추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선종의 가장 이른 舍利器의 예는, 바로 선종의 정통 분쟁에서 남종에 승리를 가져온 저명한 荷泽神会의 塔址에서 출토된 사리장엄으로 탑의 양식 변화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뒷 장의 남종 정통화 과정과 승광선사탑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다시 논의 할 것이다.

더 이른 시기 서안 지역에 남아 있는 자은사탑 계열의 고층 전탑 양식과 다르게 중국 전통 장례에 어울리며 인도식 스투파 형태가 합쳐진 單層의 亭堂형 형태의 승탑들이 선사들의 묘탑으로 등장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실례들로 살펴보면, 시기적으로 선종사의 이른 시기의 북종선 중심 지역이었던 河南登封의 会善寺净藏禅师塔이 대표적 예가 된다. 그 외 山西 지역의 佛光寺 解脱禅师선사탑을 비롯한 사원 뒤 산 허리에 세워진 팔각의 당대 묘탑들(志遠和尚塔과 無垢淨光塔), 그리고 탑신이 원형 평면을 지닌 運城의 济栖岩寺故大禅师塔과 泛舟禅师塔들을 볼 수 있다. <표 2>에서 실례들을 볼 수 있듯이 앞에서 거론한 선사들의 涅槃 후 全身舍利를 安置하기 알맞은 크기의 심실을 지닌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선종 묘탑들이 墓堂室을 표현하기 위해서 팔각의 평면과 倣木構造를 표현한 것은 라말탑들과 동일하지만, 그 외 표현된 부조들의 주제와 표현에서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25). 또한, 남종 정통화 이후의 唐末五代에 세워진 靑蓮寺慧峰大師塔 탑이나 大雲院七寶塔26)에서 북방 지역에서도 全身舍利를 안치할 공간이 없는 작아진 탑신의 승탑으로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표 2. 하남 산서 지역의 초기 선종 묘탑과 당말·오대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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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羅末時期 禪宗 僧塔의 出現

왜 한반도에 남은 선종 승탑 중 塔心室을 지닌 단층의 초기 묘탑들은 존재하지 않을까? 지금 남아 있는 羅末 승탑들의 예에서 봤을 때, 전신사리를 안치한 影塔들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한반도로의 주요한 전등이 南宗 正統化와 관련된 그 시기로 추측된다.

3-1. 来华求法僧의 行蹟

신라 선종사에 있어서 가장 이른 시기에 중국의 禪을 傳燈 한 이는 神行禅师(704-779)로 알려져 있다. 선사탑이 남겨져 있지 않지만, 그가 이른 시기의 능가문의 북종의 영향을 받았기에 앞에서 본 전신사리가 안치되는 묘탑들을 보고 돌아왔을 추측을 할 수 있다. 신행 이후로 많은 신라 승려들이 渡唐 求法을 하였는데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그 승려들의 중국에서 행적이다. 80년을 전후 하여 南宗禪을 전수받은 禪僧들이 배출 되면서 신라국토에서는 남종선의 佛문화가 꽃 피길 준비하고 있었다. 남종선의 양대 계열이 南岳-馬祖, 그리고 靑原-石頭 모두 赣湘 지역 중심으로 번성하고 신라 구법승들도 800년 전후부터는 이 지역을 찾기 시 작하였다27) . 809년부터 878년 시기에, 마조 계보의 승려들이 시기상 먼저 강서 洪州를 거쳐 갔고,그 후에 石头系谱의 승려들이 다녀갔다. 875년부터 935년 기간 동안엔 앞서 왔던 신라 선승들의 제자들이 다시 구법 활동을 하였다28) . 그리고, 그들이 다녀갔던 湖南·江西 두 지방의 경계지역29)에 승광선사탑이 위치한다.

3-2. 寶林寺와 普照禪師

팔각당형식의 최초의 승탑이라고 알려진 염거화상탑을 알아보기 전에 스승인 염거화상의 승탑을 제작했을 道义禅师의 法孙인 普照禅师,體澄 (804-880)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에 대하여서는 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塔碑文에서 상관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宪安王4년에 武州 迦智山에 寶林寺를 세우고 신라 최초의 禅门을 열었다. 남종선의 본산인 혜능이 주지한 저명한 韶州의 보림사가 신라에도 세워진 것이다.30)

“廉巨和尙塔”은 통일 실라 시기 기존 양식을 탈피한 새로운 석탑 양식으로 그 이전에 진전사지 탑으로 사료되는 중간 과도기로 보이는 탑이 있었지만, 이후에 등장하는 다른 승탑들의 본보기로 보이는 성숙된 양식을 드러내는 탑이다. 廉居和尚의 제자인 體澄은 开成2년 (837年) 同学 贞育, 虚怀 등과 함께 당에 들어가 15州를 돌며 선을 만나 봤다31) 하였다. 당시 중국의 여러 곳을 두루 살피고 840년 장보고 선단을 따라 돌아오게 된다. 염거화상탑이 시기상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보림사의 선종 계보에서의 위계를 생각해 본다면 그 이후에 제작되는 선종 승탑의 範本으로 작용했던 것이 아니였는지 조심스런 추측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남종선의 법계 순서에 합치되며 지리적으로도 구법승들이 봤을 가능성이 있는 묘탑이 강서 양기사의 승광 선사탑이나 그와 같은 刑制의 類들이었을 것이다.

3-3. “八角亭形僧塔”의 形制32)

844년 염거화상탑이 만들어진 이래 고려 중기 까지 많은 팔각정형의 승탑들이 세워졌다. 승탑들은 모두 塔基, 塔身, 塔頂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기는 亞형으로 須彌座 혹은 獅子座처럼 “座位”의 의의로 다시 여러 층으로 나뉘어 각 층마다 浮彫를 통해 사자를 비롯하여 龍 혹은 雲草 등의 裝飾이 있다. 8면의 塔身은 모두 동일한 주제로 莊嚴되어 있는데, 남북으로 문을 두고 문의 좌우 팔면에 四天像 浮雕가 있으며, 남은 면에 창을 두거나 하며 목조 건축을 모방한 構造를 표현하고 있다. 이미 기존에 많은 연구 논문들33)이 있어서 羅末麗初의 승탑들의 세부에 대해서 알려져 있으므로 부연하지 않고 승광선사탑과 염거화상탑과의 비교를 통해 각 탑의 구체적 면모를 살펴보도록 한다.

4. 南宗 正統化 直後의 僧塔 乘廣禪師塔

4-1. 唐廣利禪寺과 神会

지금의 杨岐普通寺는 唐代 廣利禪寺의 이름보다 宋代 方会禪師를 통한 선종 五家七宗 중 한 派인 杨岐宗의 本寺로 불교사에 있어서 널리 알려져 있다. 남종선의 오가 중 臨濟宗에서 黃龍 杨岐 두 파가 분리되어 나오면서 7종이 된 것으로 북방에서 활동한 임제에 의해 河北正定에서 분리되어 나왔을거라고 오해 할 수 있지만, 宗派系統상 그러한 것이고, 方会, 慧南은 모두 浏阳石霜寺 楚圆의 제자였다. 그래서 방회는 석상사에서 20여키로 동남쪽에 떨어진 양기산에 자리를 잡고 혜남은 북동으로 가 長江 근처 호남(湘)、호북(鄂)、강서(贛) 세 지방의 경계에 있는 幕阜山东麓에 자리를 잡았다. 양기산의 경우도 호남과 강서의 경계에 위치하고34) 지리적 관계에 있어서 石头의 衡山과 马祖의  洪州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앞에서 라말 구법승들의 행적에서 언급한 이곳 양기산은 거쳐 갔을 가능성이 적지 않음을 예상할 수 있다35) . 또한 祖堂集에 기록된남종선의 도의 선사가 廣州 寶檀寺에서 受戒 하고 洪州 開元寺에서 서당 지장을 만나고 백장산에 있는 회해를 만났을 때 禪이 동국으로 간다36)는 얘기를 들었듯이 강서지역의 불교 문화와의 관계를 떼내어 생각할 수 없다.

당시의 강서 지역 승탑들과 사원들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없지만, 지금 남아 있는 양기사 승광선사의 탑과 탑비로 대략 유추해 볼 수 있다.

乘廣禪師碑銘중에서37) : ‘禪師諱乘廣……至洛陽,依菏澤會公,以契真乘…… 法 堂四阿,股引僧舍,身心恒寂’

승광 선사의 행적에 대한 내용과 선사가 낙양에서 양기산으로 와 사원을 건립할 당시의 모습에 대해서 알 수 있는데, 지금의 杨岐普通寺는 창건 당시의 廣利禪寺로 승광선사가 唐天宝十二年 (753)에 창건하였다. 그리고, 甄叔禪師에게 嗣法후 唐宪宗元和二年(807)에 建塔立碑를 하였다. 이때 비문은 당대 명문장가 刘禹锡가 撰하였다. 唐 大历年间(766-779)에 사원을 세울때 四阿(우진각) 형식의 법당과 승사가 있었는데, 불전이 있다는 기록이 없고 법당만이 있으니 선종 사원의 초기 형태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시할 내용으로 선사가 30세에 동도 낙양으로 가 荷泽神会를 스승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있다. 일찍이 胡适가 선종사와 관련하여 ‘南宗争法统’의 주요한 인물이라고 거론한 바로 그이다39). 신회는 전 시기의 북방에서 탑심실에 전신사리로 스승의 육신을 모신 승탑들과 달리 규모가 작아지는 그 변화의 원인과도 밀접한 관련이있는데, 이전의 전신사리를 안치하는 것이 아닌 茶毗를 통한 장례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그의 사리기의 등장이 중요한 증거로 적용 된다. 이는 江西瑞昌에서 발견된 僧舍利含과 함께 菏泽神会이후 남종선의 초기 주무대였던 長江 中流의 湘赣 지역에서 발견되는 작아진 규모의 승탑과 茶毗와 入塔 등의 淸規條目들이 기록된 百丈淸規가 이 지역에서 나온 것 또한 당시 변화된 모습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시작에 乘廣禪師碑銘에 등장하는 菏泽神会의 사리기를 둘 수 있다.

4-2. 僧 舍利器의 등장과 僧塔의 變化

앞에서 거론한 가장 이른 시기의 僧 舍利器는 바로 신회 묘탑의 地宮에서 발굴 된 것으로 1983년 12월 낙양시 양식국 용문 곡량 창고를 정리 작업 중 건축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혜능의 제자 신회의 묘탑 石室이었다. 석실 발굴에서 銘文과 金銅 圓塔形의 舍利容器가 발견되었다40) . 원탑형 승사리장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41)으로, 그 당시 남종에서 신회의 거대한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후대 승려들의 매장 방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분명하다. 1988년에 江西省 瑞昌县에서도 唐代 坟墓 발굴 중에 유사한 圆塔形舍利容器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周炅美의『中国古代佛舍利莊嚴研究』에서 瓶이나 函으로 대처할 수 있기에 사리기일지는 확실치 않고 香函의 用途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지만 전신사리를 모시는 이전 장묘관례를 버리고 다비를 통해 화장하였다는 선종 장례의 변화된 사실을 드러내는데는 문제가 없다.

표 3. 唐代 圓塔形 舍利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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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4. 선사탑과 화상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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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乘廣禪師塔

선사탑은 지금의 양기 보통사의 옛 건물군 서북편에 위치하고 있다. 仿木構建築 风格으로 八角亭堂式 묘탑으로 탑의 전체 높이는 2.73미터이며, 塔基의 아래 부분과 塔頂 윗 相輪部에 훼손이 있지만 남종 정통화 시기의 팔각승탑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다. 묘탑이 지닌 사리기와 부장품을 볼 수 없지만 지표 위 탑의 형태와 장엄으로 충분히 라말 승탑과 비교가 가능하다. 아래에 선사탑을 전체적으로 塔基, 塔身, 柱枓鋪作(柱心包)를 포함한 屋蓋部, 그리고 塔頂로 나눠서 廉巨和尙塔과 비교하며 살펴 보고자 한다42).

(1) 우선 塔基는 蓮花가 덮혀 있는 장식의 세 개 단의 구분으로 두 束腰43)가 있는 亞형태로 5개 층으로 나뉘어 부조들이 표현되어 있다. 하부 기단은 3층으로 상부는 2개 층으로 상하부 각 층이 각각의 석재로 제작되었다. 지면과 닿아 있는 바닥 층의 蓮花紋은 풀과 이끼들로 가려져 그 장식이 잘 보이지 않지만, 역시 팔각의 평면 형태에 겹선으로 약간 돌출된 연화좌로 보인다. 그 위 束腰는 두 층으로 나뉘어 아래는 力士와 각종 神獸들이 번갈아 眼象 안에 장식 되어 띠를 이루고 윗 층에는 사자의 여러 모습들이 보인다. 하부 탑기의 상방은 처마처럼 돌출 되어 나온 경사면 아래에 한 층의 받침 위에 처마를 두고 위에 復蓮으로 덮고 있는데, 연화 상하로 한 층의 선들이 각 두꺼운 테두리로 연꽃을 표식하며 처마의 경사가 평평해 지는 곳에 다시 선을 하나 깍아 만듦으로 층의 구분을 다시 내어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시각적으로 비례와 율동감을 지니게 하였다.

윗 속요에서는 팔면 중 한 면마다 두 개의 방형 안상을 두고 그 안에 다양한 모습으로 연주하는 天人奏樂像을 볼 수 있다. 윗 탑기의 상방에는 두 층의 받침층과 거의 경사면이 없는 처마와 다시 그 위를 덮는 복련으로 장식 되어 있다.

탑의 기단부는 禅师塔과 和尚塔 모두 탑신을 받쳐모시는 의미로, 사리 즉 佛像을 받치는 佛座와 같은 의미의 “亞”형의 基壇으로 다음과 같이 비교해 볼 수 있다. 아래 단에 화상탑과 선사탑 모두 안상에 ‘天人奏乐’ 의 동일한 주제가 표현 되었고 선사탑의 기단 하부와 화상탑에 역시 狮子浮雕가 있으며 모두 獅子座로서 불좌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선사탑의 하부기단 아랫 부분의 力士, 神獸像과 연화좌로 탑 전체를 받치는 부분이 화상탑에는 없는데, 지금 국립박물관에 있는 화상탑의 아랫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의 이동을 거치며 그 原모습을 모르기에 다르다고 확답할 수 없다. 한편, 塔身을 이르러 살펴보면, 화상탑과 선사탑이 동일한 範本을 두었음을 예상케 한다.

(2) 선사 탑의 塔身은 남향의 정면에 门钉과 廣鎖를 한 版門을 두는데 그 문 위에 사자44) 頭像을 두었다. 북면도 또한 문을 두었는데 门扉에 门钉과 門環를 두고 照壁45) 부분엔 人头鸟身의 极乐鸟 迦陵频伽를 장식하였다.

문의 좌우 사면에는 高浮彫의 사천왕상이 있는데 將軍裝을 하고 있지만 신체 비례와 도안에서 귀엽고 친근감을 주고 있다. 팔면 중 東面엔 直棂窗(살창)을 두고 윗 부분에는 飞天을 두었다. 서벽에는 雲紋과 비천이 있다. 8각의 모서리엔 圓柱를 사용하고 上下引枋과 昌枋이 모두 사용되었다. 처마 아래 角柱위엔 栌枓(柱頭)와 柱头枋(주심장혀)이 간략하게 부피를 지니는 포작층을 나타낸다.

비록 양 탑이 高浅浮雕와 线의 细描등 风格이 다르지만, 전후에 门을 두고 좌우 4면에 神将像(四天王)을 조각하는 동일한 주제 표현에 그 形制가 一致함을 알 수 있다. 塔身에서 세부표현으로 기둥, 문비, 문창 등과 입면 면적이 차이를 보이는 긴 입면 비례를 가진 지닌 선사탑의 照壁에 飞天 등의 装饰이 있고 栌枓위에 柱头枋들이 팔각을 따라 이어져 띠를 이루고 있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전신사리를 모셨던 이전의 八角亭堂을 모방 표현한 의도는 동일해 보인다.

(3) 屋蓋部: 선사탑의 柱头枋위에는 서까래와 부연이 있으며,转角部에는 화상탑이 單角梁을 사용한 것과 다르게 老角梁(추녀)과 仔角梁(사래)으로 겹으로 쌓아 처마를 더욱 솟아나게 하여 전체적으로 처마의 곡선을 더욱 굴곡지게 하였다. 실제 목구조였으면 삼각형의 枕头木(갈모산방)이 사용되는 것이 보이겠지만, 포작층이 간략히 묘사되어 있어 그 흔적을 볼 수 없으나 처마선으로 짐작할 뿐이다. 지붕 瓦作 역시 상당히 실제 목조 건축물에 가깝게 표현 되어 있다. 기와들에 의한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으며 수막새와 추녀마루의 적새와 숫마루장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잡상의 수의 차이는 있지만 특이하게도 두 승탑 모두 잡상이 추녀마루에서 내려와 있다. 옥개 부분의 가장 큰 다른점은 처마의 기울기와 지붕 举折에 차이에 있다. 이에 따라 선사탑의 전체 입면 비례가 탑신의 높이와 함께 더욱 길어 보인다. 仰視로 처마를 살펴보면 서까래 배치는유사하고 선사탑의 비연 사용에서 오는 차이를 분명히 볼 수 있다.

(4) 塔頂部: 刹座는 각면이 眼象을 갖춘 팔각의 短柱를 시작으로 그 위에 한 층의 정형화된 구름 장식과 수평으로 뉘인 짧은 원기둥이들 8개가 이뤄 만들어내는 바퀴 형태로 모두 전체적으로 8각 평면 형태를 지닌다. 염거화상탑의 옛 사진에서 유사한 것이 보이나 실제로 확인하기 어렵고 그 밖의 山西 平順 대운원의 칠보탑이나 청련사 혜봉선사탑에서 유사한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표 5. 선사탑과 화상탑 세부 비교 (사진: 본인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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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승탑의 “八角” 근원에 대한 소견

羅末麗初 승탑들의 팔각 특징에 대하여 고구려 사지들에서 발견되는 팔각 塔址나 불국사 다보탑과 같은 이형탑에서 실마리를 찾는 선행 연구들이 있으며 교리를 통해서 팔의 연원을 유추하는 견해들과 만다라 도상에 근거해 밀교와의 관계에 대한 의견들도 있었다. 승탑들이 세워져있는 선종 사원에서 화엄의 주불이며 만다라의 중심불인 毘盧蔗那佛을 모신 毘盧殿과 陀羅尼가 새겨진 팔각의 經幢 문물이 많음에 密과의 관계에 주의하게 된다. 형태가 존재치 않는 法身으로서의 비로자나불이 당시 선사들의 불상관에 맞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선종 문화에서 등장하는 여러 밀교적 요소를 논하기 전에 唐代 密敎史에 대한 이해를 재고해 보고자 한다. 漢傳密敎라고 하는 것은 후대인들에 해석되며 구성된 것으로 역사상 실제 하지 않았던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開元三大士가 종파를 세운적이 없었으며 密咒, 陀羅尼念誦, 手印, 壇城, 祝禱의 諸佛菩薩과 密修儀軌등의 수행들은 당시 불교 修行의 기본 내용들이었다.46) 당시 팔각의 圖像을 取했던 禪師들도 이러한 배경으로 造塔에 참여 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唐宋 이후 화엄종이 융성했던 遼·金代에는 많은 수의 높은 팔각의 밀첨형 불탑들이 황실의 발원으로 세워졌는데 모두 탑신 8면에 밀교도상들로 가득 채워 종파화된 교리와 의식에 따라 제작되고 사용되었다. 반면에, 동시대에 남방 지역에서는 선종의 全盛期로 사원 배치에서 불탑의 입지가 점점 사라지고 사원 밖 고승들의 단층의 묘탑들이 무수히 세워졌다. 다른 작은 예로 양기사에 있는 승광선사의 제자 견숙선사의 승탑을 보면, 승광 선사는 신회의 직계 제자로 荷澤 계열에 있었지만 그의 제자 견숙은 葛兆光의 연구에서 보이듯이 홍주계열로 돌아서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연유에서인지 그 의 묘탑은 異形으로 방형의 기단에 탑신은 팔각으로 되어 있다. 탑신이 아니라 기단의 남북면에 사천왕상이 표현되어 있고 탑신에는 고승의 존영이 부조 되어 스승의 묘탑과 큰 차이를 보여준다47). 그리고, 강서 지역에 있는 남아 있는 馬祖의 墓塔48)이나 智藏 탑의 경우 방형의 형태를 지니고 남아 있으며 그 외 지역의 당대 남종선 초기의 승탑 중 탑좌는 8각을 지니나 탑신을 卵형49)으로 두는 탑들도 보인다. 각 시대 각 제자들이 스승의 묘를 장엄할 때 선택한 것으로 사료된다. 建塔立碑할 시기에 탑의 형태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없는 조건에서 팔각의 형태를 대한 근원 탐색은 당시의 문화현상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6. 승탑사에서 퍼즐 조각으로서의 의의

羅末麗初라는 일정한 시기에 등장하고 사라진 팔각정형 선종 승탑의 유행은 당시 선사들의 중국으로부터 南宗禪의 傳燈과 함께 들여온 建塔立碑의 문화로, 기존 신라 불교계에서 自立하기 위해 선택하고 固守한 현상으로 보인다. 당시 남종선이 번성했던 중국의 湘·贛 지역에서 활동한 신라승들이 돌아와 創寺하고 入寂 후 기존의 석탑 양식에서 벗어난 八角亭形의 單層 石塔을 건립하였다. 그 중국의 영향을 찾는데 있어 기존연구들에서는 북방의 탑심실이 있는 묘탑들을 주요한 예로 하고 그나마 비슷한 크기와 모양으로 草堂寺의 鳩摩羅什舍利塔50)을 많이 거론하였지만, 제작연대와 탑에 대한 정보가 불확실하고 신라 선종승탑의 형제와 일치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승탑이 지닌 팔각이라는 특징으로, 멀게는 고구려의 팔각탑지를, 그리고 근접한 시기로 불국사 다보탑을 연원으로 거론한 연구들도 있었다. 본 논고에서는 9세기를 전후한 선종사에서 있었던 변화를 고려하여 문물들을 퍼즐 조각으로 삼아 9세기의 역사지리도를 완성해 보는 시도를 해 보았다. 7세기 장안 종남산 일대에 세워진 고승들의 고층 전탑들을 시작으로 고승들의 묘탑이 불교사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불교 중심지역의 이동과 함께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宗法思想을 강하게 지닌 선종은 종파로서 발전함에 따라 인도에는 없는 조사탑의 건립과 탑비를 세우는 중국식 묘장방식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현존하는 8세기 중엽의 嵩山 會善寺 淨藏禪師塔과 당시 교통 화북 지방의 중심지였던 運城 지역의 승탑들, 그리고 오대산 불광사에 남은 승탑들처럼 塔心室에 고승의 시신을 모실 수 있는 공간을 지닌 단층 탑들과 조당집을 비롯한 전등록류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정한 내부 공간을 지닌 북방의 단층 선승탑들과 9세기 이후 한반도에 세워진 羅末 승탑 사이의 빈자리가 존재하는데, 선종의 6조 논쟁에 따른 남종이 정통화가 이뤄진 이후 9세기 초에 세워진 江西 楊岐寺에 현존하는 승광선사탑(807년)을 그 자리에 채워 놓으면 長江 中下流 지역에서 발견되는 작아진 규모의 승탑들과 연결이 가능하게 된다. 선종의 정통성 분쟁이 있는 기록들 속에서 중심 인물인 荷澤神會의 사리장엄과 이와 동일한 형태의 강서 瑞昌縣에서 출토된 원탑형 사리용기를 통해 茶毗가 묘탑내부공간의 변화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추측할 수 있고, 신회의 제자였던 승광선사의 묘탑은 북방과는 다른 새로운 형제에 의한 것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염거화상탑과 승광선사탑의 세부 비교를 통해서 탑기에서 보이는 사자상, 연화문, 천인주악의 동일한 장엄 주제와 탑신의 8면에서 앞뒤 문을 두고 좌우에 신장상을 부조로 장식하고 모음지붕의 목구조를 모방해 표현하는 일치하는 형제를 보여준다. 두 승탑이 동일한 範本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추측케한다. 그리하여 9세기 신라 禪僧들이 廣利禪寺에서 승광선사탑을 實見한 증거는 없지만 남종선의 호남·강서 지방에서 心印을 얻고 해동으로 전등을 해오는 과정에서 승탑의 문화도 함께 가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8·9세기 선종문물사로 그려진 퍼즐그림에 빠졌던 한 조각의 양기사 승광선사탑을 찾음으로서 羅末麗初 八角亭形僧塔의 淵源에 한 발짝 더 다가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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