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The Royal District in Gyeungju-city was placed in lower surface of alluvial fan that was formed during the Last Glacial Age. During the Holocene, Bukcheon-river was reached in the dynamic equilibrium status and the form of river channel was similar or same to the present. The cases of dying people and carrying houses away by flood for ancient history in Gyeongju were six times, in 131, 160, 350, 496, 657 and 703. Like this big flood was happened at interval of $150{\sim}200$years. A period of big flood appearance in Bukcheon-river was extremely long. Therefore the people who had lived in Gyeongju for ancient history perceived that most part of riverbed of Bukcheon-river was a safety place from flood damages. Not only private houses. In east part of Bunhwangsa temple, that is, west side of Bukcheon-river where the river energy is maximum, a pillow block was built to prevent a lateral erosion but any artificial riverbank was not. In spite of high flood possibility in Bukcheon-river, there was no facility to prevent floods in this section. Also, deposits of flood are not identified. This point is very suggestive that Bukcheon-river did not flood for ancient history.
현재 경주시 북천, 서천, 남천으로 둘러 싸인 왕경 지역의 대부분은 최종빙기 동안 형성된 선상지 저위면에 해당한다. Holocene 중기 이후 북천은 이미 동적평형상태에 도달하여 하도의 형태와 폭이 현재와 유사하였거나 같았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경주 지역에서 홍수가 발생하여 사람이 죽거나 인가가 떠내려간 것은 $30{\sim}60$년 간격으로 발생한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150{\sim}200$년 간격으로 나타났다. 북천은 대규모 홍수 발생 주기가 상당히 길었으므로, 고대 동안 사람들은 북천 하상의 많은 부분을 홍수 피해로부터 거의 안전한 곳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는 고대 동안 북천에 제방이 조성되었다는 주장이 지속되고 있다. 북천의 하천에너지가 최대가 되는 분황사 동쪽 북천 좌안에서는 측방침식을 막기 위하여 축대를 조성하였으나 인공제방을 조성하지 않았다. 지형학적으로도 왕경 지역의 선상지 지형면 위에 고대의 충적층을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선상지 퇴적층 위에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초기 철기 시대의 문화층이 신라 시대 문화층과 함께 분포한다. 아울러 범람을 막기 위해 북천을 연하여 숲을 조성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대 동안 북천이 범람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