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veloping of 'benevolence and justice(仁義)' and 'individual's self desire(私欲)' in Chosŏn commentators of Daodejing (道德經)

조선시대 『노자(老子)』 주석서에서 '인의(仁義)'와 '사(私)' 개념의 전개

  • Received : 2011.02.07
  • Accepted : 2011.03.05
  • Published : 2011.03.31

Abstract

In this paper we show how the perception of heavenly principle(天理) and definition of individual desires(私慾) in the five commentaries on Daodejing(道德經) was changed over time. The five commentaries on Daodejing(道德經) composed during $Chos{\breve{o}}n$ are 'Sooneon(醇言) by Lee, Yul-gock (李珥,1536~1584), 'SinJoo-DoDuckKyung (新註道德經) - or New Commentary on Daodejing(道德經) - by Park, Se-dang(朴世堂,1629~1703), 'Dodukjigi(道德指歸)' by Suh, Myoung-euing(徐命膺,1716~1787), 'Chowondamro (椒園談老)' by Lee, Chung-ik(李忠翊,1744~1816), and 'Jungro(訂老)' by Hong, Suk-joo (洪奭周,1774~1842). The course of history in understanding the book, "Daodejing(道德經)," demonstrated that by the late of $Chos{\breve{o}}n$ Dynasty in the 18th century, the notion of 'the moral law for the community' has changed. Neither Suh, Myoung-euing nor Lee, Chung-ik emphasized 'the necessity for the truth of the heavens.'Instead, they focused more on the 'individuals' who followed the moral law than the moral law itself. They did not see the individual desire as the object that had to be discarded. Within the context of this framework, the individual's role had changed from the person who had to be obedient to the law to the subject who judged the moral law all by him/herself. This process of breaking up 'the goodness of the community' led the $Chos{\breve{o}}n$ Dynasty of the 18th century in the transition period to the modern era. In other words, it was the time when the introspection of the 'moral law' prevailed in the $Chos{\breve{o}}n$ Dynasty occurred naturally and spontaneously among the Confucian scholars, which implied the reconceptualization of the 'self-awareness' or 'the point of view on the individual's self-desire' was occurred in the context of academic development during the late $Chos{\breve{o}}n$ Dynasty.

조선시대 "노자" 주석의 특징은 '유학자의 노자 읽기(이유석노(以儒釋老))'로 대표된다. 그러나 조선사상사 안에서 "노자" 주석사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좀 더 미시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본 논문에서는 유학과 대립되는 "노자"의 '인(仁)을 끊고 의(義)를 버린다(절인기의(絶仁棄義))', '성인은 어질지 않다(성인불인(聖人不仁))' 등의 사유가 5종의 "노자" 주석서에서 어떻게 해석되는가를 살피고, 나아가 시대에 따른 해석의 변화과정에 주목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인의(仁義)'는 당대 사회의 윤리적 표지이며, 모두가 따라야 할 공동체의 선이었다. 이이 박세당 홍석주가 "노자" 텍스트 상의 '인의(仁義)' 부정에 대해 유자(儒者)의 입장에서 비판하거나, '인의(仁義)'를 적극 변호한다면, 서명응과 이충익에 이르면 '인의(仁義)'는 '공공선'의 위상에서 벗어나, 판단 주체의 도덕적 자각이 요구되는 도덕률로 언급된다. 또한 율곡과 홍석주가 '천리(天理)의 공(公)'으로서의 '인의(仁義)'의 추구가 '무사(無私)'라고 본다면, 이충익에게서 '무사(無私)'란 개체의 이익을 위해 인의(仁義)를 따르는 것을 반성해야 되는 상태이다. 이 때 반성의 주체는 사회공동체가 아닌 개인이다. 요컨대 조선시대 "노자(老子)" 주석사 안에서 '도덕률'에 대한 인식변화는, 천리(天理)의 당위성이 강조되는 중세시기에서 근대로 넘어가면서, '공동체의 선(善)'이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 안에서 개인은 도덕률의 순종자에서 도덕률의 판단 주체로 변모하였다. 서명응 이충익의 이러한 새로운 시도에는 18세기 정치 이데올로기화 된 정주학에 대한 반성과 극복의 과정이 투영되어 있다.

Keywo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