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G-YOOK-DANG's and Irreverence by casting upon the world

장육당(藏六堂)의 육가(六歌)와 완세불공(玩世不恭)

  • Published : 2006.07.01

Abstract

JANG-YOOK-DANG(장육당) is the pen-name of Lee, Byeol(이별). His elder brother is Lee, won(이원). He was putted to death by the king Yeon-san(연산군). So abandoning the way of the world, JANG-YOOK-DANG hided himself at mountain valley in Peong-san of Hwng-haedo(황해도 평산). Here he angled for fish and with the persons over sixty years old drunk, sang the songs. Then he composed the poem . This poem spreaded abroad, and came to the ears of Lee, Hwang(이황). He criticized this poem to have irreverence by casting upon the world, not to have gentleness and affability. But imitating the poem he composed intended to be sung. For that gentleness and affability are the instruction of the Poetry, he filled the poems with contents of the gentleness and the affability. But the livings of the two persons were different, and then their poems was intended to be sung were different. In these different contents, we can not say that this or that is right. JANG-YOOK-DANG would do to express his bitter sentiments by his song.

장육당은 이별의 호이다. 그는 재사당(再思當) 이원의 아우다. 이원은 성종 20년에 급제하여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갑자사화에 죽임을 당하였다. 이별은 형 원이 나주로 귀양감에 교외에서 눈물로 이별하였다. 이로부터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황해도의 평산에 집을 짓고, 그 집의 이름을 장육당이라 하였다. 늘 소를 타고 술을 싣고 향사의 기로들을 이끌고 낚시를 하기도 하고, 혹은 사냥도 하였다.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해가 저물어도 돌아가기를 잊었다. 술을 마실 때마다 취하고, 취하면 노래하고, 혹 눈물 흘리며 울어 슬퍼하였다. 이별이 당호를 장육당이라 함은 $\ulcorner$잡아함경$\lrcorner$의 '거북이 있었는데 야간(野干)이란 짐승에게 잡히었다. 머리와 꼬리 그리고 네 발을 껍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으니 야간이 성을 내다가 가 버렸다. 부처님이 여러 비구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마땅히 거북이 머리와 꼬리 그리고 네 발을 감추듯이 스스로 육근(六根)을 감추고 있으면 마귀가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하였다'에서 취한 것이리라. 장육당은 재사당의 아우요 사육신인 박팽년의 외손자이다. 갑자사화에 형이화를 입음에 그의 형제들도 연좌되었다. 연산군이 폐위된 뒤에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장육당의 <육가>라는 것이 세상에 전파되었다. 퇴계는 이 이별을 평하여 ' 매우 오만하게도 세상을 버리고 자취를 숨겼다' 하였다. 퇴계는 노래 부르기(부르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말로 가사를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래하는 우리의 가곡이란 대체로 그 말이 음왜하기 때문에 말할 것이 못되었다. 그가 말한 우리말의 노래란<쌍화점>과 같은 비문인들의 가사를 가리킨 것이다. 그래서 문인들이 지은 <한림별곡>을 거론하게 되었는데, 그것마저 긍호방탕하고 설만희압하여 군자들이 마땅히 숭상할 바가 못된다고 거부하였다. 이 때 눈에 띈 것이 이별의 <육가>였다. 이별도 문인이었기에 한림들의 <한림별곡>과 비교해 볼 수 있었다 <육가>가 더 낫다고 판단하였다. 판단의 기준으로는 형식과 내용이 다 고려되었을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육가>가 더 낫기는 하지만, 아깝게도 완세불공(玩世不恭)의 뜻이 있고 온유돈후(溫柔敦厚)한 내실(內實)이 적다는 흠결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퇴계는 이 <육가>를 약방(略倣)하여 <도산육곡> 두 편을 지었다. 그러고도 이것이 료단(鬧端)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걱정하였다. 퇴계가 말한 '온유돈후'는 시교(詩敎)의 이상(理想)이다. 이 시교는 이미 한대(漢代)의 $\ulcorner$예(禮)$\lrcorner$에서 표방되어 온유돈후(溫柔敦厚) 시교야(詩敎也)'라 못박고. 플어서 '온(溫) 위안색온윤(爲顔色溫潤) 유(柔) 위청성화유(爲情性和柔), 시의위풍간(詩依違諷諫) 부지절사정(不指切事情) 고운온유돈후시교지야(故云溫柔敦厚是詩敎也)' 라 하였다. <육가>에는 이 시교의 외면적인 따스함과 내면적인 정(情)과 성(性)의 부드러움이 적고. 그 반대로 풍간하여 지절사정(指切事情)함이 강하였던 모양이다. 풍간하여 사정(事情)을 매몰차게 지적하여 논평하였음을 퇴계는 '완세불공(玩迷不恭)'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장육당은 청(淸)과 탁(濁)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것의 분별도 하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을 완농(玩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진환(塵 )에서 초연(超然)했던 것이다. 천석고황(泉石膏 )으로 태평성대(太平聖代)에 사시가흥(四時佳興)을 한가지로 하는 퇴계와는 그래서 다르다. 퇴계는 순풍(淳風)과 어진 인성(人性)을 긍정하였기에 만족하고. '고인(古人)의 녀던 길'을 끊임없이 행(行)하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완세불공(玩世不恭)'과 '온유돈후(溫柔敦厚)'가 판별되어진다. 장육당이 '완세불공(玩世不恭)'했다면, 그것은 자취(自取)한 것이요. 퇴계의 '온유돈후(溫柔敦厚)'함도 스스로 취한 태도이다. 이 자취(自取)항에 시비(是非)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장육당이 너무 우뚝하기에 퇴계는 '위태견연(爲太傲然) 위태오연(遺世放跡)'이라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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