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urial of the living with the dead in Silla Tomb

신라 고총의 순장

  • Published : 2002.06.30

Abstract

The Burial of the living with the dead in Yeongnam Region began to appear between the late 3rd and the early 4th centuries when dramatic social changes, such as the emergence of fortresses, stoneware, and the division of Gyeongju style and Gimhae style ou

영남지방의 순장은 각지에 방어적인 성격의 토성의 등장, 도질토기의 발생, 경주식 목곽묘와 김해식 목곽묘의 분화가 발생하는 등 어떤 획기적인 사회변화를 수반하고 있던 시기인 3세기말 4세기초에 발생하여 고총단계에는 신라 중앙인 경주와 지방 고총에 보편적인 장법으로 행해진다. 이후 6세기 신라의 체제 정비를 통한 중앙집권국가로의 출발을 기점으로 해서 점차 사라진다고 볼 수 있다. 순장자를 어떻게 죽였는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단지 순장자의 배치형태는 5개의 형식(복천동형, 경주형, 임당형, 달성형, 양산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 바 이 형식은 묘제와 관련해 볼 때 순차적으로 발생해서 유행하고 낙동강 하류, 중류, 경주, 경주의 주변 등으로 지역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신라에서 순장을 동반하는 묘의 묘주는 착장유물을 중심으로 한 계층화를 통해 볼 때, 경주의 경우 왕과 왕족, 최고의 귀족 등으로, 지방의 경우 소국단위 또는 별읍단위의 누세대로 계승되는 간층과 그 가족 집단이 된다. 또 경주를 중심으로 볼 때, 경주에서 외부로 향하는 제1의 결절지라고 볼 수 있는 지역(의성, 경산, 대구, 창녕, 양산, 보다 이른 시기의 부산)들의 묘가 그 외 지역들의 묘들에 비해 순장자 수가 많은 특징이 있고 이것은 착장유물과 부합되어 당시 지방의 간층들이 위계화 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착장유물 등으로 분석한 결과 신라의 경우 노예가 순장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순장자는 모두 근시적 존재인 시동, 시녀, 호위무사, 재산관리자 등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노예가 순장되지 않았음은 일반적으로 노예의 순장이라고 해석한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들에 배치되는 것으로 당시의 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Keywords